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169화-정의 (9)
“학생회는 날뛰는 이들을 제압하세요!”
갑작스레 폭주하는 이들.
완전히 이성을 잃고 날뛰는 모습에 제갈소는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누가?’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할 정도로 붉어진 눈동자.
도저히 정상적인 상태라곤 볼 수 없는 모습.
대체 누가 이들에게 이런 짓을 한 것인가.
아무리 자격지심에 빠져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이들이라고 해도, 이런 몰골이 되는 것을 자진해서 선택했을 리가 없다.
최소한, 제갈소가 아는 상식 내에선 가능하지 않은 선택이다.
“큭! 반항이 너무 거셉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제갈소는 한층 더 깊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이 사태를 누가 일으켰느냐가 아니다.
그보다는 생명을 폭주시켜 날뛰는 이들을 어떻게 정리하느냐다.
‘……아마 진정시켜도 다시 무인으로 돌아갈 순 없을 거야.’
아무런 부작용도 없이 이렇게 힘을 얻을 수 있는 방법 따윈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소정회(素正會) 인원들은 전부 기(己)에서 임(壬) 사이에 존재하는 이들.
그나마 회주인 천병식이 기(己)일 뿐, 나머지는 전부 하위권에 속하는 이들이다.
최근엔 계(癸)도 하나 들어간 것 같지만.
여하튼, 이런 난동을 피울 수 있을 만한 실력 있는 자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바로 약물이다.
최근에 약물로 실력이 상승한 것 같다고 의심 갔던 이들과 같은…….
‘……잠깐.’
근데 이상하다?
왜 약물 사용이 의심 가는 자들의 목록에서 소정회(素正會)는 빠져 있었지?
어디서 잘못된 거지?
이어지는 생각 끝에,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점에 도달한 제갈소의 머릿속은 단숨에 아주 복잡해졌다.
이건 말이 안 된다.
안 되는데…….
“부회장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잠깐, 기다려 봐.
시끄러우니까.
‘뜬금없는 인질극. 이들은 한없이 진심인 것 같아 보이지만…….’
그것이 이용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는가?
아니다.
결단코.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부회장!!”
“이러다 우리가……!”
“아! 좀!”
자꾸 생각 좀 끊지 마!
고함과 함께 제갈소가 고개를 든 순간.
“아…… 미…… 타…… 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제갈소의 모든 잡념을 일시에 날려 버렸다.
“……회, 회장?”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
그 목소리는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그리고.
‘진짜네?!’
억누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살수를 허용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이들을 제압하세요!!”
안 된다.
여기서 회장까지 폭주하면, 정말 수습하기 힘든 사태가 벌어진다.
학생회 소속의 다른 학생들이 살수를 쓰는 건 불가항력이지만, 회장이 살수를 쓰는 건 폭력이 된다.
그리고 폭주한 회장은 그냥 폭력이 아니라 무차별적인 폭력을 학생들에게 쓸 테고.
그 사태만은 결단코 막아야 한다.
불자라는 인상으로 많은 표를 받아 회장이 된 게 아닌가.
소림은 이 시대의 선두라는 증거를.
제갈은 실질적인 운영의 경험을.
서로에게 좋은 거래를 맺고 있는 상황에서 회장의 폭주는 큰 화를 불러온다.
“회장! 하히후! 숨 쉬세요! 숨!”
아니, 이게 아닌가?
이 호흡법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 아니 이게 아니지!’
나도 모르게 현실도피를!
고개를 젓고 다시 똑바로 혜송을 바라본 제갈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참고 있다.
이 불자는 치솟는 화만큼이나 강한 인내심을 가진 덕에 어떻게든 화가 밖으로 분출되지 않도록 억누르고 있었다.
물론, 강한 인내심은 선천적인 게 아니라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지만.
“……나는, 괜…… 찮소.”
그러니 주변을 도와라.
“됐네요. 이 정도 일도 처리하지 못할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자신을 제어하는 것도 힘겨워하면서 주변을 걱정하는 혜송의 모습에 작게 코웃음을 친 제갈소는 주위를 둘러봤다.
“봐요. 다들 잘 대응하고 있…….”
있……잖아?
“부, 부회장.”
“……이게 뭐야?”
