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172화-혈계(血計) (2)
동귀어진(同歸於盡)의 각오.
모든 것을 다 걸고 죽음으로 향하는 각오.
그것이 만들어 내는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크다.
방어를 포기하거나 혹은 최소화함으로써 공격은 더욱 과감해진다.
과감한 공격은 상대의 허를 찌를 가능성이 더욱 커지고, 허를 찌르기에 성공하면 상대를 확실하게 죽음으로 이끌 수 있다.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전투에서 방어를 포기한다는 것은 그만큼 큰 가치를 지닌다.
하물며 그게 서로 비슷한 실력 간의 싸움이고, 상대는 목숨을 버릴 생각이 전혀 없다면야…….
“카합!!”
상대는 방어 태세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장소춘이 휘두르는 검이 거세게 설천위의 도 위를 두드린다.
그야말로 거센 폭풍.
뛰어난 육체적 능력을 바탕으로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장소춘의 공세는 진정 거친 폭풍과도 같았다.
약의 효과로 극대화된 육체는 관절의 부담조차 무시한 채 극악의 움직임을 펼친다.
검의 궤적이 자유자재로 변하는 것이 그 증거다.
본디 검의 궤적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것은 몸에 큰 부담을 준다.
그냥 꺾는 것뿐이라면 가능하겠으나 힘을 유지하거나 혹은 더하면서 검의 궤도를 꺾는 것은 무릎과 허리, 어깨와 손목 등에 크나큰 부하가 걸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변검(變劍)이라 부르며 궤적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검을 하나의 무학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 부담을 최소화하거나 무마할 방법을 찾아냈다는 소리니까.
그렇기에.
[조잡하구나!]
웬일로, 현태중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변검 같지도 않은 변검을 목격한 탓일 터.
[보통의 무인이었다면 첫 공격에 무릎이 완전히 나갈 만한 방식이다.]
혀를 차며 고개를 젓는 모습이 정말로 마음에 안 드나 보다.
물론.
“바쁘니까 나중에!”
그 말을 들어 줄 여유 따윈 없지만.
‘빌어먹게 빠르네!’
이게 약발?
이게 도핑?
게임 속에서 꽤 강해지는 걸 보긴 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눈앞에서 마주하니 그 차이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냥 강해졌다는 말로 끝이 아니었다.
크게 증가한 근력은 단순히 위력이 증가한 것을 넘어서서 속도까지 엄청나게 빨라진다.
거기에다 감각의 둔화로 관절의 부담조차 무시하는 움직임.
아마 이 싸움이 끝나도 이 녀석은 남은 삶을 정상적으로 살 수 없을 거다.
“미친놈……!”
“하! 광인이 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선 정의(正義)를 좇을 수 없다!”
설천위의 말에 격렬하게 반응하며 장소춘은 자세를 낮췄다.
그래.
미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이 넓은 무림의 반 이상을 점령한 것이 무림맹이다.
기득권의 덩어리들이 모여 만들어 낸 거대한 산.
그들은 정의(正義)라는 두 글자를 내세워 방패로 삼고, 그 뒤에서 권력을 마구 휘두른다.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마 평생을 가도 절대 이길 수 없겠지.
그렇지만.
“발악하는 것은 할 수 있다!”
단숨에 땅을 박찬 장소춘의 검이 사방을 점하며 설천위를 압박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란격석(以卵擊石)이라고 비웃겠지.
계란을 아무리 던져도 바위를 부술 순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순 없다.
저항이란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니까.
계란으로 더러워진 바위를 보고 누군가가 치워 주기를 바랄 수밖에.
그러니.
“우리는 끊임없이 몸을 내던질 것이다!”
미친 자라고 손가락질을 받아도.
헛수고라고 비웃음을 당해도.
기꺼이 이 목숨을 내던지리라.
공세를 전부 받아 내는 설천위에게서 한 번 더 거리를 벌린 장소춘은 다시금 자세를 낮췄다.
충분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육체에 적응했다.
거기에다 설천위의 반응 속도까지 확인을 끝냈다.
입으로 벌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했으니…….
‘끝내 주마!’
더 이상 길게 끌 필요가 없다.
단숨에, 그 목을 베어 내리라.
한껏 낮춘 자세에서 장소춘의 발가락이 꾹 대지를 누른다.
일순.
단 일격이면 된다.
‘꿰뚫어 주마!!’
그리고 장소춘의 신형이 늘어진다.
초고속.
극한까지 올라간 속도가 장소춘의 모습을 마치 길게 늘어진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키이이이이이이잉!!
기와 기가 갈려 나가는 굉음이 훈련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 순간, 자신의 공격이 막혔다는 것을 깨달은 장소춘의 표정은 딱딱하게 변해 있었고…….
“흠.”
