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178화-따님을 제게 (3)
“일단, 대화를 해요.”
“……하지만.”
입을 우물거릴 뿐 더 이상 말을 이어 가지 못하는 서하영의 모습에 유예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착한 성격이란 건 이럴 때 보면 참 불편하다.
아버지의 마음을 적당히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나쁜 아이였다면, 이리 고민하지도 않았을 텐데.
아니, 나쁠 필요도 없이 자신의 행복이 곧 아버지의 행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뻔뻔함만 있어도 이리 힘들어하진 않을 텐데.
‘……그건 아닌가.’
만약 그런 아이였다면 이리 창을 쓰는 건 상상도 못 했겠지.
창을 쥐는 순간부터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기반이 되는 강인한 육체가 있어서다.
하지만, 강인한 육체를 얻기 위해선 끊임없이 수련해야 한다.
배운 거라곤 권법밖에 없음에도.
바닥을 기는 재능으로, 되지도 않는 주먹에 매달리는 것.
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기초 단련을 이어 가는 것.
이는 웬만큼 강력한 동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버지를 향한 존경과 사랑.
아버지의 무(武)를 좋아하는 마음이 그 고난을 이겨 내게 한 것이겠지.
그런데, 그것을 자신이 부정해 버렸다.
손에 닿지 않는 권법을 포기하고 창을 쥐어 버렸다.
이 아이가 느끼는 죄책감이 어떠할까.
‘……알 것도 같네요.’
자신에게도 그만큼 소중한 존재가 있으니까.
마음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유예린은 손을 뻗었다.
떨리는 서하영의 어깨를 두 손이 부드럽게 감싼다.
“가자, 하영아.”
“……언니?”
친해져서 가끔 말을 놓긴 해도 기본적으로 존댓말을 하는 유예린이다.
아마 그녀가 일상적으로 반말을 하는 사람은 홍유화 정도일 터.
그 사실을 알기에 서하영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유예린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시선에 오히려 유예린은 서하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게 웃었다.
“나는 사람과 거리를 좁히는 게 어려워. 사람의 마음이란 건 천 길 물속과도 같으니까.”
타고난 성격이 그렇다.
타인의 생각은 읽을 수 없기에 믿음은 가끔 배신으로 돌아온다.
형제간의 경쟁에서 인간은 항상 선하기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홍유화는 설천위가 없는 시절의 빈 공간을 채워 준 소중한 동생이기에 허물없이 지낼 수 있었다.
홍유화의 전부를 알아서가 아니다.
배신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유예린에게 믿음은 그런 것이다.
그렇기에.
“하지만, 이제 나는 너를 믿어. 믿고 있어.”
“네?”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믿는다고 말하는 유예린의 모습에 서하영이 침울해졌던 기분도 까먹을 정도로 당황한 순간.
유예린은 더욱 그윽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 너를 이리 키워 준 네 아버지도 분명 훌륭하신 분일 거라고 믿어.”
“…….”
“그러니, 너도 네 아버지를 믿어 보자.”
부드러운 설득.
그 설득에 서하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얼마나 달려온 건지, 학관 내에서도 꽤나 외진 숲까지 들어와 버렸다.
“……갈게요.”
“좋아.”
당차게 대답하는 서하영의 모습에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유예린.
몸을 돌린 그녀는 일단 훈련장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돌아가면 대화할 기회가 있…….
“응?”
“……왜요?”
갑자기 고개를 갸웃하는 유예린의 모습에 흠칫 놀란 서하영이 물었지만, 유예린은 깊게 미간을 찡그릴 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저쪽에서 왔나 본데?”
“네?”
유예린의 말에 서하영이 고개를 갸웃한 순간.
쿵.
낮은 울림이 땅을 타고 흘러왔다.
뭔가가.
‘……싸우고 있다?’
땅을 통해 진동이 전달될 정도로 강한 충격이라면.
“……아빠?”
순간 가장 유력한 후보를 떠올린 서하영의 머리 위로 또 다른 이름이 스쳐 지나간다.
“철 가가!”
왜 깜박했을까!
그 사람이라면 분명 부딪혔을 텐데!
마음이 다급해진 서하영이 땅을 박찬다.
그런 서하영의 움직임에 맞춰 함께 땅을 박차는 유예린.
순식간에 숲을 가로지른 두 사람은 금세 소리의 진원지에 도달했다.
“흡!”
양팔을 가슴 앞으로 모으고, 다리는 앞뒤로 벌린 자세.
본래라면 허벅지를 안쪽으로 모아 급소를 보호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다는 증거다.
철백이, 자신의 모든 힘을 쥐어짜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정도의 충격이 가해진다는 소리.
“놈! 다시 한번 말해 보거라!!”
“예! 따님을 제……!”
