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196화-잠룡대 (2)
“훈련의 기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날카롭게 공기를 찢는,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를 뚫고 울려 퍼지는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뛰어난 음색이었지만, 특유의 딱딱한 느낌은 사방을 가득 채우는 소음조차 뚫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물론, 그 물음에 대답이 없는 건 그 목소리가 놀랍도록 차가워서만은 아니었다.
“훈련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숙달에 있다.”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기에 차가운 음성의 주인인 설란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다면 숙달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가?”
싸늘한 목소리만큼이나 차가운 눈동자가 모두를 훑는다.
“고통과 죽음을 마주할 때, 인간은 숙달한다.”
[허허, 처자가 참 무인의 표본 같은 말을 하는구먼.]
[암, 무인이란 자고로 생과 사를 마주했을 때 성장하는 법이지.]
설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혼들.
설천위의 영역(靈域) 덕에 그 대화를 모두 들을 수 있는 잠룡대의 일원들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혼이지!’
‘훈련하다 뒈지겠다!’
‘대체 숙달의 정의가 언제부터 그런 무식한 개념으로 바뀐 거냐고!’
사방에서 날아드는 암기.
그 암기를 던지는 건 현재 학관에서 가장 암기를 잘 다룬다고 말할 수 있는 당화유다.
회복된 후 설천위를 돕기 위해 직접 자원한 당화유의 덕에 이루어지고 있는 수련.
“응, 잘 피하네.”
태평한 목소리.
너무 태평해서 되레 화가 솟구친다.
아니, 지금 사람을 죽일 것처럼 암기를 던지면서 저 여유는 대체 뭐란 말인가.
‘사람이냐!’
‘당가가 독하다더니!’
“집중해라! 암기는 사파의 기본이다!”
설란의 호통에 잠룡대 대원들은 이를 악물었다.
아니, 말이 집중이지.
세는 것조차 불가능한 숫자의 암기가 쏟아지는 걸 집중만 한다고 피할 수 있을 리가……!
“꺄울!”
“청수!!”
결국 암기를 피하지 못한, 불교를 믿는 도사 청수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그 모습에 다급히 다가서는 송아.
암기를 쳐 내면서도 청수에게 다가가는 모습은 참으로 칭찬할 만했으나…….
“악!”
이동을 하면 당연히 쳐 내야 하는 암기의 숫자가 더 많아진다.
빈틈을 전부 채우지 못해 암기를 허락한 송아.
허벅지에 박힌 얇은 세침에 송아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움직이지 않으면 그리 아프지 않다.
워낙 얇은 침이고 맞은 부위도 급소가 아니라 그냥 근육이니까.
문제는.
“꺄아아아아악!!”
“아, 그거 당첨이네.”
“끄아아아아악!”
그냥 높고 날카로웠던 비명이 어느새 걸걸한 비명으로 바뀐다.
그런 소꿉친구의 비명에 정신을 차린 청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니! 대체 무슨 독이길래……!”
“걱정 마. 목숨에 지장은 없으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당화유는 다시금 손을 움직였다.
“멈추면, 너도 당해.”
“아미타불! 이 미친 종자가!!”
“너, 도사잖아?”
도사 주제에 또 불호를 외는 청수를 보며 당화유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 친구가 소중하면 잘 지켜.”
암기 대처 수련은 당화유가 가져온 암기가 다 떨어질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 * *
“……내가 생각했던 수련은 이게 아닌데.”
연무장 구석.
가부좌를 튼 채 앉은 설천위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지옥도에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나쁘진 않네.”
적랑대 놈들은 십중팔구 암기를 쓸 테니까.
그것에 대비하는 훈련도 나쁘지 않지.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누님 덕에 하나 더 배우네.
당화유도 협력해 준다고 했으니 주기적으로 해야지.
“이런 수련으로 충분한 거냐?”
“뭐가?”
“네 예상으론 상대는 상당히 강할 거라며?”
함께 명상을 하던 설천강의 질문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시간이 아예 없진 않으니 천천히 준비하면 되지.”
눈앞의 암기를 받아 내는 수련.
끔찍한 고통이 따르지만, 동료를 지키기 위해서 망설임 없이 몸을 던지는 녀석들이 있다.
당장 보이는 광경만 해도 그렇다.
청수가 다치니 그를 돕기 위해 송아가 움직이고.
송아가 다치니 그런 송아를 돕기 위해 청수가 움직였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돕기 위해 주위에 있던 이들도 조금씩 자신이 맡아야 하는 범위를 넓혔다.
