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191화-난 결백해 (3)
“마흔.”
담담하기 그지없는 숫자 세기.
보통이라면 그냥 코웃음 한 번 치고 넘길 모습이지만…….
‘이게 설가의 잠룡(潛龍)!’
그 앞에 선 이들은 도저히 웃을 상황이 아니었다.
주변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기세와 내가 대체 뭘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 용의 형상.
진법인가?
아니면 환술?
대체 뭐에 당한 거지?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가득 떠올랐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적이었다면 죽었다.’
이리도 허무하게 손발이 묶였으니, 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설령 눈에 보이는 저 용이 환각일지라도 죽음을 피할 순 없었으리라.
이를 악문 규학은 땅으로 떨어지려는 눈을 위로 끌어올렸다.
아니, 고개를 위로 당겼다.
목 근육이 쥐가 날 것처럼 뻐근해졌지만, 억지로 들어 올렸다.
아주 조금.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움직임일지도 모르지만.
“마흔다섯.”
저 면상을 그냥 넘기고 싶지가 않았다.
까득.
‘빌어…….’
“……먹을!”
겨우 입이 열렸다.
동시에.
쿵.
극한까지 내공을 끌어올린 몇몇이 걸음을 내디뎠다.
영력과 패기가 이미 탈인간 수준인 상급(上級)에 도달한 설천위의 기세를 극복해 낸 것이다.
그렇게 하기까지 무려 50초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지만.
끝내 움직여 냈다.
‘……재능이 있군요.’
그 모습에 감탄한 것은 구석에서 조용히 숨어 상황을 지켜보던 유예린이었다.
혹시라도, 설천위가 힘 조절을 잘못해 사람이 다칠 것 같으면 나서기 위해 숨어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이런 사람들만 골라냈는지 궁금하네요.’
한 명, 상태가 매우 안 좋아 보이는 사람이 있지만 기절까진 하지 않고 잘 버티고 있다.
그 외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하게 버텨 내고 있었고.
상당히 힘들어 보이긴 하지만, 버틸 수 있다는 게 어딘가.
‘솔직히, 힘들죠.’
자신조차도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는데.
기세라는 것이 만능은 아니지만 처음 접하는 순간에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진다.
아니, 벽이라는 말보단 절벽이란 표현이 더 잘 어울리리라.
오르고 오르다 보면 힘들긴 해도 어떻게든 오를 수 있지만, 처음에는 도저히 오를 엄두조차 나지 않는 절벽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최소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 절벽에 오르는 시도를 할 용기 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소리다.
그 용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실전에서 드러나고.
적의 기세에 겁먹지 않고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곧 생존 여부와 직결되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 의지는 합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쉰.”
그리고 설천위의 숫자 세기가 끝났다.
“모두 불만은 없는 것 같네?”
“……이런 빌어먹을!”
거칠게 땅을 발로 차는 규학.
그와 마찬가지로 분노를 표출하는 이들.
그리고.
‘흥미롭네요.’
침착하게 상황을 지켜보는 이.
상관없다는 듯 관심 자체가 없는 이.
흥미롭다는 듯 웃는 이까지.
각양각색의 반응에 유예린은 작게 웃었다.
이 정도면, 꽤나 재미있는 일이 될 것 같다.
물론 자신은 단체전에 나가지 않겠지만…….
‘결과가 기대되네요.’
꽤나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것 같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 * *
“지금부터 우리는 단체전 훈련에 집중할 거다.”
각양각색의 표정을 짓는 이들을 보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올렸다.
뭐, 당연한 반응이다.
“뭐, 그렇게 싫어하지 마. 나름대로 보상도 빵빵할 테니까.”
“보상이라고 해 봤자 영약 같지도 않은 영약이나 던져주고 끝 아닌가?”
빈정거리는 말투.
삐딱하게 서서 대꾸하는 상대를 확인한 설천위는 작게 웃었다.
규학.
이번에 모은 열다섯 중에서도 꽤나 상위에 속하는 재능을 가진 탕아(蕩兒).
그 재능은 참으로 훌륭하나, 안타깝게도 철백 정도의 압도적인 재능은 아니다.
거기에다, 철백은 재능을 넘어 정신 자체가 격이 다른 무인.
너무도 깊숙이 박혀 있는 씨앗인지라, 얼핏 무재(無才)나 다름없는 재능을 가지고도 절대 꺾이지 않는 인간이니.
규학 또한 나름 근성은 있지만, 아쉽게도 철백 정도는 아니다.
그 한계치도 철백처럼 높진 않고.
하지만.
“영약 따위라니, 너 영약 몇 개나 먹어 봤어?”
친선전의 단체전에 나갈 인원으론 충분한 재능이다.
뒷짐을 진 설천위는 웃으며 규학을 바라봤다.
“영약다운 영약? 너 영약이 밥으로 보이냐?”
영약.
그것에 왜 무인이 집착하는가.
“영약은 곧 시간이다. 오 년의 내공을 쌓을 수만 있어도 실질적으로 1년 이상의 연공 효과를 가지지.”
