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188화-그거 맞아? (9)
“후, 드디어 진정됐군.”
설천위 덕에 단숨에 당화유를 진정시키고 혜송도 빠르게 제압하는 데 성공한 이들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하나둘 모였다.
“천위, 때 한번 잘 맞추는군.”
“잘 맞추기는, 딱 봐도 발작이 한두 번 일어난 게 아닌 것 같은데.”
“음, 최근에는 하루에 두 번꼴로 일어난다.”
하루에 두 번이라.
[생각보다 심각하구나.]
신의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심마에 의한 발작이 하루에 두 번.
의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해도 상황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건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치료법은요?”
[이 여아의 경우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을 터이나 문제는 저 중이다.]
신의의 대답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기절해 있는 혜송에게로 향했다.
[불가의 심법을 익히고도 이만한 심마가 오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 선천적인 살성 혹은 그에 준할 정도로 어린 나이에 깊숙이 새겨진 충격이다.]
“……맞아요. 회장은 일가족이 참살된 현장에서 발견됐다고 들었어요.”
피로 흥건한 장원.
죽은 어미의 곁에서 울고 있는 아이.
그 주위로 흩뿌려진, 가족의 사지.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들의 얼굴은 그 죽음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능히 짐작하게 한다.
그런 끔찍한 현장에서 혜송은 발견되었다.
“여기까지가 제가 들은 이야기예요. 저도 회장에게 들은 거지만.”
“그렇다면 혜송 스님도 그 이야기를 자신을 구해 준 분께 들었다는 소리겠네요.”
“예. 혜송 스님의 스승이신 무백 대사께서 과거를 극복하기 위해선 알아야 한다고 학관에 들어오기 전에 말씀해 주셨다고 했어요.”
제갈소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신의를 바라봤다.
“치료법은요?”
[아까 말했듯이, 저 여아와 달리 이 중은 긴 시간이 필요하다. 결코 단시간에 고칠 수 없어.]
“최근에 갑자기 발작이 늘었는데, 그거라도 줄이고 싶어요.”
[음, 원인으로 짐작 가는 것이 있느냐?]
“원인으로 짐작 가는 게 있느냐고 묻는데요?”
“아, 네! 얼마 전에 있었던 학생들의 난동 때문입니다!”
난동?
“그, 회장은 원래 분노를 잘 다스리고 있었는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날뛰는 녀석들 때문에 꼭지가 돌았다?”
“……크흠, 뭐 엄밀히 말하면 그렇죠?”
……이 분노조절장애 스님이?
설천위가 미간을 찡그리자, 제갈소는 어색한 미소로 살짝 물러났다.
그 내부엔 혜송 나름대로 복잡한 고민이 담겨 있지만, 그걸 여기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설천위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고.
요약하면 딱 저 말대로이니 반박할 거리도 없다.
[흠, 그럼 이야기가 조금 나아가는구나.]
“그래요?”
아니, 여기서 대체 뭘 캐치하면 이야기가 나아가?
예상외의 긍정적인 대답에 설천위는 물론 다른 이들도 흥미롭게 신의를 바라봤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신의가 물었다.
[일단, 너희가 원하는 것은 발작의 횟수를 줄이고 싶은 것 아니냐?]
“그렇죠?”
[이 아이는 보아하니 교육의 영향으로 불의(不義)를 참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죠?”
아무래도 소림의 스님이니까.
세상 풍파를 겪으면 어찌 될지 몰라도 일단은 정도를 걷는 중이겠지?
당연히 화를 내면 무언가 잘못됐다고 판단해서 내는 것일 테고?
[지금 이 아이가 분노를 느낄 상황이 아님에도 폭주하는 건 쌓인 화가 이미 그릇에서 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아하, 그렇겠죠?”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그릇을 넓히면 화가 넘치는 것을 한동안 막을 수 있다.]
오호! 그런 간단한 방법이!
……는 무슨.
“그게 그렇게 쉬우면 이렇게 고민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아니, 쉽다. 다만 이 녀석이 중이라 일이 이렇게 된 것일 뿐.]
“네?”
[이 녀석이 만약 흑도로 흘러갔다면, 이런 심마 따윈 겪지도 않았을 거란 소리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여?
[너는 사람이 화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넓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인 줄 아느냐?]
“……모르죠?”
[사람의 화는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을 마주했을 때 생겨난다.]
소중한 사람이 다치거나.
소중한 물건이 망가지거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누군가가 부정하거나.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과 반대되는 행동을 누군가 하거나.
