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185화-그거 맞아? (6)
고압 고속으로 움직이는 물.
그것은 그 자체로 흉기가 되어 모든 것을 찢어발긴다.
‘나쁘지 않네.’
지금처럼.
열 개의 구체에서 뿜어진 수십 개의 물줄기.
한 개의 구체에서는 대략 여덟에서 아홉 개 정도.
총합 거의 구십에 이르는 물 채찍이 주변을 모조리 먹어 치우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란(水亂)]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광경이지만…….
‘역시 부족하네.’
한참 부족하다.
게임에서 본 [수란(水亂)]은 백 개 이상의 구체를 만들고, 각 구체당 수십 개의 물줄기가 나왔으니까.
물론, 인간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애초에 인간이 쓰는 기술도 아니고.
“그럼,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끄륵.]
돌아간 눈, 거품이 나오는 입.
손에 잡히는 느낌은 묵직하기 그지없다.
실체가 있는 거겠지.
산 채로 악귀에 휩싸였거나, 뭐 그런 거겠지.
그냥 빨리 보내 줄까.
악귀의 안면을 잡은 설천위가 그 손에 힘을 더하려는 순간.
[아…… 들…….]
최후의 한마디를 중얼거리는 악귀를 보며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최후의 순간에도 자식을 찾는 그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지만…….
“이미 늦었어.”
[거…… 짓…… 말…….]
“너, 네가 뭐에 씐 건지 아직도 모르는구나?”
제압한 순간, 설천위는 [패령안(覇靈眼)]의 공능으로 그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청아를 살려 준 이유가 그 본질에 있는 선함을 보았기 때문이듯.
눈앞의 악귀를 살려 주지 않는 것은 그 본질에 있는 악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짐승을 장난감 삼아 가지고 놀다 버렸지?”
힐난하고 싶지만, 이 시대에는 흔한 일이었다.
짐승보단 인간이 귀하고, 개고기의 맛을 좋게 만들기 위해 산 채로 개를 두드려 패는 것이 당연시되는 시대다.
그러니, 그것만으로 이런 문제가 일어나진 않는다.
“허나, 상처 입은 짐승들을 치료해 줬다고 그 하인을 패 죽인 것은 얘기가 다르지.”
짐승이라고 하여 자신을 향한 은(恩)을 모르진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잘 안다.
삶에 대한 본능이 날카로운 만큼, 그 과정에서 받은 도움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과 친근한 개라는 동물은 더더욱.
그런 짐승들이 죽은 하인의 몸과 혼에 자신을 던져 만든 악귀.
그 자아는 당연히 인간이면서도 짐승이다.
“짐승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이 무엇이겠냐.”
[끄으…….]
“네가 가장 고통 받을 일이다.”
그리고 복수란 것은 의외로 한없이 잔인한 법이다.
설천위의 영력과 패기로 인해 점점 정신이 또렷해지면서 악귀는 서서히 기억을 떠올린다.
기억해 낸다.
[으, 으아아아아아!]
그것은 끔찍한 비극이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자아가 무너져 버릴 비극.
제 가족을 스스로의 손으로 찢어 죽인 죄인의 울부짖음이 사방으로 울려 퍼진다.
“그러니, 죄를 짓고 살면 안 되는 거야.”
누군가는 말한다.
선이 복을 가져온다는 말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지어 낸 말이라고.
인육을 먹을 정도로 잔인했다는 도척이라는 도적은 천하를 마음껏 누리며 장수했고.
공자가 덕이 가장 뛰어난 제자라고 칭찬하며 아낀 안연은 이른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인간이 지은 죄에 천벌 따윈 없다.
설천위가 되기 전인 천희는 그런 것 따윈 없다고 생각했다.
있으면 세상이 이렇게 될 리 없으니까.
하지만.
“여기에는 있을지도.”
지옥도 있는 것 같고.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는 악귀를 보며 설천위는 악귀의 안면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최소한 천벌(天罰)은 없어도 인과응보(因果應報)는 있는 것 같으니까.
“가라.”
[살악(殺握)]
그의 손 위에 겹쳐진 또 다른 손이 악귀의 얼굴을 짓이긴다.
그의 살기와 영력에 짓눌려 무너진 악귀의 혼이 서서히 흩어진다.
“……대단하네요.”
“에이, 그리 강한 악귀도 아니었는데요.”
또 비행기를 태우기는.
묘한 표정으로 다가온 성화린에게 손을 내저은 설천위는 주위를 둘러봤다.
서서히 흩어지는 악귀들.
[수란(水亂)]이 생각보다 미숙해 단숨에 처리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훌륭한 성과다.
좀 더 다듬으면, 제법 쓸 만한 공격 기술 하나 나오겠어.