미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주위에 널려서 그렇지, 이 학관에 다니는 학생의 평균 내공은 십 년에서 이십 년 정도다.
어릴 때부터 무공을 익힌 이들이 대다수인데도.
“그 1년을 줄인 것으로 네 목숨이 오가는 것이 무림인데, 그게 가볍나?”
혀를 차며 고개를 저은 설천위가 천천히 규학을 향해 걸어갔다.
가장 앞 열에 서 있던 규학의 앞에 선 설천위는 담담하게 그를 바라봤다.
“물론 보상은 영약이다. 학관장이 약속한, 팽가에서 만든 영약이지. 네 녀석이 그리 질투하는 명문세가의 자식들이 먹는 영약 말이다.”
“누가 질투를……!”
“하고 있지. 탕아라는 이름을 얻은 놈들은 대체로 다 질투를 하면서 산다.”
규학의 말을 끊고 그 어깨에 손을 올리는 설천위.
반사적으로 그 손을 쳐 내려던 규학은 이내 이를 악물었다.
‘또!’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혈을 짚은 건 아니었다.
감각도 있고, 근육도 반응한다.
한데, 움직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기세도 잔잔한데 대체 왜……!’
당최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아 반문조차 못 하고 입술을 깨무는 사이, 그의 어깨를 몇 번 두들긴 설천위가 빙긋 웃는다.
“그런 질투 따위 싹 없애 주마.”
“네 녀석이? 그런 말도 안…….”
“내가 언제, 내가 없애 준다고 했지?”
“하?”
설천위의 대답에 규학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내가 혼을 다룬다는 것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겠지?”
우웅.
공기가 떨리는 느낌과 함께, 무언가가 변한다.
그 변화를 느낀 것은 소수.
몇몇은 그냥 왜 설천위가 웃는지 고민할 뿐이다.
그리고.
[커흠, 내가 말년 아니, 사후에 이리 일복이 많을 줄이야.]
헛기침과 함께 울려 퍼지는 노인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로 향했다.
“귀, 귀신!”
“귀신이다!”
“나, 나무아미타불!”
“너 도사잖아!”
“아! 무, 무량수불!”
허공에 모습을 드러낸 천마의 모습에 혼란에 빠진 학생들.
그 속에서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이며 안색이 조금 창백해진 규학을 바라봤다.
“어때? 날 이 위치까지 끌어올려 주신 스승님이시지. 과거는 묻지 마. 나름 사연이 복잡하신 분이니까.”
[흠흠, 내가 복잡한 삶을 살긴 했느니라.]
험험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천마가 쓱 내려왔다.
설천위의 영력이 상급에 오르고, 본격적인 술법 훈련을 배우며 익히게 된 영역.
그 재능만큼이나 넓고 선명한 영역을 전개할 수 있게 된 설천위 덕에, 천마는 자신을 바라보는 학생들을 둘러봤다.
[참 잘도 모았구나.]
자신도 조금씩 눈여겨봤던 이들.
그 재능이 설천위의 친구들 정도까진 아니지만, 충분히 훌륭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다.
참으로.
[참으로 마음에 드는구나.]
이런 것을 원했다.
가르칠 맛이 나는 아이들.
설천위는 말귀를 너무 몰라 처먹고.
그 주변은 말귀를 너무 잘 알아먹는다.
가르칠 게 없다고 해야 하나.
묘하게 싱거웠었는데…….
[그럼, 달리기부터 시작하자꾸나.]
촥!
“……에?”
[에, 는 무슨 에, 냐. 듣지 못했느냐? 뛰거라!]
천마의 외침과 함께 채찍이 움직인다.
그리고.
쫙!!
“끄악?!”
강렬하게 규학의 안면을 강타하는 채찍.
안면을 채찍으로 맞은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규학을 설천위가 친절히 잡아 일으킨다.
“에헤이, 엄살은. 그냥 아프기만 한 거니까 뛰기나 해라.”
“이게 무슨 아프기만……. 피가?”
“안 나지? 멀쩡하지? 그러니까 뛰어라.”
얼굴을 만졌던 손에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자 멍해진 규학의 엉덩이를 발로 차며 설천위는 서서히 분위기 파악을 끝내 가는 열다섯의 학생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흡!”
“야! 같이 가!”
눈치 빠르게 뛰어가는 녀석이 둘.
참, 좋은 시작이다.
“아미타불……!”
“넌 도산데 왜 자꾸……!”
불호가 입에 붙은 말코 도사의 뒤로 여학생이 달린다.
그 뒤로 하나둘 따라붙기 시작하는 나머지 학생들.
쫙!
[어허! 어서 뛰지 못할꼬!]
물론 채찍을 맞고서야 움직이는 녀석도 있지만.
그렇게 훈련을 시작한 학생들을 뒤로한 설천위는 연습장 한쪽에 마련해 놓은 단상 위로 올라갔다.
이 녀석들을 데려가면 단체전에서 처참하게 지는 일은 없을 거다.
적랑대가 강하긴 해도 아직 학생 수준이다.