당연하다는 듯 그의 공격을 받아 낸 설천위는 냉정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단에서부터 위를 향해 올려치는 듯한 찌르기.
자세를 낮춘 것은 완벽한 각을 잡아내기 위해서다.
인간의 허점이 되는, 사각을 찌르기 위해서.
그런데.
“……어떻게?”
어찌 이리도 완벽하게 막아 낼 수 있단 말인가?
상체를 꺾는 것과 동시에 검을 흘려 내는 완벽에 가까운 대처.
이런 방식으로 파훼 당하는 순간…….
“응. 다 아는 수가 있거든.”
완벽하게 공수가 전환된다.
검을 흘려 낸 설천위는 그대로 도를 내리찍는다.
짧은 대화.
그 동안 장소춘은 이미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아마 말 그대로 극한까지 끌어올린 속도 때문에 그 여파로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겠지.
그러니.
완벽한 기회다.
빗겨 흘린 검에서 떨어진 도가 궤적을 그린다.
단숨에 목을 베어 내기 위한 궤적.
그 궤적의 시작을 본 순간, 죽음이 찾아올 것을 예견한 장소춘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을 정도로 그 궤적은 정갈했다.
허나.
‘죽지 않는다!’
이렇게 죽을 순 없다!
최소한 팔 한쪽이라도 가져가야 자신의 뒤를 이을 자들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환경에서 활동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진정한 정의를 위하여!!”
떨어지는 궤적을 향해 장소춘은 억지로 몸을 밀어 넣었다.
빠르다.
그러나 결코 피할 수 없는 속도는 아니다.
하지만, 이 몸뚱이가 반으로 갈려도 이 검은 닿을 수 있다.
베어 낼 수 있다.
그렇기에 장소춘은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고…….
“아, 미안. 이것도 알고 있었어.”
설천위는 당연하다는 듯 검을 피해 냈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휘두르던 도를 거두면서.
“음, 뭐, 대략적인 거라도 알고 있으니 상당히 편하네.”
아래에서 찔러 오는 방금의 공격도 이미 알고 있었으니 피하기 훨씬 수월했고.
아마 그냥 싸웠으면 현태중이나 소백진 둘 중 하나는 불러내야 했겠지.
회수한 도를 다시금 뻗으며 설천위는 웃었다.
아쉽게도, 궤적이 틀어져 단숨에 목을 벨 순 없게 됐지만…….
“그럼 일단 나도 팔 하나 가져가 볼까?”
팔 하나 정도야 충분히 가져올 수 있지.
* * *
“무슨 생각이지?”
강당 밖, 작은 숲.
이미 수십 그루의 나무들이 쓰러지고, 곳곳의 땅이 파인 난장판이 된 곳에서 팽후는 싸늘한 목소리로 소녀를 노려봤다.
“이딴 장난감으로 나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으음……. 사실 잠깐 정도는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누가 삼왕(三王) 중 1인, 도왕(刀王) 팽후(彭厚) 아니랄까 봐.
드높은 명성에 비해 무림학관의 학관장이라는 자리를 십수 년째 맡고 있는 탓에 그의 무력을 평가절하 하는 이들도 많지만…….
‘……이 괴물, 더 강해진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런 놈들의 눈은 전부 옹이구멍인 것 같다.
뭐, 사실은 그리 강하지 않아 무림행을 안 한다는 둥, 팽가의 권력으로 만들어 낸 허상이라는 둥.
헛소리를 하는 놈들은 전부 이 팽후를 눈앞에서 직접 본 적이 없는 놈들일 거다.
이런 괴물의 평판에 어찌 거품이 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혈강시의 반 이상이 벌써 활동 불가라…….’
괴물도 이런 괴물이 없다.
화경의 고수조차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며 데려온 녀석들인데.
솔직히, 이기진 못해도 꽤나 길게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었다.
물론, 팽후 혼자만의 능력이 아니긴 하다.
“꽤나 실력이 많이 늘었네?”
“……나를 아는 것 같군요. 그리고 기이하게도 저도 당신의 얼굴이 낯익습니다.”
술법으로 강시들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자신까지 상대한 백화단주를 칭찬하며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지. 네가 똥오줌도 못 가리던 시절부터 알았으니까.”
“……과연.”
“어머, 안 놀라? 뒤에 준비한 말도 있는데. 네 스승이 막아서 아쉽게 못 건드렸다는.”
“대충 짐작이 갑니다.”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부적을 꺼내며, 백화단주는 소녀를 주시했다.
“스승님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아의 몸을 이용해 삶을 이어 나가는 노괴가 있다고.”
“후후, 덕분에 마음도 항상 소녀라고?”
까득.
당과를 깨무는 소리와 함께 소녀, 아니 노괴는 웃었다.
“그 아이가 너한테 그런 경고를 했을 정도라면, 그 아이가 죽기 전에도 네가 꽤나 강했다는 소린데…….”
