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189화-난 결백해 (1)
“……학생회의 임원들이 보내는 시선이 묘해졌소이다.”
기숙사 방.
밤에 다과를 가지고 찾아온 혜송을 마주한 설천위는 음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혜송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렇겠지요? 술 마시고 싸움질에다 그대로 도박장까지 가서 왈패들이랑도 거하게 한판 붙었으니까.”
“대체, 대체 사문에 뭐라 보고해야 할지……!”
“거기에다 그걸 한 세 번 정도 했었지?”
“아미타불!”
어허, 이미 부처를 찾기엔 너무 늦은 것 아닌가?
그나저나.
“……진짜 발작이 줄어들었다는 게 더 신기하네.”
[어허, 내가 그럼 의미도 없이 그런 일을 하도록 시켰겠느냐?]
악행(?)을 거듭할수록 혜송의 자괴감은 더욱 커졌지만, 발작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밖을 향한 화가 내면을 향해서 그런가.
아니, 무슨 이런 돌팔이 같은 처방이 효과를 보이는 거지.
“……아미타불. 솔직히 말해 치밀던 화가 줄긴 했습니다.”
“어떤 느낌으로요? 역시 역지사지인가? 상대방이 왜 그러는지 아니까 조금 용서가 되는 그런 느낌?”
“역지사지라기보다는 내 주제에 무슨, 이라는 느낌으로…….”
아!
……어째 화는 줄었는데, 성격은 더 음울해진 것 같은데?
[임시방편이라 그렇다. 최종적으론 원래의 도덕관을 되찾고, 심마를 극복해 내야 한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하냐고요?
면벽 수련을 밥 먹듯이 하는 양반인데도 자기 자신을 못 다스리는데.
자괴감에 빠진다고 그게 다스려지나?
설천위의 표정을 읽은 신의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어리석긴, 마음에 병이 있는 사람은 혼자 극복해 낼 수 없다. 뭐, 겪어 보지 못한 녀석들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할배는 겪어 봤어요?”
[아니? 내가 왜?]
아니, 이 인간이?
[꼭 고뿔에 걸려야만 그 치료법을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겪어 보지 않고도 병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의원이라는 위인들이지.]
아니 뭐, 그렇긴 한데…….
[저 중에게 전하거라.]
설천위가 입술을 살짝 내밀며 중얼거리는 사이, 진지한 자세로 돌아온 신의가 혜송을 바라봤다.
아직도 음울한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혜송.
그를 향한 신의의 말이 설천위의 입을 빌려 전해진다.
[내면의 그림자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떨어지지 않으니 완전한 이별도 할 수 없다.]
“내면의 그림자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떨어지지 않으니 완전한 이별도 할 수 없다.”
설천위의 분위기가 바뀐 것을 느낀 혜송은 불호를 외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설천위의 두 눈과 마주했다.
“계속하시지요.”
그것이 신의의 말이라는 것을 깨달은 혜송이 반장을 하며 고개를 숙인다.
[명심해야 할 것은 아무리 크고 어둡다고 한들 결국 그림자라는 것이다. 그림자란 빛이 있어야만 생기는 것이고, 그것을 비추는 무언가가 있어야 생기는 것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아무리 크고 어둡다고 한들 결국 그림자라는 것이다. 그림자란 빛이 있어야만 생기는 것이고, 그것을 비추는 무언가가 있어야 생기는 것이다.”
“예. 그리 생각해 완전한 부동심(不動心)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이 소림의 가르침.
흔들리지 않으면, 그림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림자가 날뛰는 일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면벽 수련을 해 온 것이나…….
[네가 부처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 답이 될 수 있겠으나, 네겐 멀고도 먼 일이다.]
“네가 부처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 답이 될 수 있겠으나, 네겐 멀고도 먼 일이다.”
그게 하고자 한다고 가능한 일이었다면, 누구나 부처고 덕이 높은 스님이 될 수 있었으리라.
[흔들리지 않는 인간은 없다. 또한, 그림자에 잡아먹히는 인간도 없다.]
“흔들리지 않는 인간은 없다. 또한, 그림자에 잡아먹히는 인간도 없다.”
결국 그림자.
그림자는 본체를 잡아먹지 못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흔들림을 두려워하지 마라. 인간은 누구나 흔들리고 또다시 제자리를 찾아 가는 존재다.]
“네 흔들림을 두려워하지 마라. 인간은 누구나 흔들리고 또다시 제자리를 찾아 가는 존재다.”
그림자가 아무리 흔들려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 흔들림에 겁먹는 것은 인간이 그저 크고 어두운 것을 두려워해서일 뿐이다.
