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178화 (178/624)

제178화

177화-따님을 제게 (2)

오존(五尊), 삼왕(三王), 이괴(二怪).

천하 십대 고수.

이 무림에서 가장 강한 이를 열 꼽았을 때 나오는 이름.

물론,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천하 십대 고수라고 한들 그 이름이 절대적인 건 아니란 것을.

화경 수준인 삼왕(三王)과 이괴(二怪)는 화경 중에서도 강한 편이지만, 화경급 고수라면 이 무림에도 꽤 많은 수가 있다.

당장 무림맹의 단주들이 그렇고, 은퇴하여 쉬고 있거나 소백진처럼 큰 소란 없이 살다가 간 이들도 있으니까.

격이 다른 건 오존(五尊)이라고 묶이는 이들뿐.

정존(正尊) 심유.

사존(邪尊) 구령학.

북존(北尊) 설주철.

살존(殺尊) 무이.

불존(佛尊) 법신.

이 다섯은 화경보다 위의 경지에 올랐음을 무림에 증명한 이들이다.

현경(玄境).

진정한 인외의 괴물.

따라서 이 다섯을 오대 고수라 묶으며, 삼왕과 이괴와는 구분을 두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삼왕과 이괴는 왜 따로 묶은 것일까?

화경급 고수는 그들 이외에도 알려진 이들만 열이 넘는데?

그들의 특징은 하나다.

전쟁에서 화경급 고수의 목을 벤 자들.

즉, 화경 내에서도 상위에 있음을 증명한 자들.

같은 화경급 중에서도 반 수 이상 위에 선 자들.

“나를 아나?”

그렇기에 권왕이라는 호칭에 고개를 돌린 서청진을 향해 설천위는 포권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설주철의 아들 설천위가 인사드립니다.”

“아, 설 형의 자식인가. 나이를 보면 네가 막내겠구나.”

고개를 끄덕인 서청진은 이내 설천위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딸이 어디 있냐고 묻긴 했으나, 사실 어디쯤에 있는지 정돈 알고 있었으니까.

그의 시선이 서하영에게로 향하자, 유예린과 대화를 나누다가 깜짝 놀란 서하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아빠!”

“……녀석.”

아빠라는 호칭은 마음에 드나, 이런 자리에서 쓰는 것은 싫은 것일까.

기묘한 표정을 짓는 서청진의 모습에 설천위는 더욱 미간을 구겼다.

‘권왕에게 딸이 있단 소리는 못 들었는데?’

권왕(拳王).

주먹 하나로 가문을 일으켜 세운 거인.

본인도, 그 자식들도 주먹 이외엔 그 어떤 무기도 쓰지 않는다.

심지어 게임 속에서 마주했을 때, 무기를 쓰지 않는 것만으로 그에게 상당한 호감도를 얻을 수 있다.

좋게 말하면 두 주먹만을 믿는 우직한 남자.

나쁘게 말하면 주먹밖에 모르는 외골수 인간.

‘……이거 괜찮나?’

게임 속에서 서하영이 왜 이름을 버리고 창절로 활동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빠가 권왕인데, 주먹에 소질이 없어서 권법을 버리고 창을 쓴다?

여러모로 문제가 있을 만하다.

그리고.

“……사실인 것 같구나.”

서하영의 옆에 놓여 있는 창을 확인한 서청진의 표정이 굳어진다.

“아, 아빠 이건…….”

“아니,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고개를 젓는 서청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하영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서 동생!”

달린다.

미친 듯이.

단련된 다리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속도로 그 자리를 빠르게 이탈하는 서하영.

그 뒤를 살짝 눈치를 본 유예린이 따라간다.

차마 그 속도를 따라잡을 엄두가 안 난 소윤혜는 얌전히 자리에 앉아 상황을 관찰했고.

“……이 녀석이.”

자신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도망간 서하영의 모습에 미간을 찡그린 서청진이 그녀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 한 걸음을 옮기는 순간.

“철백이라고 합니다.”

그 앞을 막아선 철백이 당당하게 포권…….

‘……절?’

웬 절?

“아버님께 인사드립니다!”

절과 함께 외치는 철백.

그리고 순식간에 험악하게 변하는 공기.

‘요, 용자다.’

‘역시 철 형!’

무려 권왕.

그 권왕에게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패기라니!

같은 남자로서 그 용기에 설천위와 주현운이 진심으로 감탄하는 사이, 꿈틀거리며 치솟은 눈썹과 함께 서청진의 눈이 철백을 훑었다.

그리고.

‘……왜 조금 부드러워지는데?’

단련된 몸 때문인가?

하긴, 철백의 몸은 너무 거대해 무복을 뚫고도 그 존재감을 뿜어내니 화경급 고수의 안목이면 단번에 알 수 있는 수준이긴 하지.

하지만 개인적인 호감과는 별개로, 일단 상황 자체가 좋지 못해서 그런지 서청진의 미간은 여전히 일그러진 채였다.

“따ㄴ……!”

