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화
180화-그거 맞아? (1)
“하하하! 호쾌한 거절이구먼!”
잠시 기묘한 정적이 내려앉은 회의실. 웃음을 터트린 건 패력단주(覇力團主) 황보중이었다.
진심으로 기껍다는 듯 연신 소리를 내서 웃는 그의 모습에 다른 단주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만하게. 아이가 부담스러워하지 않겠나.”
맹주의 제자 제의를 단박에 거절한 일이다.
옆에서 단주급이나 되는 인간이 저리 웃으면 오히려 위협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초생단주(草生團主) 구목의 타박에 황보중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그렇게 여린 녀석 같진 않은데?”
피식 웃으며 설천위를 바라보는 황보중.
그 눈에는 호의가 담겨 있었는데, 거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일전에 자식이 당한 굴욕을 갚아 준 은인.
심지어 그것을 위해 흑룡학관이라는 험지에 단신으로 가기까지 했다.
돌아오는 길에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패력단을 움직일 생각까지도 했으니까.
물론 그러기 전에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어 결국 움직이진 않았지만.
“맹주, 아무래도 자기 주관이 뚜렷한 아이 같소?”
“허허, 황보 단주의 말대로 그런 것 같소이다. 내 너무 성급했구려.”
그렇기에 오히려 과장된 웃음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킨 황보중의 모습에 유석천은 고개를 저었다.
너구리 같은 놈.
곰너구리라는 동물이 있으면 필시 저놈과 똑같이 생겼을 거다.
우직하기 그지없는 구목은 그 의도를 읽지도 못한 채 맞장구쳐 준 것 같지만.
설천위의 칼 같은 거절에 일순 굳어졌던 분위기가 풀리고 미소를 지은 맹주가 한걸음 물러섰다.
“내 너무 성급하게 제안을 했으니 사과의 의미로 작은 부탁이나 하나 들어줌세.”
“그거 나쁘지 않군요. 어차피 상을 주려고 부른 자리였으니.”
백화단주(白花團主) 성화린의 호응에 다른 단주들도 별다른 이견을 내놓지 않았다.
대부분 주든 말든 상관없다는 분위기.
그 속에서 맹주는 어느새 자리에 앉은 모습으로 설천위를 보며 웃었다.
“그럼 우리 소형제가 원하는 것이 있나?”
원하는 것.
그것이 있냐는 질문에 설천위는 선뜻 입을 열지 못한 채 침묵했다.
원하는 것?
많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요구해도 될 법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하물며.
‘……작은 부탁이라면 영약 같은 건 어림도 없겠지.’
영약 정도라면 조금 안면몰수하고 요구할 만한 가치가 있긴 한데.
아마 간단한 가르침 같은 것을 내리기 위한 제안일 것이다.
이런 경우, 보통 한 수 배우겠습니다, 같은 부탁이 대부분이니까.
간단하고,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정말 작은 부탁.
하지만.
‘이 인간 무공은 배우기 싫은데.’
사파나 마교의 것과 같은 사특한 무공은 절대 아니다.
아마 정파의 무공 중에서도 상위권에 들어갈 정도로 뛰어난 정공의 무공일 것이다.
그런데 싫은 이유.
‘……이 인간이랑 얽히는 건 사절이지.’
수렁 같은 인간이다.
얽히는 순간,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아마 그의 장기말 중 하나가 될 거다.
악인은 아니나, 선인도 아니다.
그는 선을 말하나, 그 행동은 이익을 따른다.
한마디로 말해.
‘정치인 같은 인간이지.’
겉과 속이 다르다는 점부터 해서, 그 본질과 과정이 어떻든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말이다.
물론, 그 결과가 모두에게 공익이 되는 결과는 아니지만.
뭐, 누군가는 이익을 챙겨 가니 결과는 결과지.
이 무림맹이 이익집단이 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눈앞의 이 맹주 때문이니까.
여하튼, 깊게 얽히긴 싫으니까 일단 적당한 구실을 대야 하는데…….
설천위가 고민에 빠진 사이, 시간이 흐르고 섣불리 대답하지 않는 설천위를 보며 맹주가 먼저 입을 열려던 그 순간.
“그럼, 맹의 업무를 체험하게 해 주는 건 어떤가요?”
차분한 표정의 남궁선이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결국 경험이 최고의 자산이니 학관 시절에 미리 업무를 경험해 보는 건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에헤이, 아무리 그래도 상을 준다고 해 놓고 일을 시킨다니 그건 경우가…….”
“좋습니다.”
