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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174화 (174/624)

제174화

173화-혈계(血計) (3)

“공자!”

갑작스러운 변화.

인간의 몸에선 나올 수 없는 어마어마한 양의 피가 설천위를 감싸는 모습에 유예린은 즉각 반응했다.

침착하게 상대를 제거해 나가던 손속이 잔인함을 더해 더욱 날카로워진다.

정말로 철저하게 인간의 숨통을 끊는 것에만 집중한 공격.

상대하는 적은 순식간에 상처가 늘었고, 금세 목을 내어줬다.

허나.

“버텨라!!”

악을 쓰며 달려드는 이들도 인간이다.

누군가는 그들의 목숨이 터럭만큼의 가치도 없다고 비하하겠지만, 지금 그들의 목숨엔 최소치가 있었다.

“……비키세요.”

유예린을 막아 냄으로써 벌어 내는 아주 잠깐의 시간.

그 시간이 그들의 목숨이 만들어 내는 최소한의 가치였고.

“단장의 희생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마라!!”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가치에 만족하고 있었다.

악을 쓰며 달려드는 상대의 모습에 유예린은 더욱 날카롭게 검을 휘둘렀다.

조금 전과는 입장이 역전된 순간.

허나.

‘……진정해.’

흔들려선 안 된다.

가장 최악의 수는 자신이 이들에게 당하는 거다.

진짜 필요한 순간에 설천위를 구할 수 없게 되는 거다.

그러니 지금은 침착하게 나아갈 때다.

설천위를 믿고.

자신이 도착하기 전까지, 그가 버텨 주리라고 믿고.

수많은 사선을 넘고,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한 그의 시간을 믿고.

버텨 줄 것이다.

그리 확신한 유예린은 설천위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눈앞의 적들을 제거하는 것.

유예린의 검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고.

쾅!!

철백의 주먹에도 힘이 더해졌다.

그렇게 조금씩 설천위를 중심으로 모이면서 적들을 상대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이것 봐라?’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고 있었다.

* * *

“어머어머, 너무 거치네. 오빠.”

“……역겹군.”

살짝 웃으며 양팔을 가슴 앞으로 모으는 언여휘의 모습은 객관적으로 보면 귀엽기 그지없었으나, 팽후는 진심으로 역겹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몸에서 풍기는 피 냄새조차 지우지 않고……. 나잇값을 못 하는군.”

“어머? 얘는? 원래 여인은 언제나 소녀인 법이에요!”

참내.

“대체 결혼은 어떻게 했대?”

여심도 모르면서.

팽후의 딱딱하기 그지없는 눈빛을 마주하며 언여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상관없다.

남아 있는 혈강시는 셋.

나가려는 팽후의 발을 붙들기엔 충분한 숫자다.

뭐, 그새 둘이나 줄어 버린 걸 보면 이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그리 길게 이어지진 않을 거다.

오래 싸우진 못할 테니까.

그렇게 조정해 놨으니.

“조금만 더 이야기하자?”

“……짜증 나는군.”

칭얼거리면서도 꿋꿋하게 거리를 벌리는 언여휘를 보며 팽후는 오랜만에 진심으로 짜증이 났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진 모르겠으나, 자신조차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할 정도의 진법.

옆에 있는 백화단주가 그나마 술법으로 진법을 밀어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정말 하루 종일 붙잡혀 있었을 거다.

혈강시 따위에게 당하진 않았겠지만, 감각이 마비된 상태에서 그들을 빠르게 정리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이건 반대로 말하면.

‘……최소 우리와 동급.’

분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반수 이상 위일 수도 있다.

짜증과 분노, 그리고 경계심을 가득한 눈빛으로 팽후는 언여휘를 바라봤다.

술법이라는, 전혀 다른 영역에 걸쳐 있는 인간이지만 그 수준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무엇보다.

“……흠.”

옆에서 차분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는 백화단주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만약 적당한 수준의 상대였다면 이런 진법 따위 백화단주가 진즉에 힘으로 찍어 눌렀을 터.

전대 백화단주가 급사해 젊은 나이에 백화단주의 자리에 오르긴 했으나, 지금 그녀가 백화단주라는 사실에 불만을 품은 이는 아무도 없다.

진작에 실력 증명이 끝났으니까.

그런 그녀가 이리도 깊게 고민하는 것을 보면, 눈앞에 있는 저 노괴의 술법이 얼마나 수준 높은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허나.

“이 이상 시간을 끌 생각은 없소.”

나가고자 마음먹었으나, 노괴의 대응에 막혀 버린 시간이 이미 일각이 넘어섰다.

