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200화 (200/624)

제200화

199화-잠룡대 (5)

“생각보다 더 쉽네.”

한 달.

그동안 잠룡대를 데리고 중원을 돌아다니던 설천위는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산채 하나를 박살 냈다.

뭐, 야적이나 수적 놈들 것도 있으니 산채라고 표현하는 건 좀 어색하지만, 도적놈들이 다 거기서 거기지.

산채로 통일이다.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던 설천위는 불쏘시개로 괜히 모닥불을 뒤적거리며 불만을 표했다.

“생각보다 산적들 수준이 더 떨어지네.”

“육체의 단련 정도가 다르니까.”

그 불만에 함께 불침번을 서던 여웅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공을 금제하고 싸운다고 하지만, 산적들과는 육체의 단련 정도가 다르다.

물론.

“난전의 위험성은 다들 몸으로 익혔으니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뭐, 사실 거의 그거 하나 보고 나온 거긴 하지.”

내공을 금제하고 싸우면, 벽 하나가 사라진다.

절대 닿을 수 없는 속도가 되지 않고.

절대 넘을 수 없는 근력의 차이가 사라진다.

도적놈들이 잘 짜서 공격하면 잠룡대 대원들에게 충분히 칼침 한 방 정도는 넣을 수 있다는 소리다.

인간의 팔은 두 개고, 막아야 할 방향은 팔방이니.

도적들의 합공 솜씨는 상당히 허술해서 많아야 네다섯 개가 한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팔 두 개론 버거워진다.

현실에서 다대일의 싸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려 주는 증거라고 해야 하나.

옆 사람에게 의지하는 게.

옆 사람에게 의지가 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다들 요 한 달간의 싸움으로 충분히 배웠을 거다.

또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의 가치와.

무림학관의 교육으론 배울 수 없었던 결속의 의미도.

“솔직히 말해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응? 갑자기?”

이 한 달의 고생이 나름대로 가치가 있었다고 만족하던 설천위는 여웅의 말에 피식 웃었다.

“대단하긴 뭐가?”

“자신의 수련만으로 바쁠 텐데 이런…….”

“아, 그런 건 신경 안 써도 돼.”

“하지만, 이 도적 토벌은 너한테 별 의미가 없지 않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긴 하다.

설천위의 실력은 이미 웬만한 산적 따위는 노려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니까.

하지만.

“그게 또 아니거든.”

꼭 검을 들고 설쳐야만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

“나는 내 나름대로 잘 챙기고 있으니, 걱정 말고 수련에나 집중해.”

“그렇게 말한다면 알겠다.”

고개를 끄덕이고 여웅은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불침번은 모닥불을 보면서 멍이나 때리라고 서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그런 여웅을 바라보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올렸다.

얻는 게 없기는.

‘두둑해서 넘칠 예정인데.’

* * *

사실 처음엔 진짜 잠룡대의 실전 경험을 위해 토벌을 나섰다.

학관 주위를 돌며 한 3주 정도 도적들이랑 싸운다며 실전 감각도 생길 테니까.

실전을 겪어 본 자와 아닌 자의 차이는 꽤 크다.

사람이 사람에게 무기를 휘두를 땐 수많은 망설임이 그 무기를 붙잡는다.

그리고 그 저변에 깔려 있는 가장 큰 망설임은 ‘이 공격으로 이 사람이 죽지 않을까?’이다.

그것이 만들어 내는 틈은 솔직히 말해서 아주 크다.

만약 학관 내에서 벌어지는 친선전이었다면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상대는 흑룡학관, 그것도 적랑대일 가능성이 백 퍼센트인 상황.

공격의 순간, 상대의 죽음을 두려워해 생기는 작은 망설임조차 크나큰 걸림돌이 될 거다.

그렇다면 그 걸림돌은 어떻게 치워야 할까?

아주 간단하다.

경험해 보면 된다.

사람을 상대로.

이 공격이 얼마나 강한지.

이 공격에 상대가 얼마나 다치는지.

이 공격으로 상대가 죽는지 아닌지.

직접 경험해 보면 된다.

그런 경험으로 가장 좋은 것이 실전이고.

몸에 익은 대로 나오는 무공을 쏟아 내며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 위력은 기억에 아로새겨진다.

이 정도라면 상대가 죽지 않는다.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만으로 망설임이 사라지고, 기술은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내공을 쓰지 않는 반쪽짜리 실전이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느냐고?

글쎄, 그 실전이 의미가 없을 거라는 생각도 동의하기 힘들지만, 내공을 쓰지 않는 반쪽짜리 실전만 치를 거라는 생각도 동의하기 어렵다.

내가 적이 좀 많아야지.

아마 내공 없이 치르는 실전이 더 적을 수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할 정도로.

이 토벌은 그런 뜻 깊은 의미를 가지고 행해지고 있다.

그런 거다.

결코 사욕으로 행해지는 토벌이 아니다, 이거야.