순간.

공간이 터져 나갔다고, 설천위는 느꼈다.

설천위만큼, 아니 어떤 의미로 더 뛰어난 눈을 가진 주현운은 경악했고.

둘보다 조금 늦게 상황을 인지한 소윤혜의 표정이 창백해진다.

그리고.

“……노오오오옴!”

분노를 터트리는 서청진의 호통과 함께 사라진 철백이 무너진 담에서 걸어 나온다.

“……님을 ㅈ……!”

하던 말을 이어 가려 했지만, 전부 끝맺지 못하고 또다시 사라지는 철백.

동시에, 서청진마저 완전히 모습을 감춘 것을 깨달은 설천위는 마른침을 삼켰다.

[허허, 저 친구 성격은 여전하군.]

“……아는 사이세요?”

[물론이다. 옛날에 같이 전장에도 섰던 전우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현태중.

잘 웃지 않는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 광경이 상당히 반갑다는 뜻이다.

“……그럼 서 소저가 딸인 것도 알고 있었겠네요?”

무공을 알고 있을 테니까.

[물론이다.]

“근데 왜 말 안 해 줬어요?”

[굳이 해 줄 필요가 있나?]

아.

이 인간, 그런 인간이지.

안 물어본 건 굳이 안 알려 주는 타입.

한숨과 함께 미간을 찡그린 설천위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 자리에 앉았다.

그 철백이고, 그 권왕이다.

“뭐, 죽진 않겠지.”

“……진짜요? 저거 안 죽는 거 맞아요? 제가 맞았으면 즉사였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명색이 권왕인데 힘 조절은 했겠지. 그렇죠?”

[…….]

어이, 왜 대답이 없어?

당신, 옛 친구에 대한 믿음이 겨우 그 정도야?

침묵하는 현태중의 모습에 주현운의 불안감이 점점 상승하던 순간.

“허허, 벌써 일을 치른 건가?”

“학관장님?”

“수련 중에 소란을 일으켰구나. 내 대신 사과하마.”

허허, 웃으며 다가온 팽후는 자리에서 일어난 설천위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신을 가장 많이 닮은 딸을 채 간 녀석이니 화가 날 법도 하지.”

“……그 정도 수준으로 평가해도 되는 겁니까, 저거?”

“뭐, 철백 그 아이라면 충분히 견디지 않겠나?”

아니, 걔 말고 누가 버텨 저걸?

설천위와 주현운이 몸을 부르르 떠는 순간.

“……가장 닮은 딸이요?”

이상한 점을 눈치챈 소윤혜의 질문에 팽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닮았지.”

“하지만…….”

“주먹에 소질이 없지 않으냐고?”

“……네.”

살짝 기죽은 소윤혜의 대답에 팽후는 웃으며 서청진과 철백이 나간 무너진 담벼락을 바라봤다.

“지금은 상당히 덜해졌지만, 옛날부터 저 친구는 무기를 싫어했지. 그 이유를 아나?”

“……그냥 주먹을 쓰는데 자부심이 강해서 그런 거 아닌가요?”

“아닐세.”

고개를 저은 팽후는 세 사람을 보며 웃었다.

“자네들도 그렇겠지만, 무인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무기도 조금씩 손에 쥐어 보지.”

“네, 그렇죠?”

사용법을 조금이라도 더 알아야 상대할 때 수월하니까.

“재능이 없더군.”

“……네?”

“저 친구, 주먹 이외엔 그 어떤 무기도 다루지 못하네.”

……응?

“아니, 그게 말이 되나요? 만류귀종이라고 화경급이면…….”

“말이 되네. 저 친구는 스승이 없으니까.”

“……예?”

잠깐.

이거…….

“주먹을 쥐고 전장에 선 순간, 주먹을 쓰는 법을 깨달은 무인.”

……많이 본 것 같은데?

“어떤가, 똑 닮지 않았나?”

“……창을 쥔 순간, 창을 쓰는 법을 깨달은 누구랑 정말 닮았네요.”

“우리는 재능이 너무 한 곳에 몰려서 다른 부분에 재능이 없는 거라고 놀려 댔지.”

……그것도 우리랑 좀 비슷하네.

물론 그러고 나면 대련에서 창이 좀 더 매서워졌지만.

“그러고 나면 대련할 때 꼭 더 주먹이 매서워지더군.”

“……그것마저 닮았네요.”

“하하하, 그런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팽후.

잠시 옛 추억을 떠올리며 웃던 팽후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래도 나름 정도를 걷는 친구니 딸 도둑이 나타났다고 해도 죽이진 않을 걸세.”

“아마도요?”

“그래, 아마도. 뭐, 철백 그 아이라면 죽지도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뭐,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그러면 서하영은 어찌해야 하나.

“그럼 권법을 버렸다고 뭐라 하진 않겠죠?”

“뭐라 해? 저 딸 바보가? 밖에서는 최대한 그걸 숨기는 척하는 저 바보가? 어림도 없지.”

……그 정도야?