그 틈을 이용해 자신만 편해지려 움직임이 작아지는 녀석 따윈 한 명도 없었다.
애초에 그런 성격을 지닌 녀석들로만 뽑았으니까.
겉으로는 티격태격해도 동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녀석들.
즉.
‘조직에 최적화된 녀석들이지.’
개인의 희생이 강요되는 조직의 대표적인 곳이 바로 군대다.
애초에 목숨을 걸고 전장으로 향하는 것 자체가 개인의 희생이나 마찬가지인 일이니까.
전장에 설 여력이 없는 이들을 대신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일.
그게 군인이고, 무림맹의 무인은 바로 그런 군인이나 마찬가지다.
괜히 쟤들을 골라 뽑은 게 아니다.
“징병했으니 확실하게 보상은 줘야지.”
“뭐라는 거냐.”
“아니, 그냥 다짐?”
억지로 끌고 와서 홀대하는 것만큼 나쁜 짓이 없지.
음음.
“내일은 유 매한테라도 부탁할까.”
훈련으로 강해지면 그것만큼 좋은 게 없지.
“……저 수련을 유예린에게 시킨다고?”
“응. 왜?”
“너는 마귀냐.”
아니, 생각해 보면 왜 이 녀석 주변엔 손속이 잔인한 여자들만 있는 거지.
누나도 그렇고, 저기 저 당화유도 그렇고.
심지어 약혼자까지.
‘……이 녀석의 성격에도 뭔가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자신이 할 말은 아니지만, 솔직히 그런 거 아니면 주변에 그런 사람만 모일 리가…….
설천강이 나름 합리적인 의심에 빠져 있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설천위는 어느새 암기 대응 수련이 끝난 연무장을 바라봤다.
열다섯 중 서 있는 자는 다섯.
나머지는 전부 독에 당해 아웃된 상태다.
‘규학과 청수는 예상대로고.’
낭인 출신이지만, 규학은 그중에서도 성골에 속한다.
나름 이름 있는 낭인의 제자이니까.
재능도 충분하고.
청수는 무당의 속가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
의외인 건 나머지 셋이다.
솔직히 지금 시점에서 저 둘 이외에 저 수련을 버텨 낼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며칠간 했던 단련이 효과가 있었나?’
하긴, 그렇게까지 빡세게 수련할 일은 없었을 테니까.
‘여웅에 좌백, 문율.’
여웅은 기골이 상당히 좋은 여걸이다.
두 주먹을 주무기로 쓰는데, 암기를 이렇게까지 버텨 낸 걸 보니 생각보다 더 몸을 잘 쓰…….
‘아! 그냥 버티고 있는 거네, 저거.’
구석구석 세침이 박힌 것이 보인다.
그냥 악과 깡으로 버티고 있는 거다.
몇 대 맞은 것 같으니 당첨도 있을 텐데.
정신력 하나는 끝내주네.
그다음으로 좌백은…….
‘음, 괜찮네.’
선법(扇法).
부채를 이용하는 무공으로, 상당히 비주류에 속한다.
물론 쓰는 사람도 많지 않고.
다만, 이렇게 비처럼 쏟아지는 암기에 대처하기엔 상당히 상성이 좋은 무공인지라 어떻게든 버텨 낸 것 같다.
그래도 좌백은 기본적으로 무공에 재능이 그리 뛰어나지 않아 못 버틸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 정도면 훌륭하네.
책사로 쓰기 위해 데려온 친구가 자신을 지킬 힘까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
그리고.
‘얘는 솔직히 정말 의외야.’
문율.
소심한 성격을 증명이라도 하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나름 주인공급이라 이거지.
정파에 다섯, 정사지간에 둘, 사파에 하나.
여태까지 나온 주인공급 인물은 총 둘.
주현운과 백유다.
정사지간에 있는 둘은 무림학관 밖에 있고.
정파 쪽에서도 하나는 밖에 있다.
지금 학관에 있는 주인공급은 총 넷.
그중의 하나가 저 문율이다.
물론.
주인공급이라고 전부 미친 재능을 지니고 있는 건 아니다.
그랬다면 이 잠룡대에 나머지 둘도 불렀겠지.
그 둘은 그냥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커서 올 테니 그냥 기다리면 된다.
다만 문율은 지금부터 접근하기에 상황이 좋아서 이 잠룡대에 불러들였다.
뛰어나다고 하긴 힘들지만, 적당한 수준의 실력을 지녔다.
지금 이제 이류 중 상위 정도 되나?
계급은 경(庚)이었나?
실력으론 그 위 단계인 기(己)를 노려도 될 수준이긴 하지만…….