“흠흠.”

[아주 입이 귀에 걸렸구나.]

주섬주섬 주머니에 금품을 담으며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애들이랑 나눠 가지잖아요.”

[아주 그냥 도적이랑 다를 게 없구나.]

“뭐, 정파도 한 꺼풀 벗기면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 말로 뺏느냐 칼로 뺏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혀를 차는 천마의 말을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넘긴 설천위는 다시 물건을 챙기며 천천히 기억을 되새겼다.

사실 이런 금전적인 것도 좋지만, 진짜 중요한 건 이런 금품이 아니다.

‘분명 이 근처에 있을 텐데.’

진짜 토벌을 위해 학관을 나와서 돌아다니다 보니 익숙한 지명이 들렸다.

게임 속에서 찾아냈던 기연이 있는 곳.

요 한 달간 찾아낸 물건이 무려…….

‘하나도 없지. 씁.’

수색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 지역에 있다는 것과 그것이 있는 지형 정도만 알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니까.

흑룡학관에서 영약을 찾았을 때처럼, 그 지역에 도착해도 어느 정도 수색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토벌을 목적으로 와서 죽치고 앉아 수색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잠룡대를 수색에 써먹을 수도 없고.

그럼 혼자 꿀꺽 못 하잖아.

뭐, 여태까지 지나왔던 지역에선 솔직히 적당히 쓸 만한 것들뿐이라 그랬지만…….

‘이번 건 무조건 먹어야 해.’

영약은 아니다.

내공은 언제나 부족하니 영약이라도 대환영이지만, 이 육도의 세계엔 영약만이 기연이 아니다.

무공은 물론이고, 무기나 방어구도 전설의 영역에 닿은 것들이 있다.

허나,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물건들이 있다.

게임이라면 반드시 있는 것.

‘태곤옥(颱鯤玉)은 무조건 먹어야 돼.’

장신구다.

뛰어난 무기를 얻는 것만큼이나 바로 체감이 되는 스펙업.

파밍의 기본은 본래 무기부터이지만…….

‘일단 먹을 수 있는 것부터 먹어야지.’

태곤옥(颱鯤玉)은 태풍을 품은 알이다.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 신체를 가볍게 하고, 움직임에 바람의 흐름이 뒤따른다.

즉.

‘공격에 풍 속성 대미지가 추가되지.’

이게 현실에선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겠지만 얻어서 나쁠 게 없는 수준이 아니라 반드시 얻어야 할 물건이다.

이 세계에서 속성 공격이란 건 곧 기(氣)를 품은 공격이라 인간은 물론이고 영체에게도 그 대미지가 들어간다.

앞으로 싸울 상대는 인간과 인외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반드시 얻어 둬야 할 물건이다.

무엇보다.

‘가지고만 있어도 효능이 나타나는 물건이니까.’

보옥 형태의 장신구이니 그냥 품에 넣고만 다니는 것으로 충분하겠지.

“천위, 정리 끝났다.”

“응? 벌써?”

“벌써라고 하기엔 꽤나 시간이 지났는데.”

희희낙락 도적놈들의 재물을 쓸어 담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

여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주위를 둘러봤다.

일단 여기는 아니다.

태곤옥으로 보이는 물건은 코빼기도 안 보였으니.

뭐, 상관없다.

“전부 끌고 가서 한 이틀 마을에서 쉬어.”

“알겠다.”

설천위가 내민 보따리를 받아 든 여웅은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움직였다.

도적들은 그냥 두들겨 팬다고 끝이 아니다.

전부 죽여서 땅에 묻어 버릴 게 아니라면 갱생시킬 필요가 있는데 설천위를 비롯한 잠룡대에겐 그럴 시간이 없다.

느긋하게 죽치고 앉아서 도적놈들을 괴롭히며 정신 개조를 할 시간이 없다는 소리다.

수련하면서 이동하기에도 바쁜데 무슨.

그래서 가장 정석적인 방법으로 움직이고 있다.

도적을 두들겨 패서 제압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히 관아에 끌고 가면 된다.

그러라고 나라가 있고, 관아가 있는 것 아닌가.

세금을 왜 내는데.

그렇게 치안을 유지하고 외부의 적을 막아 달라고 세금을 내는 건데.

법과 체계라는 것은 그것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있는 거다.

“편해서 좋네.”

굴비처럼 엮여서 끌려가는 도적들을 바라보며 설천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21세기였으면 도적도 인권이 있는데 이런 무자비한 폭력적 제압은 인권 탄압이라며 한바탕 난리가 났을 거다.

인권이 부족한 세계라서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이러니하네.

……이런 쓸데없는 고민이나 할 때가 아니지.

“히히히히, 딱 기다려라. 태곤옥.”

애들이 쉬는 이틀.

녀석들이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할 때, 나는 그것보다 더 달달한 꿀을 먹어야 한다.

* * *

“갔냐?”

“갔다.”