쾅!!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강렬한 충격이 대지를 뒤흔든다.
완벽에 가까운 방어를 취한 철백의 몸이 꺾여 더 이상 그 말을 이어 나가지 못할 정도의 강한 충격.
‘……이게 천하 십대 고수인가.’
그 광경에 유예린은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은 아직 반밖에 걸치지 못한 경지.
화경(化境).
그 속에서도 강자의 위치에 선 권왕의 주먹은 가히 일절이라 말하기에 충분한 위력이었다.
웬만한 공격 따윈 웃으면서 받아 낼 수 있는 철백이, 말조차도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흐하!”
허나, 그렇다고 해도 철백이다.
내공 하나 없이 무(武)의 길을 걷고 있는 철백.
“다시!”
그 충격조차 적응해 낸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다시금 자세를 잡은 철백이 입을 연다.
“따님을 제게!”
쾅!!
대지가 흔들린다.
이번에도 끊겼다.
허나.
“다시!!”
채 가라앉지도 않은 모래 먼지 속에서 철백의 외침이 터져 나온다.
“놈!”
“몇 번이고 할 것입니다!”
그 독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철백은 웃으며 외친다.
포기하지 않는다.
왜?
“제 목을 베어도,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두고 봐야 할 일이다!”
강한 의지와 함께 자세를 고친 철백의 방어 위로 주먹이 떨어진다.
하나하나가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피떡으로 만들 정도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품은 주먹.
“……저 바보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젠 아예 폭풍처럼 몰아치는 주먹세례에 정신을 차린 서하영은 창을 들었다.
일단 말리자.
말리고…….
‘……말리면?’
그 뒤에는?
순간 확 얼굴이 붉어진 서하영이 머뭇거리는 순간.
“조금만 지켜보자.”
“네?”
서하영의 어깨를 잡아 그녀를 말린 유예린은 웃으며 철백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저 남자는 끝을 봐야 할 것 같으니까.”
“하지만…….”
“설마 죽이기야 하겠니?”
아무렴, 아무리 딸 도둑이라곤 해도 일단은 딸의 학우다.
아무리 딸 사랑에 눈이 돌아가도 설마 죽이기야…….
“…….”
……왜 대답이 없지?
침묵하는 서하영의 모습에 살짝 불안해진 유예린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노오옴!!”
분노로 맛이 갔는지 그저 고함만 지르며 주먹을 휘두르는 권왕의 모습이 보인다.
일말의 자비도 담겨 있지 않은 눈빛.
“……역시 말릴까?”
믿음이 조금 흔들릴지도?
살짝 불안해진 유예린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강렬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어머, 어머!”
그리고 그 외침은 강렬한 충격에 끌려 찾아온 구경꾼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자신의 주먹을 받아 내며 결국 문장을 완성시킨 철백의 모습에 권왕의 주먹이 딱 멎었다.
“서하영 소저를 평생 아끼고 사랑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멎어 버린 주먹세례 속에서 당당하게 선 철백이 절한다.
“이놈이……!”
그 모습에 권왕의 눈이 또다시 흉악하게 변하는 순간.
“그만하게. 보는 눈도 많거늘 왜 이리 열을 내는가?”
“그건 네놈에게 딸이 없기 때문 아닌가!”
“내 아들들이야 뭐, 알아서 잘하겠지.”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 팽후는 진심으로 분노를 삭이는 듯 이를 악무는 서청진을 보며 웃었다.
이 녀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군.
‘정파라는 이름에 걸맞은 건 역시 무림맹을 떠난 친구들뿐이군.’
씁쓸한 미소를 숨기며 팽후는 구경꾼이 된 학생들에게 손을 휘저었다.
“자, 돌아들 가거라! 자네도 일어서고!”
“허나……!”
“이런 데서 나눌 이야기는 아니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팽후의 말에 수긍한 철백이 자리에서 일어서고, 그 빈틈을 유예린이 정확하게 찔렀다.
“잠깐, 언니……!”
재빨리 권왕의 앞으로 서하영을 밀어 넣는 유예린.
그녀 덕에 반쯤 억지로 아버지의 앞에 서게 된 서하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의기소침한 딸의 모습에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서청진.
묘한 침묵이 흐르던 그 순간.
“……아빠. 저, 역시 주먹은 안 맞았어요.”
작았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며, 서하영은 고개를 들었다.
“죄송해요. 하지만…….”
“됐다.”
서하영의 머리 위에 큼지막한 손바닥을 올린 서청진은 아까까지 보인 흉포함 따윈 전혀 떠오르지 않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너는 내 딸이면서 동시에 서하영이다. 네가 가고자 하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가거라.”
“아빠……!”
“다만 기억하거라. 힘들고 지치면 언제든지 돌아와 쉴 집이 있다는 것을.”
