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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172화 (172/624)

제172화

171화-혈계(血計) (1)

“생각보다 더 무겁군.”

폭음이 지나간 뒤.

담담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당당하게 검을 뽑고 들어온 사내가 미간을 찡그렸다.

“괴물 같은 놈.”

“고작 네놈 정도의 공격에 뚫릴 육체라면, 내 단련이 허술했던 거겠지.”

사내를 도발하며, 철백은 자세를 고쳤다.

“이 녀석을 구할 생각은 없나 보군?”

철백의 손에 머리통이 붙잡혀 흐느적거리는 정무회주.

방어의 순간에 생긴 충격으로 지금 정무회주의 몰골은 참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이곳저곳 생채기가 난 상태에다 먼지까지 뒤집어썼으니까.

조금만 더 더러워지면 거지랑 친구 먹을 수 있는 수준이다.

“우리는 언제나 숭고한 희생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다.”

“……얘는 딱히 아닐 것 같은데?”

얘가 그런 성격은 아닐 텐데?

철백의 손에 들려 있는 정무회주를 보며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다시 사내를 바라봤다.

검을 쥔 자세가 깔끔한 것이, 일단 정석으로 배운 자의 몸가짐이다.

몸의 중심이 안정되어 있고, 눈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도 묵직한 것이 제대로 된 정공의 무공을 꾸준히 쌓아 왔다는 증거다.

정파와 사파를 나누는 것이 무공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정파라는 말에 걸맞은 사람일지도?

뭐, 실제로도 그렇고.

“장소춘. 정백문의 장문 제자.”

“……네놈?”

“그 무공은 초절정에 오를 정도로 뛰어나나 기이하리만치 외부 활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지.”

“……그걸 공자가 어떻게 알고 있어요?”

“뭐, 어쩌다 보니 듣게 됐을 뿐이야.”

게임 속에서 봤지 뭐.

진의단을 이끄는 우두머리.

스스로를 단장이라 칭하며, 진의단을 통솔하는 그는 여러모로 뛰어난 인물이다.

정의감도 투철하고.

그렇기에…….

“어차피 말해도 안 들어 처먹을 테니 빨리 시작하자고?”

대화라는 수단이 통하지 않는다.

다른 음지의 조직과 달리 단(團)이라는 단어를 쓰는, 정의를 좇는 불나방들.

진천뢰를 들고 자살 테러를 감행할 정도로 정의를 갈망하는 자들.

그런데,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무엇이 바르고 옳은 것인가?

그 기준은 사람마다, 지역마다, 문화마다 다르다.

그리고 설천위가 아는 장소춘의 정의는…….

“역시, 네놈의 정파는 삐뚤어져 있다.”

“너만 하겠냐.”

정파, 구체적으로는 무림맹 전체가 악(惡)이다.

* * *

“이건…… 꽤나 독하네요?”

강당.

그곳에서 시작된 백화단주의 간자 색출은 참으로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부적을 감은 침을 찔러 넣고, 기이한 약까지 먹인다.

마시는 것을 거부할 수도 없다.

그 뒤에서 학관장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으니까.

마시지 않겠다고 거부했다가는 내 목이 몸과 붙어 있기를 거부하게 되겠지.

결국,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에게 술법을 펼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참으로 독해요.”

그렇게 해서 찾아낸 간자가 무려 셋.

심지어.

“전부 다른 곳에서 심은 자들이네요.”

“사파 쪽은?”

“없어요. 아마 학생이나 잡부 쪽에 있지 않을까요?”

“음.”

확실히.

백화단주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팽후는 의자에 앉은 채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세 사람을 바라봤다.

전부 안면이 있는 자들이다.

고작 이 정도의 일에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나약하진 않지만, 입맛이 씁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이들은 전부 풀어 줘도 되겠소?”

“네, 그러세요. 술법의 부작용 때문에 심적으로 많이 힘들 테니까요.”

인간의 내면을 억지로 끌어올리는 술법이다.

무림학관의 교관급이나 되니 술법이 끝나고도 움직이는 거지, 무림맹의 평무사 수준이라면 그냥 그대로 기절해서 한 이틀은 깨어나지 못한다.

“그럼 일단, 이걸로 문제는 해결됐군.”

“네. 그런데 생각보다 연락을 빨리 주셨네요?”

“학관의 자존심을 내세우기엔 상황이 좋지 못했소.”

남궁선이 드나들고, 좀 있으면 흑룡학관과 친선전이 열린다.

원래라면 긴 시간을 들여 압박해 간자를 찾아내는 방법을 취했겠지만…….

“지금은 몸 안의 고름을 쥐어짜는 데 힘을 쓸 때가 아니오.”

“그렇긴 하죠.”

무림은 넓고, 무인은 많다.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검을 휘두르는 자들이 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다.