“음, 주변에 악귀가 더 있는 것 같진 않네요.”
대충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으려니 잠시 주위를 둘러본 성화린이 결론을 내렸다.
“일단 돌아가죠.”
일은 끝난 것 같으니까.
뒷일은 다른 애들에게 맡겨도 될 것 같고.
지금 중요한 건.
‘……확인부터 해 보죠.’
설천위가 품은 샘의 깊이를 측정하는 일이다.
* * *
“……그래서 급하게 돌아왔다 이건가?”
“네.”
“흠.”
무림맹.
고작 며칠 만에 돌아온 성화린이 급하게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자신의 집무실에서 성화린과 마주한 오윤은 슬쩍 미간을 찡그렸다.
“그렇다면 역귀술(役鬼術)엔 재능이 없는 것 아닌가?”
인간의 재능엔 한계가 있다.
그것이 영적인 부분에 관여한 것이라면 특히.
수많은 술사들을 보아 온 오윤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넘치는 재능이 하늘에 닿을 정도라고 평가받았던 전대 백화단주도 역귀술엔 재능이 부족해 작은 강아지 한 마리 데리고 다닌 게 전부였지 않은가.
“그만큼 술법에 재능이 있다면 그쪽에만 집중하는 것도 한 방법일세.”
선택과 집중은 상당히 중요하다.
시간은 한정돼 있으니 굳이 역귀술까지 익힐 필요는…….
“저도 처음엔 그리 생각했습니다.”
데리고 있는 혼들도 있으니, 간단한 역귀술 정도만 배우고 술법에 열중하게 하면 될 거라고.
그리 생각하지 않을 리가 있나?
그런데.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재능이 없다면 그런 아이를 데리고 다닐 수 있을 리 없어요.”
설천위가 힘을 끌어낼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는 용.
임무에서도 직접 힘을 쓰진 않았지만, 그 모습을 드러내긴 했다.
그리고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기질 자체가 변해 있었다.
시험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
“일단, 시험만이라도 해 보죠.”
* * *
“흐음, 와 달라고?”
백화단에서 내어준 숙소.
방에 들어온 설천위는 학관에서 왔다는 서한을 읽고 있었다.
발신인은 유예린.
내용은 뭐, 그냥 안부 인사 같은데 뭔가 묘한 느낌이 섞여 있다.
왠지 빨리 돌아오길 바란다는 느낌?
당화유 이야기도 적혀 있고.
심지어 혜송도 같이 수련하고 있다고?
흠.
기본적인 술법도 배웠겠다, 일단 돌아가야 하나?
[왕!]
“아쉬운데.”
이 귀여운 녀석을 제대로 다루는 법을 배우고 싶은데.
품에 안겨 헉헉거리는 청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설천위는 고민했다.
서신에서 풍기는 뭔가 어색한 느낌.
아마 무림맹으로 온 서신인 만큼 사전 검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내용을 숨긴 것 같은데.
“혜송이 얽혀 있으면서 내 도움을 바랄 만한 일은 하나뿐인데…….”
드디어 병이 도졌나?
음.
“신의 할배요.”
[뭐냐.]
“어릴 때 생긴 마음의 병으로 인한 심마 같은 것도 치료 가능해요?”
[흥, 그거야 환자의 상태에 따라 다르지. 다만.]
“다만?”
[본인의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다면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다.]
오, 자신감.
하긴 뭐 그 정도 하니까 신의겠지.
정신과도 아우르는 실력이라…….
뭐, 혜송의 치료는 친선전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니까.
돌아갈까.
그럼.
“소협.”
“네.”
아까부터 느껴진 인기척에 자연스럽게 일어나 문을 연 설천위는 문 앞에 선 이를 보며 웃었다.
“마침 잘됐네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네. 그런데 단주님께서 직접 찾아오신 이유는?”
“조금 시험을 하고 싶습니다.”
“시험이요?”
“예. 아무래도 역귀술에도 재능이 있는지 궁금해서요.”
“아.”
그러고 보니 만귀단 단주한테도 배우기로 했었지.
하긴, 그래도 시간 낭비를 안 하려면 테스트는 해야지?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잠시 손에 들린 서한을 바라봤다.
‘……뭐, 알아서들 잘 대처하겠지?’
혜송의 폭주 정도야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인원들이 모여 있고.
당화유까지 있으면 걱정할 필요 없겠지.
“어디로 가면 되나요?”
“따라오세요.”
배울 건 배우고 가자.
* * *
“……천위에게 답은 없었소?”
“그래도 명색이 임무니 조금 더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요?”
“으음, 무림맹에 걸릴까 봐 우려돼 내용을 돌려쓴 것이 조금…….”
“걸리죠?”
설천위가 눈치 없는 종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설명이 있어야 감이라도 잡는 법.