집이란, 가족이란 바로 그런 것이니까.
서청진의 자애롭기 그지없는 모습에 유예린은 자신의 믿음이 틀리지 않음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고.
“흡?!”
은근슬쩍 그 뒤로 다가가던 철백은 무형의 힘에 막혀 이를 악물었다.
이런 순간에도 허공섭물로 견제를?!
차마 이 분위기를 깰 수 없어 결국 조용히 물러선 철백의 어깨를 누군가가 두드린다.
“수고.”
“……아직 허락받지 못했다.”
“뭐, 그거야 단번에 해낼 수 없는 일이고.”
자식의 반려를 보는 일인데, 첫인상으로 정할 수 있나?
같이 얘기도 좀 하고, 술도 마셔 보면서 성격을 파악한 뒤에나 허락하는 거지.
처음에는 다 저렇게 부정적으로 나오는 거다.
그 정도가 조금 격해서 그렇지.
그나저나.
“……저건 언제 치우냐.”
팽후나 설천위가 이 두 사람을 단숨에 찾아낼 수 있었던 이유.
벽이나 건물 따위를 전부 가로지른 일직선의 길을 보며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 * *
“따님을!”
쾅!!
“……아직도 저러고 있네.”
“대단하네요?”
훈련장 한구석에서 울려 퍼지는 강렬한 충격에 설천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말에 대답하는 청아의 말대로 솔직히 대단하다.
벌써 사흘째.
딸이 창법으로 수정한 가문의 권법을 살피기 위해 찾아오는 권왕에게 철백은 또 저러고 있다.
뭐, 사실 부모가 허락하지 않더라도 결혼을 할 수야 있긴 하지만 이게 또 가족이란 게 그렇게 굴러 가는 게 아니지 않은가?
결혼하겠다고 아버지랑 연을 끊을 순 없으니까.
그러니 저리 필사적으로 장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건 다 서하영을 생각해서다.
뭐.
‘살짝 자존심이 걸린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든 인정받겠다는 승부욕이 불붙은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최근엔 저것도 상당히 나아진 편이다.
대충 대련처럼 치고받다가 끝나면 밥 정도는 같이 먹으니까.
서로 서하영이라는 공통 화제가 있으니 의외로 대화도 잘 통하는 것 같고.
“그나저나, 일꾼이 하나 빠진 건 아쉽네요.”
“저 녀석이 있으면 든든하긴 하지.”
주현운의 말에 피식 웃은 설천위는 상자를 들어 올렸다.
사흘 전에 있었던 난리 탓에 잊고 있던 걸 찾아낸 탓이다.
일전에 철귀를 잡고 그 피해자들이 보내 준 보상들.
거절할까 했지만, 또 일일이 다 거절하는 것도 귀찮고 해서 그냥 받은 것들.
워낙에 바빠서 그냥 훈련장 창고 구석에 잘 쌓아 뒀는데 철백과 서청진의 다툼(?)으로 창고가 망가져서 이참에 동호회실로 옮기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았네.”
“솔직히 현물적 값어치 있는 건 없었으니까요.”
하긴 값어치가 있었으면 팔아서 포상금으로 걸었겠지.
가보이니만큼 나름의 가치는 있겠지만, 지금 당장 우리한테 쓸모 있을만한 건 없을 것 같은데.
주현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설천위는 이 상자, 저 상자 열어 보고 있었다.
이게 참 이상해.
평소엔 관심도 없다가 청소만 하면 이렇게 열어 보고 싶다니까.
전생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상자를 열어 보던 그 순간.
“……응?”
“왜요?”
“……잠깐.”
자그마한 상자를 잡은 설천위는 그 안에 있는 물건에 미간을 찡그렸다.
광택이 없는, 주황색의 돌.
그 크기는 한 손에 딱 들어올 정도이고, 모양은 타원형이다.
문제는 이걸 어디서 본 것 같다는 건데…….
이게 뭐지?
손에 올려놓은 돌을 보며 설천위가 고민하던 그 순간.
“천위 있는가!”
밖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설천위는 돌을 대충 품 안에 챙기곤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그를 기다리던 남궁천이 웃으며 설천위에게 말했다.
“무림맹에서 자네들을 호출했네. 이번에 일어난 사건의 상을 준다더군.”
“그래? 거, 귀찮게 그냥 보내 주면…….”
툴툴거리던 설천위는 이어지는 남궁천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맹주께서 직접 주신다더군.”
……그건 별로 좋지 않은데?
천천히 고개를 돌린 설천위의 눈에 들어온 현태중.
심장을 꿰뚫었던 검은 뽑힌 지 오래지만, 그 기억까지 흐려지진 않았는지 그의 표정은 한없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