“좋아. 우리도 움직이자.”

“……솔직히 말하마.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 저도요!”

“아미타불, 빈도도 그리 생각하오.”

줄줄이 이어지는 반대 의견에 규학은 미간을 찡그렸다.

“뭐라는 거야. 다들 동의했잖아. 대장이 휴식 시간에 뭐 하는지 알아보기로.”

이틀에 한 번꼴로 있는 도적 토벌.

말이 이틀에 한 번꼴이지 하루에 두 개 정도 하고 한 이틀씩 쉬는 경우가 더 많다.

요 한 달간 토벌한 도적의 숫자가 스물에 가까울 정도이니까.

엄청난 강행군.

그런데 아무리 상대가 허접하다곤 해도 이동과 전투를 반복하면 사람이 지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설천위도 쉴 때 길게 휴식 시간을 주는 거고.

그런데 이상하게 설천위는 그 쉬는 시간마다 나가서 돌아오질 않는다.

도적들을 관아에 인도하는 것도 따라가지 않고, 그들에게서 뺏은 재물로 넉넉하게 먹고 쉬는 일에도 함께하지 않는다.

궁금하다.

솔직히 말해서, 아주 궁금하다.

“수련을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여자라도 만나는 건지 알아봐야지.”

“그, 유 소저를 두고 바람을 피운다는 게 가능할까요?”

“어허? 바람이라니? 아직 약혼 단계니까 충분히…….”

“그게 바람이라는 거다. 쓰레기야.”

“아미타불, 지금이라도 흑룡학관으로 옮기시는 게 어떻겠소, 규 시주?”

“쓰레기.”

“크흠,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고 딱 봐도 뭔가 찾는 것 같잖아?”

농담 한 번 던졌다가 여웅, 청수, 송아의 싸늘한 눈초리를 마주한 규학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문율이 그나마 부드럽게 어깨를 토닥여 준 덕에 마음이 버텼다.

“수련할 거면 우리랑 같이했겠지. 비기(祕技)를 수련한다고 해도 말이 안 되잖아?”

“음.”

비기를 수련한다고 해도 이틀씩 자리를 비우는 건 아무래도 수상하긴 하다.

남에게 들키지 않고 수련하려고 자리를 뜨는 거야 이해하지만, 그래도 이틀은 너무 기니까.

“분명 무언가 찾는 게 있어. 우리한테 비밀로 하고.”

“음.”

“설 대장은 외부에서 겪은 일이 많은 사람이야. 음지의 조직과도 많이 부딪쳤고.”

많이 부딪쳤다 뿐인가.

화경급 고수의 목까지 쳐 냈다.

물론 이 사실은 학관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여하튼, 규학이 생각하기엔 설천위는 휴식 시간에 진짜 위험한 곳을 혼자 가는 게 분명했다.

아직 약한 잠룡대를 데리곤 갈 수 없는, 진짜 악(惡)이 있는 곳.

그래서 상의 끝에 이렇게 다섯이 모인 거다.

나머지는 조금 실력이 부족하니까.

최근 실력이 크게 늘어난 세 사람.

최소 일류급의 상대가 나와도 싸울 자신이 있는 이들.

이기진 못해도 버틸 수 있는 이들.

규학, 여웅, 청수, 송아, 문율.

이렇게 다섯이다.

“가자. 우리도 한 손 보태야지.”

규학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움직이는 다섯.

그리고.

“……저 머저리들.”

뒤에서 한숨을 내쉰 이가 조심스럽게 그들의 뒤를 따랐다.

* * *

“흠, 이쯤인 것 같은데.”

[또 뭘 찾는 거냐?]

“기연이요.”

[기연이 찾는다고 오는 거면 그게 기연이더냐?]

천마의 혀를 차는 소리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요 한 달간 죽을 쒔으니 뭐 딱히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아니, 어떻게 알고 찾는데도 못 찾느냐고.

기연이 괜히 기연이 아니야.

그나저나.

“……이쯤이 맞는 것 같은데.”

아니, 진짜로.

[어허, 기연이란 것이 찾는다고…….]

순간, 말을 끊은 천마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뒤늦게 따라서 고개를 돌린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찾았다.

[……혈교?]

“원래 보물은 던전 속에 있는 겁니다.”

[던전? 그게 무어냐?]

“그런 게 있어요.”

원래 진짜 좋은 템은 어려운 미션을 깼을 때 얻을 수 있는 법.

단숨에 도약해 나무 위로 올라간 설천위는 나무 사이로 보이는 상대를 바라봤다.

녹색 옷이지만 하얀 소매에 독특한 붉은 자수가 들어가 있다.

참 오랜만에 만난다.

최근에 학관 밖으로 돌아다니질 못해서 못 만났는데…….

“컥!”

단숨에 거리를 좁혀 상대의 목을 움켜쥔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노공의 장례는 잘 치러 줬냐?”

태곤옥은 이 근처에 있는 혈사련의 지부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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