황보중은 물론이고 다른 단주들까지 그건 아니라는 듯 미간을 찡그렸으나, 그런 가운데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설천위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남궁선의 조언에 감사를 표하며 살짝 고개를 숙인 설천위는 몸을 돌려 맹주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남궁 단주님의 말씀대로입니다. 마침 좋은 기회이니 제가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을 하고 싶습니다.”
“흐음,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이라…….”
설천위의 말에 고민하듯 수염을 쓰다듬는 맹주.
그 모습에 설천위가 선수를 쳤다.
“백화단을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백화단을?”
“무림학관을 다니는 네가 왜?”
설천위의 말에 몇몇 단주들이 의문을 표했으나, 맹주는 차분한 시선으로 백화단주를 바라봤다.
“백화단주,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저는 괜찮습니다. 저리 열정적인 학생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지요.”
“음. 일단 가능하긴 할 것 같은데, 이유가 궁금하구나.”
다시 설천위에게로 돌아간 맹주의 시선.
그 시선에 동조하듯 다른 단주들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고, 설천위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결국 한 식구가 될 사람들이니 제가 무림학관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여겨서입니다.”
“허허, 설가의 막내가 부족하단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모두 헛소문이구나.”
흐뭇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맹주.
“보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어찌 말리겠느냐. 그리하거라.”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하는 설천위를 보며 흐뭇하게 웃은 맹주는 이후 짧은 덕담과 함께 단주들에게 그들의 업적을 한 번 더 알리고 자리를 파했다.
“그럼, 오늘은 이것으로 회의를 파하겠소. 너희는 마음껏 맹을 구경하거라. 단, 업무에 방해가 돼선 안 될 것이다.”
“예!”
맹주의 말에 힘차게 대답하고, 하나둘 빠져나가는 단주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설천위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백화단주를 보곤 웃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요. 그나저나 참 잘했어요. 설 공자에겐 가르쳐 주고 싶은 것들이 아직도 많거든요.”
“아, 난 조금 배신당한 기분인데.”
백화단주의 말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걸어오는 남궁선.
설천위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엔 섭섭함이 담겨 있었다.
“제안을 내가 해 줬는데, 그럼 내 쪽으로 와야 하는 거 아닌가?”
“죄송해요. 그래도 일단 기회가 기회이니만큼 좀 더 색다른 걸 배우고 싶어서요.”
“흐음, 마음은 이해한다만…….”
잠시 턱을 쓸며 눈을 가늘게 뜬 남궁선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럼 난 얘들로 만족할까.”
“예?”
단숨에 철백과 서하영을 끌어당긴 남궁선이 히히 웃었다.
“너희도 같이 갈래?”
“예? 저희도요?”
“저 언니 따라가서 재미있을 건 저 녀석밖에 없을걸? 너희야 뭐 딱히 강제로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어, 그러고 보니?
생각해 보면 설천위야 백화단주를 따라가는 게 의미가 있겠지만…….
순간 서로 눈빛을 교환한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는 남궁 대협을 따라가겠습니다!”
“저도요!”
“이 배신자들이?”
순식간에 이탈하는 친구들을 향해 설천위가 눈을 부라리고, 친구들은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뭐!”
“맞아요! 뭐요!”
“이것들 보소?”
너무 당당하게 가슴을 내미는 모습에 역으로 피식 웃음이 터진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이곤 유예린을 바라봤다.
“유 매도 괜히 나한테 붙을 필요 없어. 저쪽으로 가도 돼.”
“아뇨. 괜찮아요.”
작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은 유예린은 아쉽다는 듯 설천위를 바라봤다.
“물론 설 공자를 따라가는 것도 힘들지만요.”
“응?”
그럼 어디 가게?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설천위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유예린은 여기에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를 뵙고 올게요.”
“아, 확인.”
예상대로의 답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다시 몸을 돌려 백화단주를 바라봤다.
“이제 정리는 다 끝났나요?”
“네.”
“그럼 가죠.”
“좋아, 그럼 우리도 가자!”
백화단주의 뒤를 설천위가 따르고, 남궁선도 웃으며 친구들을 이끌어 회의실을 빠져나간다.
그렇게 적막이 내려앉은 회의실.
“흐음.”
어느새 다시 자리에 앉아 있던 맹주가 웃으며 수염을 쓸었다.
“재미있는 아이구나.”
설천위가 나간 회의실의 문을 바라보는 맹주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 * *
“그래서, 술법은 얼마나 연마했나요?”
“전에 준비하던 걸 꽤나 자연스럽게 쓸 수 있을 정도는 됐어요.”
백화단 건물로 향하는 길.