이젠 혈강시를 무시하고서라도 나갈 필요가 있다.

이자의 목표는 너무나도 뚜렷했으니까.

설천위.

술(術)에 재능을 가진 아이.

탐내는 것인지, 파괴하고자 하는 것인지까진 모르겠으나.

즉시 대응할 필요가 있다.

“강제로라도 뚫겠소.”

조심스럽게 접근하려는 백화단주를 배려해 지켜봤지만, 이대로 가다간 한세월이 지나도 이곳을 못 나갈 것 같았다.

결심을 굳힌 팽후의 최후통첩에 진법을 살피던 백화단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 진법, 아니 결계는 자신의 힘만으로 해결하려면 긴 시간이 걸릴 것 같았으니까.

‘이만한 결계라……. 역시 대단하군요.’

진법과 결계.

그 차이는 간단하다.

진법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공간을 비트는 것이고.

결계는 술법을 이용해 공간을 비트는 것이다.

당연히 농밀함이나 위력은 결계가 위지만, 범위는 단연코 진법이 한 수 위다.

준비만 확실하면 작은 성조차도 감쌀 수 있는 것이 진법이니까.

거기에다 유지력도 진법이 훨씬 앞선다.

술법을 이용한다는 것은 곧 영력을 사용한다는 것.

범위가 넓을수록, 위력이 강할수록 소모되는 영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런데 이렇게 강당 주위를 전부 감싸는 수준에다 팽후와 자신을 붙잡아 둘 정도의 결계라면…….

‘대체 몇 명이 이 결계에 희생됐을까요.’

보통의 개인은 도저히 펼칠 수가 없다.

그리고 언여휘 정도 되는 자라면 펼칠 순 있겠으나, 그 안에서 전투는 무리겠지.

즉, 이 결계를 위해 제물을 사용했다는 거다.

대체 몇이나 죽었을지 모르겠지만.

“보조하겠습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니 어쩔 수 없다.

그저 밟고 지나가는 수밖에.

그 원념은 저자의 죽음으로 갚아 주면 될 일이다.

뜻을 정한 백화단주는 즉시 부적을 던졌다.

“뇌명(雷鳴).”

사방으로 흩어진 부적이 작은 번갯불과 함께 불타서 사라진다.

그리고.

우르릉.

하늘이 뒤흔들리는 소리가 지척에서 터져 나온다.

공간 전체를 뒤흔드는 것 같은 굉음.

“어머?”

그 속에서 백화단주가 무엇을 하는지 깨달은 언여휘는 고개를 저었다.

“참 우아하지 못하네. 무식하게 힘으로 뚫으려고?”

“우아함으로 아이들의 목숨을 지킬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러겠으나, 현실이 그렇지 못하군요.”

언여휘의 말을 받으며 백화단주는 팽후의 등을 바라봤다.

중단으로 도를 쥔 채, 움직이지 않는 팽후.

그것이 준비 자세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도왕(刀王).

이미 수십 년 전에 그 칭호를 받은 거인.

그 등에서는 그야말로 태산조차 짓누를 것 같은 무시무시한 기세가 뿜어져 나온다.

진심.

경지에 오른 무인의 진심이란 이리도 크고 무겁다.

팽후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한 수를 준비하던 그때.

‘……혈향?’

콧속을 찌르는 기이한 냄새에 백화단주는 미간을 찡그렸다.

비릿한 철의 냄새.

자신은 그리 자주 맡진 않았으나, 나름 익숙한 냄새다.

그런데.

‘다르군요.’

여태까지 혈강시나 저 노괴에게서 나던 냄새와는 다르다.

좀 더 깊고.

좀 더 진한.

원초적인 불쾌감을 자극하는 그런…….

“……빠르네?”

놀라는 듯한 언여휘의 반응.

그 반응에 백화단주는 미간을 찡그렸고.

“진짜? 꺄하하하하! 진짜네? 진짜야! 벌써 죽였다고? 어떻게? 아니, 무인으로서도 일품이라는 건가?”

미친년처럼 웃는 언여휘의 모습에 백화단주는 더욱 깊게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일이 썩 좋은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진 않은 것 같네.

“꺄하하하! 이건 진짜 예상 밖인데……!”

격렬한 웃음과 함께 언여휘가 양팔을 뻗었다.

양손에 들린 몇 개의 부적.

“아무래도 이 이상 안 놀아 줘도 될 것 같네!”

입꼬리를 비틀며 언여휘가 부적을 흩뿌린다.