등등.
자신의 잣대에서 벗어난 일이 벌어질 때 인간은 분노한다.
[그렇다면, 용납할 수 있는 것의 폭을 넓히면 된다. 그것이 화를 담는 그릇을 넓히는 방법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에게 관대한 법이지.]
“……예?”
그게 무슨?
설천위를 비롯한 모두가 신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 신의의 속뜻을 이해한 사람이 딱 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소림의 중인데 그건 좀…….”
염려된다는 듯 고개를 젓는 유예린과.
[허허허! 역시 명의로구먼!]
감탄하는 천마.
그리고 뒤늦게 서서히 말뜻을 이해한 제갈소.
“안 됩니다!”
그녀의 단호한 부정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제갈소에게로 향했지만, 제갈소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안 돼요! 소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그런…….”
[그럼 너는 이 중이 이대로 계속 고통 받기를 원하는 것이냐? 저 심마를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선 최소 수 년, 길면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그런…….”
신의의 질책에 고개를 숙이는 제갈소.
그 모습에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한 철백이 입을 열었다.
“어르신, 저희도 알아듣게 설명해 주십시오.”
[음, 간단히 말하면…….]
철백의 물음에 혜송을 가리키며 신의가 말했다.
[이 중이 깨어나면 기루로 데려가라는 소리다.]
“……예?”
중을 어디로?
[기루 말이다. 술과 여자가 있는 곳.]
“……예?”
잘못 들은 게 아니야?
철백이 헛웃음을 짓는 순간, 신의가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기루로 데려가서 질펀하게 놀고 오란 말이다.]
아니, 이 미친 망령이?
* * *
“중대 사태다.”
무림학관의 병급(丙級)이 머무는 기숙사.
방마다 큼직한 크기를 자랑하는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 설천위는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앞에 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혜송 스님을 기루로 데려가야 한다.”
“……으음.”
“문제가 심각하네요.”
설천위의 말에 철백이 신음했고, 주현운은 안타까움을 담아 중얼거린다.
그 모습에 가만히 눈을 감는 남궁천.
그리고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혜송.
“아미타불…….”
“스님, 부처님은 기루로 데려가 주지 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설천위의 한마디에 더욱 크게 불호를 외는 혜송.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기루에 가는 거? 갈 수 있다.
돈이야 부족하지 않고, 술을 마시면 안 되는 것도 아니니까.
가면 재미있게 놀 수 있겠지.
문제는.
‘……왜 다 짝이 있냐. 더러운 세상.’
자신은 약혼자가 있고, 철백은 무려 반쯤 부모 공인의 연인이 있으며, 주현운과 남궁천도 각자 연을 맺고 있는 여인이 있다.
그런데 기루로?
물론 상황이야 충분히 이해 받을 수 있겠지.
상황이 상황이니 가는 것을 대놓고 뭐라고 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눈치가 보여!’
아무리 그래도 기루이지 않는가.
가서 별다른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뭔가 이쪽에서 양심이 찔린다고 해야 하나.
분명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질 텐데…….
아니, 솔직히 말해서 자기 남편 혹은 연인이 다른 이성이랑 술 마시고 논다는데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일 때문에 하는 거라곤 해도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왜? 사랑하니까!
그리고 그래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도 사람이고!
왜? 사랑하니까!
한숨을 삼킨 설천위는 다시 몸을 세워 다른 이들을 바라봤다.
“우리 중 최소 둘은 가야 한다.”
“……아미타불, 죄송합니다.”
더욱 죄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는 혜송.
사실 그만 보내면 될 일이 아닌가 싶지만, 혜송이 발작이라도 일으키면 그를 제압 혹은 시간이라도 끌어 줄 이가 반드시 옆에 붙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최소 둘 이상.
가서 술과 여자를 멀리하면서 혜송을 보필하고,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눈치를 봐야 하는 그런 가시밭길을 가는…….
“설 공자?”
“옙!”
순간, 밖에서 들린 목소리에 번개처럼 일어난 설천위가 잽싸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보이는…….
“……유 매?”
한껏 꾸민 유예린.
그리고 그 곁에는…….
“서 소저와 소 소저까지? ……제갈 소저는 왜 그리 꾸미셨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당연하다는 듯 되묻는 유예린.
그 의문에 고개를 갸웃하는 설천위의 의문을 유예린이 시원하게 풀어 줬다.
“저희도 같이 가야죠?”
“……아!”
그런 방법이?