누군가의 부름에 미처 대답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제갈소는 어이를 상실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꺼, 거걱!”
“끄륵!”
기괴한 소리를 내는 이들.
폭주했던 소정회(素正會)의 인원들이다.
일제히 움직임을 멈춘 모습은 더 이상 위협이 될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대체 어떻게?”
아무도 그들을 속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하다못해 포승줄 같은 것으로 묶은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이들을 일시에 점혈이라도 한 건가?
‘……학관장님은 안 보이는데?’
아니, 오셨으면 오셨다고 말해 줬겠지.
그렇다면…….
“……저 괴짜가 또 뭔 짓을 한 걸까?”
아니, 이젠 괴짜가 아니라 괴물이라고 불러야 하나.
제갈소의 시선 끝.
한 손으로 허공을 움켜쥔 설천위가 기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간질간질한 감각.
그게 영력의 흐름이라는 것을 알아채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술법이라는 것을 눈치챈 순간, 바로 알아챌 수 있었으니까.
동시에 내가 바로 알아채지 못한 이유도 알았다.
“섞여 있네?”
일단 단순한 내공이랑 섞인 건 아니고.
혈기(血氣)?
음, 그쪽이 더 맞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후보는…….
“혈사련 아니면 혈교인데…….”
이 둘은 왜 따로 있는지 모르겠다니까.
그냥 서로 합치지.
별 차이도 없구먼.
사람 헷갈리게.
[혈사련이란 녀석들 아니겠느냐? 일전에 네 손에 노공인가 뭔가 하는 놈이 죽었으니 말이다.]
[그건 혈교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쪽도 혈사자란 놈이 죽지 않았나?]
……흠.
그렇게 말하니 양쪽 다 제대로 벌집을 건드려 놓긴 했네.
뭐.
“일단 이 상황을 정리해 놓고 생각해 보죠.”
혈기가 섞여 있다곤 해도 그 본질은 결국 영력.
혼에 적용하는 힘.
아마 이놈들이 먹은 약이 촉매가 되어 발동된 힘이겠지.
기절했던 녀석을 발동만으로 깨워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힘이다.
물론 머리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지만.
여하튼, 외부의 개입이 있는 힘이라면 그 개입 과정이 있을 터.
“흠.”
그 과정을 찾아내면, 반은 해결한 거다.
그리고.
“찾았다.”
그것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고.
[괴물 놈.]
[저 희미한 것 말이냐?]
[죽은 우리도 제대로 안 보이는데, 대체 그걸 어떻게 보는 것이냐?]
다 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소란스러워진 혼들을 향해 손을 휘저은 설천위는 웃으며 손을 내뻗었다.
마침 잘됐다.
전엔 기회가 없어서 써 보질 못했는데.
“살악(殺握).”
이번 기회에 한번 써 보자.
설천위의 미소.
가볍게 뻗은 손.
그리고 변화하는 공기.
“이게 대체……!”
가장 먼저 변화를 느낀 건 주현운이었다.
무언가가 존재를 움켜쥐는 것 같은 감각.
자신도 모르게 발을 빼서 본능적으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던 감각.
[대단하구나.]
그런 주현운의 반응에 천마가 감탄했다.
재능이 넘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감조차 이리 좋다.
정말로 축복받은 재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놈도 그렇다만.’
박치기 한 방으로 자신을 볼 수 있는 영안을 개안했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아직 미흡한 영안을 가진 주현운이나 철백은 물론, 영안이 아예 없는 일반인들은 보지도 못하는 세계.
영(靈)의 세계에서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경악스럽기 그지없었다.
끼기기기기긱.
허공에 뻗어 있던 수많은 영력의 선들이 강제로 모인다.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움켜쥔 거대한 손은 거칠게 움직이지 않았다.
[괴물 놈.]
끊어 낸다?
아니다.
그래선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지 않은가.
설천위가 원하는 것은 소정회 놈들의 구제가 아니다.
그러니, 끊어 내지 않는다.
역으로, 그 선에 힘을 더한다.
선을 더 굵게, 더 선명하게 만든다.
무엇으로?
“끄륵!”
“끄기기가!”
살의(殺意)로.
죽음이 선을 타고 소정회 놈들을 먹어 치운다.
혼을 삼키고.
육체를 잠식한다.
아마 망가질 것이다.
