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193화-난 결백해 (5)
[뛰어라! 이놈들아!]
“이 마귀 새끼!”
“으아아아아!! 천벌 받아 죽을 인간!”
[흐하하하! 맞는 말이라 아무런 타격도 없다!]
……천벌 받아 죽을 인간도 맞는 말이야?
이 인간 혹시……?
알차고 즐거운 아침 훈련 시간, 단체전을 위해 모은 학생들을 마구 굴리고 있는 천마를 보며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있다가 대련도 해야 하는데 너무 빡세게 굴리는 게 아닌가 싶은데.
뭐, 알아서 잘 조절하겠지.
천마쯤 되는 사람이 애들 역량을 잘못 읽어서 과하게 훈련시킬 일은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왜 또?”
“전에 말했던 것을 어떻게 좀…….”
“아니, 싫다니까.”
오늘도 어김없이 점심시간 전에 찾아온 제갈소의 모습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무슨 사흘 내내 찾아와.
순순히 알겠다고 하길래 포기한 줄 알았더니만.
“그게, 아무래도 이번 흑룡학관은 심상치가 않은 것 같다고…….”
“뭐, 그렇겠죠.”
내가 뿌려 놓은 씨앗이 싹을 틔우다 못해 꽃을 피운 것 같더구먼.
솔직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 하기 싫은 건 하기 싫은 거다.
설천강, 그 인간은 전형적인 소인배니까.
동생한테 처맞고 방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고 있을 정도이니 찾아가면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애초에.
“원래 졸업해서 못 나갈 인간이었잖아요. 그냥 없는 셈 치시죠?”
“그래서 다행인 거죠! 방에 처박혀서 졸업을 못 한 덕에 내년에도 남으니까!”
아니, 그 인간은 왜 수업까지 안 나가는 거야.
나 같으면 쪽팔려서 하루라도 빨리 졸업하려고 서두르겠구먼.
“에이 씨! 나도 몰라! 자꾸 이렇게 재촉하면, 나도 아주 들이받는 수가 있어요?”
“그걸 어떻게 좀! 설천강 소협한테!”
“아니, 이렇게 자주 찾아와 부탁한다고 허락할 거였으면 진즉에 했겠죠!”
“삼고초려라는 것도 있으니 어떻게 좀!”
“누가 제갈세가 아니랄까 봐 삼고초려면 다 되는 줄 아나!”
그리고 너흰 원랜 하는 입장이 아니라 받는 입장이잖아!
“그걸 어떻게 좀!”
“에이 씨! 몰라요! 모른다고!”
이 인간, 왜 이렇게 끈질겨!
나, 그 인간 얼굴도 보기 싫다고!
“내가 먼저 찾아가면 사과부터 시작해서 그 인간 기분을 풀어 줘야 할 텐데, 내가 그걸 왜 해?”
내가 아무리 어른이라도 그건 싫다.
그 인간이 먼저 정신 차리고 오는 거 아니면 내가 왜?
친선전, 설천강이 있으면 1승 정도는 챙길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나야 내 할 일만 하고 보상만 잘 받으면…….
‘어?’
……성적에 따라 보상이 달라지나?
가능성 있는데?
그리고 여태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내가 끼친 영향에 따라 보상이 달라질 가능성이…….
‘개높네?’
최소 9할 이상.
잘하면, 보상도 잘 줄 거다.
아마도.
쓸데없는 자존심 따위보단 훨씬 더 가치 있는 보상의 가능성을 찾은 설천위의 표정이 변했다.
이거, 할 만할지도?
“……후, 진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네요.”
아니, 왜 포기해?
조금만 더 말하면 갈지도 모르는데.
설천위의 마음도 모르고 낙담한 듯 어깨를 늘어트린 제갈소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오늘 오신다는 설화(雪花) 대협께라도 부탁해 보는 수밖에…….”
“……잠깐, 스톱.”
단숨에 어깨를 붙잡는 손길.
낯선 남자의 손길에 놀랄 법도 했지만, 제갈소는 그것보단 설천위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더 궁금했다.
“예? 스톱이요?”
“멈춰 보라고. 저기 서역에서 쓰는 말이래.”
살짝,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작게 헛기침을 한 설천위는 제갈소의 어깨에 올린 손을 떼며 물었다.
“크흠, 그나저나 누가 온다고?”
“설화 대협이요.”
“……설화(雪花)라고 함은, 무림맹의?”
“네. 초생단(草生團) 부단주, 설란 대협…….”
“하지.”
“네?”
“가겠다고요. 당신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겁니다. 부회장.”
“예?”
갑자기?
뜬금없는 설천위의 태도 변화에 제갈소는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요?”
설 대협이 오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지?
항상 차가운 태도이긴 하지만 챙겨 줄 부분은 확실하게 챙겨 주는, 상당히 의지가 되는 분이라고 알고 있는데?
무림맹 내부에서도 평가가 상당히 좋은 편이고.