* * *
“후후, 공자랑 술자리를 하는 건 처음인 것 같네요.”
무림학관 근처에 자리한 기루.
그중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기루를 찾은 설천위 일행은 빠르게 안내를 받아 자리를 잡았다.
“……아미타불.”
“뭐, 오늘은 적당히 마시고 노는 수준으로 끝이니 스님도 너무 걱정 마세요.”
“아미타불……!”
유예린의 말에 더욱 깊게 고개를 숙이는 혜송.
그런 혜송을 보며 작게 웃은 일행은 그대로 술자리를 시작했다.
술과 음식이 나오고, 분위기가 흥겨워진다.
“음, 하지만 역시 무림학관의 학생 신분으로 이러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는 거죠.”
술을 동이째 퍼마시면서 걱정하는 철백의 모습에 작게 웃은 유예린은 자신의 옆에서 술을 따라 주는 제갈소를 보고 당황하는 혜송을 바라봤다.
“저희가 생각해도 이건 아닌데, 싶은 게 중요한 거예요.”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건가.”
“그 말대로죠.”
설천위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유예린은 설천위의 잔에 술을 따르며 웃었다.
“끝나면 도박장에도 데려갈 거예요.”
“……그것 참.”
제대로 땡중이 되는 길인데.
유예린이 들고 있던 술병을 잡아 그녀에게 술을 따라 준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이거 진짜 효과 있는 거 맞죠?”
[물론이다. 이제 저 중은 최소한 음주가무를 즐기는 학생에겐 분노하기 어려워질 테니.]
씁, 그건 그렇지.
웬만큼 뻔뻔한 사람이 아니면 내가 하는 행동을 남이 한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뭐라 욕하진 않는다.
예를 들면,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에게 분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은 버리면서 쓰레기를 버리는 타인에게 화를 내는 건 상당히 성격이 뒤틀려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니까.
혜송 같은 바른 성격의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니 쓰레기를 버려 보게 하는 거다.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에게 더 이상 화를 내지 못하도록.
“……화를 담는 그릇을 넓히는 게 아니라 밑에 구멍을 뚫는 짓 같은데.”
[결과적으론 화가 넘치지 않으니 된 것이다.]
신의(神醫)라는 이름만 아니었으면 이 인간의 말은 절대 안 믿었다.
고개를 저으며 술을 홀짝이던 그 순간.
“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혀가 살짝 꼬인 남정네가 깽판을 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그리고 그 즉시 반응하는 혜송.
당장에라도 방을 뛰쳐나가 밖에서 행패를 부리는 이를 단죄하려는 혜송을 보며 신의가 말했다.
[잡아라.]
“말려요?”
참는 훈련인가?
[일단 저 술을 전부 먹이도록.]
저 술? 저거 한 동이인데?
“……죽지 않을까요?”
[소림을 얕보는구나. 전혀 문제없다.]
아니, 소림이 술 먹는 수련을 시키는 곳도 아닌데?
신의의 주장에 고개를 저으면서도 얘기를 들은 철백이 붙잡아 놓은 혜송에게 다가간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술을 퍼부었다.
“꿀꺽꿀꺽.”
잘도 받아 마시네, 이 양반.
그나저나 그럼 이제…….
[보내거라.]
“가서 말리게 하라고요?”
[아니.]
……아니면?
에이, 아무리 그래도…….
[저기 행패를 부리는 녀석과 함께 행패를 부리라고 해라.]
“아니, 그게 시킨다고 됩니까?”
[행패도 부려 보면 막상 할 만한 법이다.]
아니, 무슨 꼭 해 본 것처럼 말하네?
히끅.
“내가, 내가……!”
뭐야, 이 인간 왜 이래?
내공은 절대 쓰지 말라고 했으니 취할 만하긴 한데…….
“누가 술자리에서 행패냐!!”
순식간에 자리를 박찬 혜송이 문을 열고 나가 누군가의 뒤통수를 향해 발차기를 날린다.
그리고.
빠각!
꽤나 섬뜩한 소리와 함께 꼬꾸라지는 사내.
“넌 뭐야!”
그리고 그런 사내의 모습에 놀라 일어서는, 그의 동료로 보이는 이들.
그렇게 패싸움이 시작됐다.
[음, 이것도 나쁘진 않구나.]
술에 취해서 패싸움이라니.
아니, 패싸움이라기보다는 일 대 다지만…….
홀짝.
술을 홀짝이며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될 대로 되라지.”
뭐, 신의가 맞다는데 어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