그저 어서 돌아와 달라는 식으로 서한을 적어 보냈으니 그리 급하게 움직이진 않을지도 모른다.
뭐,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했다.
그냥 설천위가 될 수 있는 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돌아오도록 서신을 보낸 것뿐이니까.
그래서 굳이 적나라하게 적지 않은 거였고.
근데 문제는…….
“서, 신을 다시 보내는 건 어떻소?!”
지금은 그런 마음이 사라질 정도로 여유가 없다는 점일까?
혜송을 붙잡은 채로 그의 혈을 누르는 유예린과 대화하던 철백은 이를 악물었다.
이 인간, 최근 자신과 함께 수련을 열심히 하더니 힘이 더 세졌다.
이 정도면 폭주할 때 풀려나고 싶어서 단련하는 게 아닐까 살짝 의심이 갈 정도로.
“저희 한계인데요!!”
“버텨!”
“꺄아아!!”
“으아아아!”
당화유와 맞서는 서하영, 소윤혜, 주현운의 비명이 훈련장 전체로 울려 퍼진다.
혜송이 먼저 발작을 일으켜 당화유와 상성이 좋지 않은 세 사람이 그녀를 막게 되는 불상사가 생겼다.
독이 없다곤 해도 그 숫자가 장난 아닌 당화유의 암기술을 세 사람이 상처 없이 받아 내는 것은 힘드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오늘은 남궁천도 함께 있다는 것이다.
“버티시게!”
당화유의 움직임을 막아 내는 데 한 손을 보태는 남궁천을 바라보던 철백은 이내 팔에 힘을 풀었다.
“됐어요!”
유예린이 말하기도 전에 혜송의 몸에서 힘이 빠진 것을 느끼고 팔을 푼 철백은 그대로 땅을 박찼다.
“움직임을 막게!”
이젠 당화유를 제압할 차례다.
그렇게 철백까지 가세해 순식간에 당화유를 제압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유예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신을 하나 더 보낼까요.’
아무래도 설천위가 서둘러 돌아올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혜송은 몰라도, 당화유는 설천위만 도착하면 바로 해결할 수 있을 테니.
“꺄아! 이마! 이마!”
“언제 꽂힌 거야!”
이마에 손가락만 한 침이 박힌 서하영이 난리를 치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진짜로 서신 한 장을 더 써야 할 것 같았다.
* * *
“간단한 시험이다.”
만귀단의 훈련장.
성화린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그곳엔 오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데리고 있는 녀석들을 이용해 두 가지를 해내면 된다.”
설천위를 바라보며 오윤은 자신의 지팡이로 바로 옆에 있는 바위를 툭툭 두들겼다.
“먼저, 이 바위를 부술 것.”
“부숴요?”
“힘들면 흔적을 남기기라도 하거라.”
아, 그런 의미로 물어본 게 아닌데.
부정할까 하다가 설천위는 입을 다물었다.
아직 설명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다음으론 이 녀석이다.”
다음으로 오윤의 지팡이가 가리킨 곳엔 한 도사가 앉아 있었다.
정갈한 복장으로 차분하게 앉아 있는 도사.
그리고.
“수호령으로 몸을 지키고 있는 도사다.”
“음, 그냥 날려 버리라는 건 아니겠죠?”
“물론이다. 오로지 영적인 힘만으로 수호령을 물리치고 도사에게 닿으면 된다.”
식령을 이용한 물리적 전투와 영적인 전투 양쪽의 가능성을 보는 시험.
상당히 괜찮네.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바위와 도사를 살폈다.
웬만하면 힘을 숨기는 게 좋긴 한데…….
‘굳이?’
뭐, 여기에도 첩자야 있겠지만.
굳이 숨길 필요까진 없을 것 같은데.
결정을 내린 설천위는 한 걸음 물러서서 오윤을 바라봤다.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죠?”
“물론.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도 된다.”
오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가볍게 뒷짐을 쥔 채 섰다.
“그럼…… 조금 물러나 주시겠어요?”
“……음?”
“휘말리면, 상당히 아프실 거예요.”
[패룡지체(覇龍之體)]
[패룡지기(覇龍之氣)]
[패룡지심(覇龍之心)]
울부짖는 용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저는 이 모습을 이리 부릅니다.”
훈련장 하늘을 전부 채운 흑룡의 등장과 함께 설천위는 작게 웃었다.
“암천룡(暗天龍)이라고.”
하늘(天)조차 숨기(暗)는 용(龍).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짓눌리는 훈련장.
그리고…….
히끅.
딸꾹질과 함께 고개를 돌리는 도사.
그 시선은 자신과 비슷할 정도로 놀란 단주를 향하고 있었다.
“……이거 굳이 해야 합니까?”
하다 죽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