아니, 그럼 게임 속에서 창절은 왜 이름까지 버리고 연을 끊은 거야?

“딸이 직접 연을 끊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 결코 먼저 선을 그을 인간은 못 되지.”

“아.”

……제 발 저린 서하영이 먼저 선수를 쳤고, 그거에 충격을 받은 서청진이 그냥 받아들였다는 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로 부모 자식 간에 연을 끊어?

설천위가 미간을 찡그리는 사이, 팽후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무엇보다, 그 친구는 딸이나 자식에게 뭐라 할 자격이 없어.”

“예? 왜요?”

“저 친구, 본인은 너무 당연하게 깨닫고 사용하는지라 가르치는 데는 영 소질이 없거든. 무공을 이어받은 아들 녀석들이 되레 대견할 정도지.”

아!

“……서 동생도 가르치는 건 서툴죠.”

“촤라락 팍! 이게 뭔지 나는 아직도 이해를 못 했어.”

“전 이해했는데요?”

주현운, 이 새끼?

눈치 좀 챙겨라.

“촤라락 팍, 을 이해 못 한 건 설 소협이 유일…….”

“그래! 나만 재능 없다!”

주현운은 자기편이다. 이거지?

주현운의 편을 드는 소윤혜가 혓바닥을 살짝 내밀며 웃자, 설천위는 고개를 돌렸다.

“그럼 걱정할 필요 없겠네요.”

“음, 그러니 수련이나 하게. 아, 하지만…….”

살짝 말꼬리를 늘리며 설천위를 바라보는 팽후.

그 시선에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설천위는 피식 웃는 팽후의 모습에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무례한 건 알았지만, 그 시선이 뭐랄까…….

“왜요?”

“음, 자네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거야.”

“네?”

“자식에겐 한없이 엄해도 또 이게 남에게 맞고 오면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이 부모란 존재라, 이 말이다.”

……예?

그게 무슨?

“뭐, 머지않아 알게 될 걸세.”

툭툭 설천위의 어깨를 두드린 팽후는 그대로 몸을 돌려 훈련장을 나갔다.

“그럼 뭔가 문제가 생기면 찾아오도록.”

……그냥 가는 거야?

철백을 따라간 저 아저씨 말리러 안 가?

느긋한 걸음으로 사라지는 팽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뚫려 버린 담벼락을 바라본 설천위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이나 하자.”

알아서 하겠지 뭐.

* * *

무림맹 대회의.

일주일에 한 번.

맹에 머물고 있는 모든 단주급이 모여 여는 회의.

“흐음? 무림학관? 걔들이야 뭐, 크게 신경 쓸 필요 있나?”

“적당한 재난은 학생들의 성장에도 도움이 될 텐데요.”

누군가 보인 느긋한 반응에 또 다른 사람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맹에 들어올 무인을 기르는 곳이 아닌가.

이런 사건은 오히려 환영해야 할 입장 아닌가?

“헛소리! 아직 아이들일세! 보호받으며 성장해야 할 시기 아닌가?”

“흥, 그래서? 그렇게 샌님처럼 커서 들어온 놈들이 맹에 적응하려면 또 연 단위의 세월이 필요한데 그럴 거면 학관은 무슨 필요야?”

“그렇다고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새싹들을 외부의 위협에 그냥 방치해 두자는 건가?”

“어차피 클 놈은 크게 되어 있어! 괜히 감싸고돌아 봤자 쭉정이들이 양분만 빨아 갈 뿐이라니까!”

“아니, 이 인간이?! 정파의 기둥이 되어야 하는 인간이 학생들에게 쭉정이라니!”

“기둥이고 나발이고 현실을 직시해야지!”

순식간에 갑론을박하며 시끄러워진 회의실에서 총군사(總軍師) 제갈진천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단주들은 항상 이렇다니까.

전장을 겪은 세대가 많은 현 단주들은 실용론을 중시하는 이들이 많다.

정파의 자존심보다 실질적인 이득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이들.

그런 실용파와 반대로 어떤 이유든 간에 정파로서의 가치를 잃어서는 본말전도라고 말하는 본질파.

실용파는 그들을 이상론자라고 비난하지만…….

‘장기적 안목으로 보면 반드시 필요하긴 하지.’

정파가 이리 큰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던 건 민심을 얻을 수 있는 그 본질에 있으니까.

양쪽의 말이 모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제갈진천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여태껏 침묵하고 있는 사내.

정존(正尊) 심유.

정파의 기둥.

무림맹의 맹주.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허허, 그럼 일단 줘야 할 상부터 주는 게 어떤가들?”

“상이요?”

“있지 않은가? 상을 받아야 할 아이들이.”

맹주의 물음에 몇몇 단주들은 미간을 찡그렸고, 그 의도를 깨달은 단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 단주들이 찬성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맹주는 웃으며 제갈진천을 바라봤다.

“이번 학관 사건을 해결한 학생들을 부르게.”

학관을 그대로 둘지, 개편할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판단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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