말꼬리를 늘어트리며 노괴는 백화단주를 바라봤다.
“아쉽겠어? 스승의 죽음에 아무런 저항도 못 해 봐서? 그 아이, 죽을 때 꽤나 고통스러워했는데.”
“예, 압니다.”
노괴의 도발에 백화단주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본 스승의 마지막은 정말 끔찍했다.
강력한 주독(呪毒)에 당해 육체가 썩어 들어가며 정신조차 무너져 가던 모습.
제정신을 찾을 때마다 자신을 죽여 달라고 외치던 모습.
결국.
“너무나도 잘 압니다.”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었던 스승.
스승은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고 돌아왔었다.
이유는 하나.
알려 줘야 할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언여휘군요.”
조금 끊어지는 목소리에, 꾹꾹 눌러 놓은 분노가 새어 나온다.
허나.
평정심을 잃지 않고.
백화단주는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언여휘를 주시했다.
“진주언가의 역적, 수십의 가솔을 죽이고 탈주한 마귀.”
“어머, 칭찬은.”
“함정을 파 스승을 죽인 이들 중 하나.”
“잘 알고 있네?”
히히 웃으며, 언여휘는 물었다.
“그럼, 우리가 함정을 팔 수 있게 해 준 사람이 누군지도 알고 있겠네?”
함정이란 것은, 그냥 파 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상대를 그쪽으로 유인해야만 의미를 가지는 것.
그리고 그 유인책은…….
“예, 알고 있습니다.”
“에이, 뻥은. 알고 있으면 진즉에 무림맹에 피바람이 불었을 텐데.”
깔깔깔, 웃으며 언여휘는 그새 다섯 정도밖에 남지 않은 혈강시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니, 여인끼리 오붓하게 대화를 나누는데 남정네가 뭐 이리 열심히 움직이는지…….
“너, 분위기 파악 좀 해야겠어?”
“쓸데없는 헛소리는 그만하고, 슬슬 끝을 보자.”
쿵.
묵직한 걸음.
그 걸음에 언여휘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에이, 안 말려? 의미 없는 거 알면서.”
그리고 백화단주를 향해 던진 그 한마디에 백화단주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죽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유는?”
“어차피 분신일 테니까요. 당신 앞에 본체로 설 인간이었다면 이리 오래 살아 노괴가 되지 못했겠지요.”
“어머? 날카롭다, 얘?”
히히히 웃으며 언여휘는 새로운 당과를 꺼내 입에 넣었다.
“뭐, 그런 의미에서 대화나 좀 하자고? 내가 입을 열면 열수록 너희한테도 좋잖아?”
“뻔한 시간 벌이군. 쓸데없는 짓은…….”
“설천위.”
순간, 언여휘가 꺼낸 한마디에 말을 멈춘 팽후는 고개를 돌려 백화단주를 바라봤다.
동시에 고개를 돌린 백화단주와 눈이 마주친 팽후.
“나가지.”
“예.”
“어머? 역효과?”
담담하기 그지없는 두 사람의 반응에 꺄, 소리를 내며 양 볼을 손으로 감싸는 언여휘.
그 모습을 보며 팽후는 담담하게 도를 들었다.
“꺼져라. 네년의 계획에 놀아날 생각 따윈 없으니.”
* * *
“흠.”
도를 땅을 향해 늘어트린 채,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슬슬 그만하는 게?”
“……그럴 수 없다.”
“오른팔이 잘렸는데 뭘 더 하게?”
흐르는 피를 겨우 지혈한 장소춘은 왼손으로 어색하게 검을 잡으며 허리를 폈다.
“우리는 물러설 수 없다.”
“과정이 이미 정의롭지 않았기 때문에 정의로운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만이 유일한 속죄다.”
“!! ……네놈?”
자신이 할 말을 가로챈 설천위의 모습에 당황하는 장소춘.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미 진 거다.”
그런 장소춘을 보며, 설천위는 도를 뻗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고자 했다면 뒤를 돌아보면 안 되지.”
어색하게 휘두르는 장소춘의 검을 쳐 내며 설천위의 도가 장소춘의 목을 노리고 파고든다.
이제 끝이다.
그것을 직감한 장소춘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단장!!”
“한눈을 팔 때가 아닐 텐데요.”
장소춘의 죽음에 절규하는 적들을 향해 유예린의 검이 파고든다.
일말의 자비조차 없는 매서운 공격.
단숨에 둘의 목숨을 앗아 간 유예린이 남은 셋을 정리하기 위해 움직이려는 그 순간.
[위험하다!!]
천마의 외침에 유예린의 고개가 단숨에 돌아갔다.
그리고.
“……이건 예상과 다른데?”
베인 장소춘의 목에서 솟구친 막대한 혈기(血氣)가 설천위를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