자신이 알고 있는 설란에 관한 정보를 떠올린 제갈소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설천위는 헛기침과 함께 몸을 돌렸다.
“형이 그렇게 처박혀 있는데 동생이 된 도리로 못 본 척할 수 없지!”
‘……그럼 여태까지 거절했던 건? 동생 된 도리를 다하기 싫었던 건가?’
“반대쪽 죽빵을 갈기는 한이 있더라도 끌고 나오겠어!”
‘……동생 된 도리는?’
아니, 형의 안면에 주먹을 박아서라도 끌고 나오겠다는 다짐의 대체 어디에 동생 된 도리가 있는가.
이해할 수 없는 설천위의 다짐에 고개를 저은 제갈소는 싱긋 웃었다.
“그럼 가죠!”
동생 된 도리고 뭐고 내가 알 게 뭔가.
설천강만 친선전에 나가 준다면 만사형통이다.
* * *
“어이, 형님! 뭐 해!”
병급(丙級) 기숙사.
작은 별채로 이루어진 이곳은 한 학생당 한 채의 건물을 쓴다.
그야말로 확실한 지원의 차이라고 할까.
참고로 설천위는 유예린이 살던 기숙사에 살게 됐다.
애초에 1인 1집이다 보니 여자, 남자 구분이 없어서 그리 살게 됐다.
그 사실을 알려 주며 웃던 팽후의 미소는 참으로 꼴 보기 싫었지만.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머릿속에 떠오르던 잡생각을 털어 내며 설천위는 다시금 문을 두드렸다.
“형님, 나와 보라고!”
“……설 소협이 와도 대답이 없네요.”
낙담한 듯 어깨를 늘어트리는 제갈소.
그 모습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상관이랴.
지금 설란이 오고 있다는데.
설란.
설천위와 같은 어머니를 둔 친누나.
설천운이나 설천강과 달리 어머니도 같은 형제다.
그리고.
‘위험해.’
설천위가 무의 재능이 없는 건, 설란이 그 재능을 전부 먼저 받아 갔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뛰어난 무재(武才).
거의 유예린에 맞먹는 수준의 재능이다.
그러니 이십 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벌써 부단주를 하고 있지.
‘……못 이겨.’
그러니 못 이긴다.
절대로.
이쪽이 가진 수를 전부 끌어내면 어떻게 가능할지 몰라도, 친누나를 상대로 살수(殺手)를 쓸 순 없지 않은가.
이 안에 있는 형과는 달리 진짜 누나다운 누나다.
동생 된 도리를 지키지 않으면 짐승이지.
그러니…….
“야! 설란 누나가 온다고!! 나와 봐!!”
어서 해결해야 한다.
여기에 처박힌 설천강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나이 차가 많이 나고, 어머니를 여읜 뒤 그야말로 어머니처럼 설천위를 보살핀 설란.
그녀는 설천강도 똑같이 동생으로 아낀다.
설천강이 워낙 속이 좁고 뛰어난 형, 누나를 둬서 자존감이 낮아 삐뚤어진 거지 설천운도 그렇고 설란도 배다른 형제라는 점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냥 똑같은 형제.
그런데, 동생 둘이 치고받고 싸워서 형이란 놈이 처맞고 방에 처박혀 있다?
“들키면 너랑 나랑 다 죽는다고!”
기본적으로 동생들에게 참 좋은 누나지만, 엄할 땐 한없이 엄한 사람이 설란이다.
그 끝에 대체 무슨 벌이 있을지…….
아니, 그나저나 이 인간은 왜 아직도 대답이 없어?
“야, 이씨! 안 나와?! 학관에서 네가 나 괴롭힌 거 다 일러바친……!”
“뭐라는 거냐!”
다급하게 문을 열고 외치는 설천강.
그 모습을 확인한 설천위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어쭈?’
땀으로 젖은 옷.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
지방이 빠져 선명하게 드러나는 근육과 턱선.
명백한 단련의 흔적이다.
“흐응? 아주 놀진 않았나 보네?”
“……너, 형한테 무슨 말버릇이냐.”
“내가 전에 말했지? 형이라고 불리고 싶으면 정신연령부터 키우고 오라고.”
[아까 부를 땐 형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크흠, 그건 급해서 조금 부드러운 회유책을 쓴 것뿐이죠.
천마의 한마디에 속으로 헛기침한 설천위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설천강을 봤다.
“합의하자.”
“합의? 무슨 합의?”
“너나 나나 학관에서 이렇게 싸운 거 들키면 둘 다 죽는 거야.”
“흥, 내가 무슨…….”
“뒤에서 내 욕을 하고 다녔다며. 그거 조사 들어가면 형, 누나가 모를 거라고 생각해? 잘못하면 아버지도 화낸다고.”
“……그게 무슨 소리냐!”
“에이 씨! 알 거 다 아는데!”
어색하게 부정하는 설천강을 향해 한마디를 쏘아붙인 설천위는 말을 이어 나갔다.