[결국 네 마음이고 네 의지다. 흔들려도 돌아오고, 형체가 달라 보여도 그 뿌리는 같다.]
“결국 네 마음이고 네 의지다. 흔들려도 돌아오고, 형체가 달라 보여도 그 뿌리는 같다.”
“……아미타불.”
불호와 함께 고개를 숙이는 혜송.
반짝이는 그 머리를 보며 신의는 말을 끝맺었다.
[그것이 네 그림자임을 명심하거라.]
“그것이 네 그림자임을 명심하거라.”
“아미타불. 예, 명심하겠습니다. 시주.”
무언가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깊은 눈동자로 대답한 혜송은 합장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명상을 하러 가야겠습니다.”
“……옙, 가세요.”
“감사합니다. 설 시주. 이 은혜는 꼭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방을 빠져나가는 혜송.
그 뒷모습을 보며 설천위는 신의를 바라봤다.
“……방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뭐 흔들려도 받아들여라, 뭐 그런 소린가?”
[네 녀석은 굳이 이해할 필요가 없는 소리다.]
[허허, 허나 저 아이가 이해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구려.]
[나는 무학 같은 건 잘 모르니 그 결과가 어찌 될지 모르오.]
천마의 말에 고개를 저은 신의는 담담한 표정으로 혜송이 나간 문을 바라봤다.
[다만, 내 말을 저 아이가 행하게 될 수 있을 때 저 아이는 더 이상 심마에 고통 받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소.]
[허허, 역시…….]
신의와 그 신의를 바라보며 감탄하는 천마.
그리고.
‘……우울증 약이 없으니 주둥이 치료술밖에 없구나. 이것도 상담 치료로 쳐줄진 모르겠지만.’
대체 방금의 무엇이 치료였는지 알지 못하는 설천위는 고개를 갸웃했다.
[으음…….]
뭐, 암영의적도 모르는 것 같아 보여 살짝 안심했다.
“그나저나, 당 소저의 상태는 어때요?”
[아까 가서 보고 왔는데 멀쩡했다. 여전히 술법적인 부분은 끝내주는구나.]
첫날 패융을 이용해 크게 한 번 쓸어 내고 틈틈이 자잘하게 남은 영향까지 전부 긁어냈으니까.
당화유, 그 인간도 워낙 정신이 강철 같아서 애먹지 않고 해결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덕분에.
“대충 감도 잡았고.”
당화유에게 빨아들인 기운.
상당한 양이 흩어졌지만, 그 기의 감각을 기억하는 데는 성공했다.
쥐꼬리만큼이지만, 흡수하는 것도 성공했고.
“다음에 보면 골통을 부숴 주마.”
언여휘.
* * *
“……괴물 놈.”
목과 팔을 타고 올라오는 통증에 이를 악물며 언여휘는 당과를 씹었다.
원래라면 핥아먹는 것부터 시작했겠지만, 이 통증이 지속된 이후론 그 시간을 참을 수가 없었다.
깨물어서 빨리빨리 당을 보충하지 않으면 짜증이 솟구쳐서 일이 손에 안 잡힐 정도.
까득 까득.
당과를 다 씹은 빈자리에서 치아가 맞부딪히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언여휘는 아랑곳하지 않고 턱을 움직였다.
무림학관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술법은 완전히 사라졌다.
후에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예의 주시하고 있던 것인데…….
‘설천위 그놈이겠지.’
기운이 소멸하기 직전에 느껴졌던 섬뜩한 기운.
발작처럼 희미했던 연결마저 끊어 버렸다.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대모(大母), 가져왔습니다.”
분노를 삼키며 겨우 마음을 다스리던 언여휘는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자신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온 이가 거대한 포대 자루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또 대답도 안 듣고 들어오는구나.”
“딱히 기다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쯧, 공경이 부족하구나.”
“에이, 이 정도면 충분히 하고 있지요.”
싸가지 없는 것.
사내의 능청스러운 태도에 속으로 혀를 찬 언여휘는 속내를 숨기며 사내가 가져온 포대의 안을 확인했다.
“음, 나쁘지 않군.”
“그런데 사람 사체는 뭐 그리 많이 요구하는 겁니까?”
“강시를 만들 거다.”
혈강시급의 강한 놈은 물론이고, 머릿수를 채워 줄 놈들까지.
까득.
새로 꺼낸 당과를 입안에 넣고 깨물어 부순 언여휘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놈들이 새로 축제를 벌이려는 것 같은데, 선물 하나도 안 보낼 수 없지 않으냐?”