백화단주, 성화린의 질문에 설천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건 기대가 되네요.”
하지만 그 담담한 대답에 성화린은 오히려 고개를 저었다.
기본적인 술법으로 변화를 시도한 것만 해도 대단한데, 이젠 그걸 자연스럽게 쓸 수 있게 됐다고?
그것 참.
“궁금하구나.”
순간, 공기가 가라앉았다는 느낌과 함께 백화단주의 손이 빛살처럼 움직인다.
소매에 숨겨 뒀던 부적을 꺼내 수인(手印)을 맺는다.
부처나 보살이 하는 손동작과 비슷하다고 해서 수인(手印)이란 이름이 붙은 손동작이지만, 그 의미나 결과는 전혀 다르다.
단숨에 영력이 부적으로 빨려 들어가고, 부적은 힘을 발휘한다.
허공에서 솟구치는 거대한 불의 창.
그것이 설천위와 성화린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무언가를 꿰뚫는다.
아니.
꿰뚫었어야 했다.
[흑관(黑棺)]
[패령안(覇靈眼)]
십수 개의 흑관이 존재를 속박하고.
존재를 꿰뚫는 두 눈이 대상을 관통한다.
불의 창이 대상과 마주하기도 전에, 먼저 그 존재를 멈춰 버린 힘에 성화린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때는 분명 부적을 이용해 간단한 수준의 흑관을 만들어 내는 정도였는데?
부적도 없이, 단순 영창으로 이런…….
경악한 성화린의 심정만큼이나 놀란 상대의 떨떠름한 목소리가 퍼진다.
“……우리 부단주보다 실력이 나은 것 같군.”
성화린과 설천위에게서 열 보 정도 떨어진 곳에 선 노인.
그는 허공에 멈춘 자신의 식령(式靈)을 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내 학귀(虐鬼)가 그리 쉽게 막힐 아이가 아니거늘.”
생전에 무림 공적까지 됐던 녀석이 악귀화한 것을 지배한 것이다.
그러니 절대 약할 리가 없다.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에 고개를 젓던 노인은 어느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 눈동자를 마주하곤 깨달았다.
“괴물이구나……!”
혼을 꿰뚫는, 절대적인 존재의 눈.
거기에다.
‘짙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와 주변을 잠식하는 짙은 영력까지.
과연, 백화단주가 흔쾌히 받아들일 만도 하다.
그렇기에 더욱 궁금해졌다.
“그럼 어디까지 가능하냐?”
노인.
만귀단(萬鬼團) 단주(團主) 오윤은 웃으며 손을 움직였다.
그 순간.
[크르르르.]
[키이이익.]
그의 등 뒤로 수십의 인영(人影)이 떠오른다.
아니, 그것을 과연 인영(人影)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도저히 사람의 형태를 한 그림자가 아닌데?
뿔이 달린 그림자.
팔이 네 개 이상인 그림자.
웬만한 성인 셋을 세워야 할 것 같은 거대한 신장.
그야말로 인간을 벗어난 수많은 존재들의 위압감이 공간을 짓누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설천위는 담담하게 웃었다.
“뭐, 이 정도는 문제없죠?”
설천위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세가 괴이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 * *
“……무림맹에 갔다고?”
“그렇답니다. 그런데 한동안 안 보이더니 갑자기 무슨 일 있습니까?”
오랜만에 만난 당화유를 보고 남궁천은 물었다.
상당히 괴짜라 친해지기 쉽지 않지만, 설천위 덕에 그럭저럭 친해진 당화유.
솔직히 말해 좀 반갑긴 하다.
최근 친선전을 위한 수련에도 얼굴을 거의 안 비치니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긴 하지만.’
얼굴색이 상당히 안 좋다.
마치 내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다만 당가라는 그녀의 특성을 고려하면 내상은 아닐 거다.
웬만한 의원보다 의술이 좋은 그녀일 테니까.
여하튼, 몸 상태가 안 좋은 당화유가 설천위를 찾는다.
그럼 뭐 이유야…….
‘……악귀랑 얽혔나?’
그쯤 아니겠는가?
차를 홀짝이며 실망감을 품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당화유를 배웅한 남궁천은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이 신경 쓴다고 해결될 일이었으면 자신에게 부탁했겠지.
솔직히 어떻게 해서든 도와주고 싶긴 하지만, 당가 특유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섣불리 손을 내미는 것은 하책이다.
그렇게 남궁천이 깔끔하게 포기한 사이, 그의 방을 나선 당화유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림맹까지 가?’
고민에 빠진 그녀의 두 눈동자엔 붉은 혈기가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