“어차피 너 이러고 있는 거 다 알 텐데 그 원인을 나한테 있다고 하지 말고 그냥 좀 부족함을 느껴서 그랬다 뭐 그런 식으로 하자고. 그럼 나도 나 괴롭힌 거 조용히 묻어 줄게.”
“흥! 일 없다!”
“아니, 아직도 현실을 몰라? 그러니까 나한테도 따라잡혀서 처맞는 거 아니야!”
이대로 가면 형, 누나한테도 처맞게 생겼는데!
이 인간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너한테 맞은 건……! 아버지가 지원이라도 해 준 것 아니냐!”
“아니, 또 그게 무슨 찌질한 소리야! 아니란 거 다 알고 있으면서!”
“흥! 네 녀석 따위가 그리 빨리 강해지려면 그런 방법밖에……!”
아니! 아오!
말이 안 통하네.
오늘 당장 누나가 온다고 했으니 한시가 급한데……!
일 때문에 찾아온 거면 안 올 수도 있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친선전에도 끌고 나가야 하니 일단은…….
“좋아, 승부하자!”
“……뭐라는 거냐.”
“거, 딱 보니까 나름 열심히 단련한 것 같은데. 딱 승부 봐서 이긴 사람 말을 따르자.”
“그거, 듣던 중 아주 마음에 드는 제안이로구나.”
“에?”
순간 비무를 향해 흘러가기 시작한 분위기에 당황한 제갈소는 한 걸음 물러섰다.
‘……기파가!’
서로 싸우기로 의견이 합치된 순간, 두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기세가 변했기 때문이다.
한쪽에선 살을 파고드는 한기가.
다른 한쪽에선 두 눈을 땅으로 깔게 만드는 거대한 무언가가.
눈앞에서 급 낮은 형제 싸움이나 하던 인간들이 병(丙)이라는, 이 학관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강자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진 놈은 말없이 따르는 거다!”
“흥! 네 녀석이나 말 바꾸지 마라!”
이윽고, 강렬한 기파가 기숙사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 * *
“허허, 오랜만에 보는구먼.”
“오랜만입니다. 학관장님.”
“깍듯한 건 여전하군.”
“성격입니다.”
“당돌한 것도 여전하고.”
허허롭게 웃은 팽후는 서한을 가져온 설란을 바라봤다.
이 학관의 졸업생 중에서도 참으로 뛰어난 이들 중 하나.
학생 때부터 그 냉정한 성격으로 유명했지.
예의도 깍듯했고.
보통 예의가 깍듯한 사람과 달리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점이 달랐지만.
마치 얼음처럼 차갑지만 그 속이 훤히 보이는 성격이다.
물론.
“그 인형은 아직도 가지고 다니나?”
“네.”
어린 시절에 동생이 만들어 준 인형을 가지고 다니는 감성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다.
그 동생은 전혀 기억 못 하겠지만.
“서한의 내용에 대해 답신할 내용이 있습니까?”
“음, 딱히 없네. 지금 당장 답을 알려 줄 내용은 아니군.”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그럼, 돌아가기 전에 학관을 좀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일세. 졸업생이 구경하겠다는데 말릴 이유가 없지. 그나저나 동생들의 얼굴이라도 보려는 건가?”
“예, 단주님이 꼭 보고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설란을 바라보며 팽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가 안내해 주지. 음, 일단…….”
잠시 말을 멈추고 숨어 있는 이에게 전음을 들은 팽후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일이 재미있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구먼. 바로 가세.”
“……재미있게요?”
“가 보면 알 걸세.”
의문을 표하는 설란을 이끌고 팽후는 그대로 병급 기숙사로 향했다.
설천위가 제갈소의 설득에 못 이겨 방에 처박힌 설천강을 꺼내기 위해 갔다는 소식.
두 사람은 지금 기숙사에서 만났다고 하니, 설란의 입장에선 동생 둘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리고…….
‘그 두 녀석이니 꽤나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겠군.’
솔직히 기대된다.
작게 웃으며 설란을 이끌고 병급 기숙사에 도착한 팽후.
그리고.
쾅! 쾅!
멀리서부터 느껴지던 진동이 한층 더 뚜렷해지며 기대감을 더욱 키운다.
그렇게 도달한 순간.
“뒈져라! 형 새끼야!!”
“커허러걱?!”
턱이 돌아갈 것 같은 묵직한 주먹과 함께 허공에서 몸이 회전하는 설천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덤으로 개판이 된 주변까지.
“음, 자네 동생들이 참 활기 넘치는구먼?”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 설란을 바라보는 팽후.
그의 짐작대로, 설란의 얼굴은 그야말로 북풍한설처럼 차갑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딱히 존재감을 숨긴 적이 없기에 싸움이 끝난 순간 기척을 느낀 설천위의 고개가 천천히 이쪽을 향한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
그리고.
“나, 난 결백해! 형이 먼저 잘못한 거야!!”
기절한 형을 배신한 동생이 먼저 고자질을 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