거기에다 최근 몇 달간 벌어진 사건들.

“수많은 놈들이 움직이고 있으니, 우리도 대비하지 않을 수가 없소.”

혈교는 물론이고 혈사련, 사혈천이라는 자들까지.

예의 주시하고 대비해야 할 놈들이 한둘이 아니다.

뭔 놈에 피를 좋아하는 자들이 이리도 많은지.

“무림이란 곳에는 언제나 피가 낭자하지만, 최근엔 더욱 심해진 것 같소.”

“확실히 요즘 출동이 꽤 잦긴 하더군요.”

사파와 전쟁이 끝난 지금, 무림맹의 무인들이 하는 일 없이 놀고 있는 건 아니다.

비록 사파와 전쟁을 벌이진 않더라도 피에 미친 마두(魔頭)는 언제 어디든 있는 법이니까.

그런 녀석들을 찾아내서 잡고, 민생 유지에 힘쓰는 게 정파의 업 아니겠는가.

백화단은 그런 일에 직접 관여하진 않지만, 당장 한솥밥을 먹는 이들이 그 업에 충실한 자들이다.

그들의 출동이 잦아진 것만으로도 그 분위기를 충분히 읽어 낼 수 있다.

거기에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는 어디에 있나요?”

“그 아이?”

“피가 낭자한 곳에 기이하리만치 자주 찾아가는 아이요.”

“아!”

그 녀석?

“음, 지금 시간이면 훈련장에 있지 않겠소? 듣자 하니 인질극이 벌어져 그것을 해결했다고 하던데…….”

“인질극이요?”

인질극이라고?

그게?

“이상하네요? 분명 술법의 발동을 느꼈었는데?”

“술법?”

“네. 술법으로 인질극을 하는 이들은 없을 텐데…….”

말끝을 흐리는 백화단주.

그 모습에 팽후는 벌떡 일어났다.

“……이들의 심문은 조금 늦게 하겠소.”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리고 그런 팽후를 따라 일어서는 백화단주.

이상을 인지한 순간, 퍼져 나간 두 사람의 기감은 존재해선 안 될 것들을 빠르게 찾아냈다.

“……강시?”

“라고 하기에는 조금 빠르군요.”

생기가 없으나, 인간의 형체를 한 것들이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는 것.

거기에다.

“벌써 포위당했군.”

“생기가 없는 강시의 장점이죠.”

고수의 기감(氣感)을 피할 수 있다는 것.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도 평상시에 모든 오감을 극대화해 놓진 않는다.

정신적인 소모가 너무 크니까.

백 장 밖에 있는 풀잎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평상시에는 일부러 듣지 못하게 막아 놓는다는 뜻이다.

웬만한 위협은 기(氣)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래서 감지하지 못했다.

“이런, 벌써 눈치챈 거야?”

그리고 그런 팽후의 긴장된 눈빛의 끝.

강당 문에 서서 당과를 핥는 소녀가 입꼬리를 크게 올리며 웃었다.

“저쪽은 이미 시작했어. 우리도 시작해야지?”

* * *

“흐읍!!”

철백의 거친 기합성과 함께 그를 둘러싼 무인이 허공을 가른다.

겨우 충격을 받아 내는 것에 그친 방어.

“훌륭하군!”

진심으로 감탄하며 철백은 두 주먹을 휘둘렀다.

만약 자신이 아니었다면, 분명 꽤나 많은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합격술의 완성도가 높다.

빈틈을 찌르는 기술이 좋다고 해야 하나.

다만.

“하지만 아쉽군!”

그것 이외엔 전부 허술하다.

먼저 공격을 방어해 내는 것이 조잡하고, 순간순간의 대응이 매끄럽지 못하다.

“익숙한 모습이야!”

“야!”

뒤에서 친구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지만, 철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익숙한 걸 어떡하라고?

“……놈!”

그리고 그런 철백의 노골적인 무시나 다름없는 태도에 상대는 이를 악물고 달려든다.

도발이 목적이었다면 꽤나 훌륭한 언행이라고 칭찬할 수 있을 정도의 효과.

분노가 깃든 눈으로 달려드는 상대를 철백은 가볍게 쳐 냈다.

“흔들렸군.”

낮게 가라앉은 두 눈이 상대를 향한다.

그 순간, 경직되는 몸.

아니, 경직된 게 아니다.

‘언제?!’

붙잡힌 거다.

왼팔이 철백의 오른손에 붙잡힌 것을 확인한 사내가 몸을 흔드는 순간.

뿌드드득.

“끄아아악!”

웬만한 기관도 상대하지 못할 철백의 악력이 사내의 뼈를 으스러트렸다.

그 모습에 놀란 동료가 검을 휘둘렀지만…….

깡!

튕겨 나간다.

통하지 않는다.

그것이 불굴의 육체.