‘특유의 소심한 성격으로 공적도 제대로 못 쌓았다고 했나.’
이류인 상태로 경에서 기로 승급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실적이 필수다.
옛날에 배천문 그 자식이 공을 괜히 가로챘던 게 아니다.
병사로 들어가느냐, 부사관으로 들어가느냐 정도의 차이를 만들어 낼 정도이니까.
문제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문율은 특유의 소심한 성격 탓에 실적을 제대로 쌓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임에선 그걸 선택지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표현했지.
얘를 수련만 시키면 정작 말해야 할 때 말을 못 해서 공적을 뺏기는 식이다.
그러다가 기연까지 뺏기니 열불이 나지.
수련만이 아니라 성격 개조도 함께 들어가야 하는, 꽤나 육성 난이도가 높은 캐릭터.
그게 바로 문율이다.
그런데, 문율에 관한 설명을 처음 듣는 이들은 고개를 갸웃한다.
문율은 재능 파라미터도 낮은데 그 정도면 꽤 난이도가 높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똥캐인 거 아니냐고.
그런데 놀랍게도 그건 아니다.
육도(六道)라는 게임에서 의외로 똥캐는 없다.
육도(六道: 여섯 개의 길)인데, 왜 주인공 캐릭터가 여덟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이 육도라는 게임은 모든 길을 긍정한다.
편한 길도.
험한 길도.
그 끝엔 반드시 무언가가 있다.
문율의 무공 성장 한계치는 현경(玄境).
……이 아니라 무려 생사경(生死境)이다.
그것도 명문 대파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급 무공 없이도 말이다.
중급 이상의 무공으로 시작해 끊임없이 대성을 반복하면 그 끝에 신(神)이라 불리는 이들과 견줄 수 있을 정도까지 성장할 수 있는 재능.
냇물로 시작해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 물과 같은 재능.
무량대해(無量大海).
그게 문율이 가진 특성의 이름이다.
어떤 의미로 주현운이 가진 천무지체에 비빌 정도의 재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아직은 냇물 단계이긴 하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그 냇물이 이상한 둑에 막혀 강이 되지 못하는 것을 막아 주는 거다.
그 둑이 되는 가장 큰 요소는 특유의 소심한 성격이고.
뭐, 아예 뜯어고칠 필요는 없다.
필요할 때.
해야 할 때, 입을 열 수 있는 용기만 심어 주면 된다.
그리고 사람은 보통 자신감을 가졌을 때 용기를 품을 수 있는 법.
“누나! 교대!”
“음, 알았다.”
설천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단상에서 내려온 설란은 가만히 자신의 동생을 바라봤다.
훈련을 돕기로 한 지 사흘째.
자신이 훈련을 주도하고 혼들의 도움이 필요 없는데도 설천위는 꿋꿋하게 이 공간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신이야 며칠이면 떠날 사람이니 굳이 캐묻지 않고 놔두고 있지만…….
‘아무래도 준비가 끝난 것 같구나.’
동생의 표정을 보아하니 떠나기 전까지 궁금증을 참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작게 웃은 설란이 구석에 자리를 잡고 당화유마저 그런 설란의 옆에 앉아 구경을 시작하는 사이, 단상에 선 설천위는 하나둘 일어서는 대원들을 바라봤다.
짧고 강렬한 고통이 휩쓸고 간 모습.
당화유가 해독을 해 줬다곤 해도 아직 그 여파가 남아 있을 거다.
그러니.
“씻어 내 주마.”
“……뭐?”
가장 쌩쌩한 규학이 설천위의 말에 반응했지만, 설천위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너희가 힘쓰는 동안 나도 마냥 놀고 있었던 건 아니다.”
“흥! 그냥 명상이나 하고 있었던……!”
주제에.
라고.
말을 마저 끝맺지도 못한 규학이 반쯤 입을 벌린 채 하늘을 바라봤다.
꿀렁 꿀렁.
갑자기 허공을 가득 채운, 대량의 물.
……물?
“……허공섭물?”
“아닌 것 같은데요?”
“음, 술법의 일종인가?”
당화유와 함께 그 광경을 바라보는 설란.
그리고.
“너희가 왜 잠룡대인지 아냐?”
얼빠진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는 잠룡대 대원들을 바라보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문율이 있어서?
뭐, 맞다.
내가 용을 다뤄서?
뭐, 그것도 맞지.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사유 때문에 이름을 잠룡대라고 지은 건 아니었다.
“물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이 되라고 잠룡대라 부르는 거다.”
그리고 물과 같은 성질을 품은 대량의 영력이 연무장 위로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