심지어, 그쪽은 재능을 보고 뽑은 게 아니라 성무경을 중심으로 모인 학생들일 뿐이다.
단순 싸움이라면 오히려 이쪽이 할 만하다.
문제는…….
‘변수가 너무 많다는 거지만.’
황실 주최의 단체전.
황실 놈들이 워낙 오락가락하는 놈들이라 그저 마음 놓고 있을 수가 없다.
거기엔 정신병자가 워낙 많아서…….
‘그나마 형왕이 온다는 게 다행이네.’
그 인간은 일단 믿을 만한 인간이니까.
최소한 불합리한 판정 때문에 억울할 일은 없을 거다.
[뛰어라! 이놈들아!]
“이, 이 미친 귀신이!”
천마의 호통과 끝까지 발악하는 규학.
어디선가 본 듯한 풍경이지만, 설천위는 이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구경하는 맛은 있는 풍경이지만, 지금은 이쪽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천천히 호흡이 고르게 안정되고.
깊숙이 들어간다.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이들이 있는 곳으로.
“왔군.”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풍경은 황량한 대지였다.
한껏 마른, 척박한 대지.
그곳에 홀로 서 있는 바위.
그 위에 앉아 있는, 걸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내.
“오랜만이다.”
“점점 괴물이 되어 가는구나. 애송이.”
천천히 눈을 뜨는 철귀를 보며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지.”
“당당하군.”
“성장하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니까.”
담담하게 웃으며 설천위는 철귀를 바라봤다.
초췌해진 몰골.
“짓눌리고 있구나.”
“네 녀석이 너무 괴물 같아져서 그런 것이다.”
철귀의 대답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이곤 주위를 둘러봤다.
과연, 이 척박한 대지의 끝이 보인다.
검게 물든, 무(無)의 공간.
이젠 이만한 땅을 유지하는 게 최선이라는 것이겠지.
“그럼 슬슬 포기하고 가자.”
“흥. 네 녀석이 아무리 영적으로 성장했다고 한들, 무(武)로는 아직 멀었다.”
코웃음과 함께 일어서는 철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지만, 그 몸은 이미 전투를 대비하고 있었다.
속으로는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설천위의 도(刀)는 마냥 가볍게 볼 수 없음을.
그 반응에 입꼬리를 올리며 설천위는 도를 꺼냈다.
검도, 주먹도 좋지만, 최근에는 도를 애용하고 있으니 철귀를 도(刀)로 꺾어 볼 생각이다.
뭐, 가장 상성이 좋은 무기라는 점도 있지만.
“나도 바쁘니까 빨리빨리 하자.”
“흥!”
코웃음을 치는 철귀.
그리고.
순식간에 그 앞에 도달한 설천위의 도.
끼기기기긱.
철귀의 목까지 도달한 도(刀)가 보이지 않는 실에 막혀 서서히 속도를 잃는다.
“아직도 베어 내지 못하는구나.”
“글쎄.”
자신만만하게 실을 조작하는 철귀를 보며 설천위는 도를 거뒀다.
그리고 몸을 비튼다.
“일단, 확실한 것은 피하는 건 잘해.”
“……놈.”
단숨에 팔을 잘라 내기 위해 휘감겨 오던 실을 가볍게 피해 낸 설천위는 발을 내디뎠다.
앞으로.
물러서지 않는다.
철귀를 상대할 땐 물러서는 순간 패배한다는 것을 이미 수백 번의 패배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죽음에 가까운 끔찍한 고통과 함께 몸에 깊이 아로새겨진 경험.
그것이 설천위의 몸을 이끈다.
무재(無才)라.
아무런 재능이 없어도.
인간은 끝내 도달할 수 있다.
‘……괴물 놈.’
천천히, 자신을 압박해 오는 도(刀)를 보며 철귀는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손에 닿는 실을 통해 느낀다.
한 가닥씩 실이 베이고 있음을.
그리고 그렇게 실이 하나씩 베일 때마다 설천위의 도가 조금씩 더 날카로워지고 있음을.
그렇기에 궁금해졌다.
일류, 절정의 실력으로도 자신보다 한 단계에서 두 단계 위의 적에게 도를 겨누고 살아남은 이 녀석이 그곳에 도달한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도 닿지 못했던 화경에.
이 무림의 역사에서도 한 줌 정도의 괴물만이 도달했던 현경에.
만약 그 끝에 도달한다면.
끼릭.
목 끝에서 겨우 멈춘 도(刀)를 튕겨 낸다.
생각이 이어진다.
‘……생사경, 조화경 등등 칭하는 단어조차 확실하지 않은 경지.’
그 끝에 도달한다면.
서걱.
무언가가 베이는 감각과 함께, 손발이 삐걱댄다.
실이 베인 것이 아니다.
여태까지처럼 몇 가닥의 실이 잘린 것이 아니다.
튕겨 냈던 도(刀)가 어느새 자신의 목에 닿아 있었다.
‘신화의 영역이라 칭하는 그 너머에 도달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