* * *
“그래서 진짜 면벽 수련 중이란 말이오?”
“네. 요 사흘간 발작도 없었어요.”
“허, 참.”
제갈소가 가져온 소식에 철백은 고개를 저었다.
“대단하군.”
면벽 수련.
말이 면벽이지, 진짜 벽만 보고 지낸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도저히 사람이 할 짓이 아니지.
“그럼, 일단 급한 불은 껐네요.”
“네, 친선전까진 괜찮을 것 같아요.”
서하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제갈소.
그녀의 표정엔 안도가 가득했다.
혜송을 돕겠다고 기루까지 동행할 정도로 절박했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그러니 이젠 친선전을 대비한 훈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음?”
“이번 친선전은 단체전과 개인전으로 나누어졌어요.”
흑룡학관과의 조율 끝에 결정된 사안이다.
말이 흑룡학관과의 조율이지 무림맹 대 사천맹 사이의 신경전이었다.
결국 둘 모두 크게 엇나가지 않는 방향으로 결정됐지만.
“단체전은 열 명이 한 개의 대(隊)가 되어 진지를 점령하는 형식으로 치러진다고 합니다.”
“땅따먹기란 말이군.”
“네. 심판은 흑룡학관과 무림학관의 교관들이 거의 총출동해서 곳곳에 배치될 예정이에요.”
음.
“그런다고 분쟁이 없겠소?”
철백의 물음에 제갈소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뇨. 있을 거예요. 그래서 학관장님께서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셨고요.”
“외부에?”
친선전의 심판을 보는 데 외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 말에 상황을 파악한 몇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이군.”
“네. 황실에서 특별히 심판을 맡아 주기로 했어요.”
양측의 불만을 잠재울 만큼 권위가 있으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집단.
황실.
거의 유일한 선택지라고 할 수 있었다.
황실은 정파고 사파고 다 무림인이니 그냥 세금만 잘 내고 문제만 안 일으키면 간섭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니까.
물론 깊숙이 들어가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일단 겉으로는 그러니 심판으로 나쁘지 않다.
그리고 황실에서 이런 규모의 일에 보낼 심판이라면…….
“형왕(衡王). 그분이 오시나 보군요.”
“네.”
형왕(衡王).
천하 십대 고수의 일인이자 유일하게 황실에 속한 인물.
그리고 이 사람의 경우는 진짜로 왕(王)이다.
그냥 별호로 부르는 왕이 아니라 황제에게 이름뿐이지만 왕(王)의 칭호를 받은 대귀족이다.
봉토도 없이 황실에 복무하는 명예직이긴 하지만.
“그분이 오시는 만큼 아마 친선전 자체는 아주 공평하게 치러질 겁니다.”
“음.”
그렇겠지.
황실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심판을 보는데 거기서 헛짓거리를 했다간 황실의 눈 밖에 날 테니.
아무리 무력이 강해도 황실은 부담스러운 존재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생물이니까.
“그래서, 일단 단체전 인원을 정확하게 정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질문이 있소.”
“네. 하세요.”
“우리에게 부회장이 직접 이리 말하는 이유가 뭔지 물어도 되겠소?”
친선전에 나가는 이들은 여기에 있는 이가 전부가 아니다.
그들에게도 이야기를 전해야 할 테니 굳이 이렇게 따로 말하지 않고 전부 모아서 하면 되지 않은가?
“아주 좋은 질문이에요.”
철백의 의문에 고개를 끄덕인 제갈소는 훈련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 면면을 바라봤다.
유예린을 시작으로 설천위, 철백, 서하영, 소윤혜, 주현운, 남궁천까지.
일곱 명.
거기에다 당화유와 혜송까지.
총 아홉.
본래 선발한 인원은 열둘.
“황보척 소협 이외의 둘이 불참 의사를 내비쳤어요.”
“응?”
“또한, 황보척 소협도 흑룡학관에서 입은 부상에서 회복하는 중이라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죠.”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
그럼 나머지 둘은 그때 함께 갔던 녀석들인가?
워낙 존재감이 없어서 기억을 못 하고 있었네.
“즉, 저희는 최소 한 명 이상의 단체전 참가자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단체전에서 부상을 당해 개인전에 못 나갈 수 있으니 최대한 많은 인원을 구해야 한다는 소리군요.”
“네. 안타깝게도.”
유예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제갈소가 말을 이었다.
“해서, 여러분들 중 자원자를 받고 싶습니다.”
“……자원자?”
“새롭게 사람을 모아 단체전에 나가 주실 분 있을까요?”
모두를 바라보는 제갈소의 눈빛엔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