그 혼은 짙은 살기에 휘말렸기에 더 이상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는 힘들 것이다.
영혼에 생긴 수많은 상처는 셀 수 없는 공포로 돌아올 것이다.
일상의 모든 과정에서 공포와 함께할 것이다.
아마 극복해 내려면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지는 게 어른이지.”
학생이면 아직 어른이 아니지 않냐고?
에헤이.
인질극도 벌였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세력도 만들고 뭐 할 짓 다 했는데 나이 좀 어리다고 어른이 아닌가?
얘들 술도 마시는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주도해서 할 수 있는 정신적 역량이 있으면 어른인 것이다.
그런 정신적 역량이 있으면서 그 반작용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다 알면서 하는 거지.
그러니.
“어른답게 자신이 벌인 일의 책임은 자신이 지자고.”
[살악(殺握)]
기어코 살기가 그들의 본질까지 꿰뚫는다.
더 이상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육체가 부들부들 떨다가 하나둘 바닥으로 허물어진다.
완전한 제압.
순식간에 소정회의 모든 인원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설천위는 허공을 움켜쥔 손을 내리지 않았다.
“찾았다.”
진짜 원하던 건 이 끝에 있으니까.
* * *
“끄아아악!”
뇌를 파고드는 강렬한 고통.
단숨에 끊어 내지 않았다면, 뇌 전체를 녹여 버렸을 정도로 강력한 힘에 술사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 이런 괴물 놈……!”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지만,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민이니까.
괴물의 영역에 선 자들의 역량을 헤아리기 위한 고민만큼 의미 없는 짓거리도 없으니까.
‘도망쳐야 한다.’
일단, 도망쳐야 한다.
자신이 가장 먼저 공격 목표가 될 가능성이 명백히 존재한다.
확실하게 걸리지 않았던가?
터럭만큼이라도 이곳에 오래 있는 것은 위험…….
“커헉!”
대체 무슨?!
순간, 몸 전체를 옥죄는 힘에 술사는 마른기침을 토해 냈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상황…….
“이, 이건?!”
몸 전체를 옥죈 거대한 손아귀.
그 존재를 확인한 술사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미친 듯이 흐르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손아귀가 시작된 곳.
인간으로 따지면 손목이 있어야 할 곳.
그곳엔 아직도 끊어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영력의 선이 있었다.
즉.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저 선을 매개로 이 손을 소환해 자신을 붙잡았다는 소리다.
아니, 실체에 영향을 끼치는 술법을, 타인의 술법을 매개로 펼친다고?
이만큼이나 떨어진 거리에서?
무엇보다 이 술법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상대를 붙잡는 것이 아니었다.
혼백의 제압.
손아귀를 통해 스며드는 살의가 존재를 억압한다.
까득.
손아귀에 붙잡혀 움직이지 못하는 곳은 물론이고, 다른 곳 또한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달달달.
오한이 든 듯 턱이 절로 떨리고, 손발이 저릿저릿하다.
대체 자신의 몸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제대로 감도 잡기 힘든 순간.
“진짜 있군.”
묵직한 목소리에 술사는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육체.
이런 거구가 근처까지 다가왔는데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는 건가?
자아를 유지하기 위한 발악만으로 필사적이었다고?
현실을 깨달은 술사의 눈동자가 격하게 떨리는 것을 보고, 철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설천위는 살려서 데려오라고 했으니까.
“쉽군.”
술사를 어깨에 짊어진 철백은 그대로 설천위가 있는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꺄하하하하하! 진짜 괴물이네?”
무림학관의 외부에 있는 작은 민가.
그곳에서 소녀는 웃었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재능이다.
“내가 산 세월이 참 무색해지네.”
괴물 같은 놈.
까득.
당과를 이로 깨부순 소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녀석이 술법 쪽으로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까.
다행히 여기까지 추적해 올 것 같진 않은데…….
“아무래도 선택의 순간이 온 것 같네.”
고개를 돌린 소녀는 집 안의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이를 보고 빙긋 웃었다.
“어떻게 할래?”
아예 몰아붙여 끝을 보든가.
아님 일단 물러나든가.
담담한 질문을 던지고, 이내 문을 열고 나가는 소녀.
그녀가 떠난 민가에선 진한 혈향(血香)만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