고작 셋 남은 혈강시에 덕지덕지 붙기 시작하는 부적들.

“흡!”

파직.

그리고 그 부적을 불태우는 번개.

“어머?”

“쓸데없는 저항은 사절입니다.”

언여휘의 행동을 막은 백화단주는 담담하게 부적을 꺼내 그녀를 노려봤다.

“공격 술법은 제가 훨씬 위인 것 같군요.”

“응, 아마 그럴걸? 나, 직접 공격은 특기가 아니야.”

흔쾌하게 긍정하며 어깨를 으쓱이는 언여휘.

“그런데, 그게 없더라도 충분…….”

능청스럽게 웃는 언여휘의 목소리가 늘어진다.

그리고.

털썩.

목이 잘린 세 구의 혈강시가 쓰러지고, 마찬가지로 목이 잘린 언여휘의 몸이 땅을 굴렀다.

“……어머?”

목이 잘린 상태로 눈을 크게 뜨는 언여휘.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도(刀)를 집어넣고 있는 팽후에게로 향했다.

“……팽가에서 언제부터 쾌도(快刀)를 썼대?”

“우리는 모든 것을 쓴다. 단지 성격상 부수는 것을 더 좋아할 뿐이지.”

분신의 파괴와 함께 흐트러지는 결계.

점점 기감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팽후는 목이 잘린 언여휘를 바라봤다.

“네년의 생각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후후, 과연 그럴까?”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언여휘는 팽후를 올려다봤다.

“이미 반쯤 그렇게 됐는데?”

그녀의 미소와 함께, 짙은 혈향이 학관을 뒤덮기 시작했다.

“내가 뿌린 씨앗은 이미 싹트기 시작했다고?”

* * *

“크아아아아!!”

발작.

제압했던 소정회(素正會) 인원들을 관리하던 학생회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제압하세요!”

“미리 속박해 놓으라니까요!”

갑자기 전신이 붉게 변하며 발작하는 이들을 힘으로 억누르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거기에다.

“끄아아아아악!!”

소정회(素正會)에 속해 있지 않던 다른 학생들 중에서도 발작하는 이가 나타났다.

그것도 한두 명 수준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숫자가.

“대체 이게 무슨……!”

밖으로 나와 상황을 파악한 혜송은 속으로 부처를 찾았고…….

“어찌…….”

그들이 약에 손을 댔음을 깨달은 혜송은 그저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힘을 증가시켜 주는 약이라니.

분명 큰 부작용이 있을 거란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대체 왜 이리도 많은 이들이…….

학관의 치열한 경쟁이 가져온 폐해를 몸을 직접 체감하며 혜송은 입술을 깨물었다.

“발작이 일어난 학생들을 전부 약제당으로 옮기십시오!”

일단, 조치를 취하자.

원인 규명과 해결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자신의 지시에 따라 발작을 일으킨 학생들을 챙기는 학생회 임원들을 바라보면서 혜송은 고개를 숙였다.

“아미타불…….”

대체 이 학관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 * *

혈기(血氣).

보통 원기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이 단어는 무림인들에겐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피를 이용해 쌓은 내공.

즉, 사파의 무공 중에서도 상당히 잔악한 방법으로 쌓은 힘을 가리킨다.

거기에다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쌓은 힘이다.

필연적으로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힘.

그런데 그 부작용을 최소화하거나 아예 역으로 이용하는 이들이 있다.

혈교나 혈사련은 말할 것도 없고.

술법을 다루는 술사 중에서도 그런 이들이 있다.

그리고.

언여휘는 그런 술사들 중에서도 최상급.

그야말로 최상위에 선 술사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이용해 수도 없는 실험을 반복함으로써 무시 못 할 경험과 힘을 쌓았다.

그야말로 노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은, 진짜 괴이에 걸맞은 수준으로.

자신만만할 법도 했다.

그녀가 쌓은 술(術)의 경지는 그야말로 초인의 영역에 도달해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녀가 만든 혈기(血氣)는 내공이라기보다는 술법으로 만들어 낸 영력에 가깝다.

여기서 그녀의 실수가 나타난다.

만약, 내공과 같은 혈기였다면 오히려 설천위가 힘을 쓰지 못했을 수도 있으나.

술법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크아아아아!!”

유예린과 철백, 주현운이 상대하던 이들이 갑자기 발작과도 같은 폭주를 시작했다.

설천위가 완전히 혈기에 휩싸인 뒤에 나타난 현상.

갑자기 멈춰 괴성을 지르는 사람들의 중심.

검붉은 혈기에 휩싸인 설천위가 담담하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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