이 육체를 바탕으로 싸워 내는 것이 철백의 전투 방식.

“무리다. 어설픈 각오로 휘두르는 검은 내 가죽조차 뚫지 못한다.”

안광과 함께 철백은 망설임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본래라면, 학관 내부인 만큼 제압하는 방법을 택했겠지만…….

‘죽일 수 있으면 그냥 죽여.’

설천위가 이런 조언을 한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을 터.

상대의 수장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으니 나름 정보가 있는 거겠지.

그렇기에 철백은 망설임 없이 상대의 머리통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인간의 두개골 따위 우습게 박살 내 버릴 힘으로.

그런데.

“끄아아아압!!”

버텨 낸다.

이를 악물고 오른팔을 들어 올린 상대가 그 주먹을 받아 냈다.

상대의 검이 주먹과 닿는다.

검을 쥔 손목이 부러질 듯 휘지만, 버텨 낸다.

동시에.

“네노오오오오오옴!!”

붉게 충혈된 두 눈이 강렬한 살의를 품고 철백에게로 향했다.

그 곁에 선 동료도 마찬가지.

그들의 눈동자가 변한 것과 동시에 난폭하기 그지없는 기세가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우리가 이 무림에 진정한 정의를 세울 것이다!”

“타락한 무림맹을! 그 밑에서 자라나는 싹인 너희를 잘라 내 이 무림에 진정한 정의를 세울 것이다!”

악을 쓰며 달려드는 이들.

그 속도는 보는 것만으로도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아까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고.

콰득!!

그 힘 또한 받아 내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크게 강해졌다.

거기에다 부러진 팔을 망설임 없이 휘두르는 모습까지.

완전히 고통을 잊었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겠지.

“이래서 죽이라고 한 것이었군.”

이런 상태면 제압할 방법이 한정되니까.

아마 제압해도 그 상처로 죽을 확률이 높고.

그럴 바엔.

“깔끔하게 보내 주마.”

단숨에 그 목을 꺾어 주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 * *

“철백한테 고작 둘? 괜찮겠어?”

“할 수 있는 녀석들이다.”

“벌써 최후의 수단을 쓰고 있는데?”

“각오한 바다.”

점점 전투가 격해지기 시작한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며,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철백과 주현운에게 둘씩.

유예린에게 열.

나한테 셋.

“나한테 너무 과투자하는 거 아닌가?”

“아니, 이만큼은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몇 번 검을 나누며, 장소춘은 자신의 선택을 확신했다.

이 녀석이 진짜 위험한 녀석이다.

아마 둘이서 하나씩 맡은 이들은 목숨을 잃겠지만, 그들의 희생은 분명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스스로를 향한 다짐을 더욱 깊게 새기며, 장소춘은 설천위를 향해 검을 겨눴다.

“네 녀석의 목은, 반드시 베어 낸다.”

“대체 왜? 너희 목적이야 뭐, 무림맹의 붕괴 뭐 그런 거 아닌가?”

게임에서도 성공하는 걸 본 적이 없지만.

경우에 따라서 무림맹에 상당한 타격을 입히긴 한다.

진의단은 의외의 가능성을 지닌 집단이니까.

그 가능성의 근원은 눈앞에 있는 이 녀석.

화경급 고수의 목에 송곳니를 박을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이 녀석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장소춘은 지금 이 자리에서 끌어내고 있었다.

“짧은 시간에 이 정도로 발전한 네놈은 분명 무림맹의 거대한 기둥이 되어 땅을 짓누를 것이다.”

“……그게 뭐?”

아니, 기둥이 되면 좋은 거 아닌가?

“무림맹은 가진 자들이 천장에서 아래를 굽어보며 땅에 있는 자들을 향해 침을 뱉는 곳.”

무림맹에서 일하면서 일일이 세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익숙히 보아 온 장면들.

가진 자가 없는 자를 핍박하고.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착취한다.

이 세상에 정의가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으나.

최소한 무림맹에는 정의가 없다고 확언할 수 있다.

“앞서 한 대부분의 계획에서 너를 붙잡는 데 실패했으나…….”

거듭된 실패로 그 노괴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게 됐지만, 상관없다.

어느 쪽이든 악이라면 위선(僞善)이라는 숨은 악(惡)을 베어 내리라.

강렬한 기세와 함께 장소춘의 몸이 땅을 박찼다.

그야말로 신속. 순식간에 설천위의 코앞에 도달한 장소춘이 검을 내려찍는다.

여태까지의 탐색전과는 다른, 진짜 살의를 담은 일격.

키이이이잉!!

기와 기가 갈려 나가는 굉음과 함께 그 일격을 막아 낸 설천위가 다시 자세를 바로잡는 순간.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네 목을 베겠다.”

깊은 의지를 품은 장소춘의 붉은 눈동자가 설천위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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