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168화-정의 (8)
“구교사에서 인질극?”
어떤 미친놈이?
미간을 찡그린 혜송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친 불경한 단어에 눈을 감았다.
“아미타불, 상황을 정확히 설명해 주십시오.”
“말 그대로입니다. 얼마 전에 구교사를 배정받았던 이들 중 소정회(素正會)라는 동호회원들이 같은 구교사를 쓰는 이들 몇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뜬금없군요.”
“뜬금없는 정도가 아니죠.”
대체 왜?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오르게 만드는 행동이다.
그런 혜송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제갈소는 나름대로 이유를 붙였다.
“마침 신생 동호회가 많은 구교사이니 등급이 낮은 이들을 노려 붙잡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멍청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죠.”
나름대로 노린 것이 있는 것 같지만,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하다면 도저히 시도할 만한 일이 아니다.
“……일단, 구조 작업부터 하죠.”
“방법은?”
“아미타불, 다 제 부족함으로 생긴 일입니다. 먼저 그들의 말을 들어 보고 싶습니다.”
“그러실 것 같아서 협상 준비를 벌써 시작했습니다.”
역시, 제갈소.
부회장의 빠른 판단력에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숙인 혜송은 즉시 학생회실을 나섰다.
뭐가 됐든 인질극이라는 극단적인 수를 취한 것은 그만큼 큰 불만이 쌓여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학생들의 불만을 들어 주는 것이 바로 자신의 역할.
“아미타불.”
해야 할 일을 할 때다.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구교사에 도착한 혜송은 저 멀리 창으로 고개를 내민 이들을 발견하곤 걸음을 멈췄다.
“아미타불! 학생회장인 혜송입니다!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흥! 거기서 기다려라!”
즉시 들려오는 대답.
상대도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혜송은 작게 안도했다.
원하는 것이 있는 이상, 인질을 바로 해치진 않을 테니까.
그나저나.
[인질로 잡혀 있는 이들의 구체적인 신원은 파악됐습니까?]
전음으로 조심스럽게 제갈소에게 물은 혜송은 들려온 대답에 더욱 미간을 찡그렸다.
[혼령연구회의 학생이 둘, 소전술연구회가 셋, 야초연구회가 둘입니다.]
……아니.
이거 맞아?
납치된 이들 중 혼령연구회의 사람이 있다고?
“왜…….”
도저히 이유가 짐작이 안 가 자신도 모르게 육성으로 제갈소에게 물으려던 혜송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두 눈이 가려진 혜송은 들어라!”
어느새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이가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기 때문이다.
혜송은 그 모습에 일단 다른 생각을 접어 두고 그에게 집중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지만, 일단 여기서는 저들의 요구 사항을 들어 줄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는 학관의 잘못된 정의를 바로잡고자 한다!”
분노가 서린 목소리.
내공을 담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담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생으로 크게 키운 목소리가 구경꾼들 사이로 퍼져 나간다.
“선과 의로 인간을 대해야 할 학관이 실력 중시라는 명목 아래 학생의 인권을 짓밟아 왔다!!”
실력 중시.
그 단어에 구경꾼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저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그런 군중의 웅성거림에 답이라도 하듯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계급을 나눠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어찌 정파라 할 수 있는가! 하물며 그 계급의 기준이 덕(德)과 인(仁)이 아닌 폭력이라니! 언어도단이다!”
그것은 억압받아 온 자들의 목소리다.
내가 가진 재능이 부족하다고 해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극단적인 예로, 옛날에 설천위의 공적을 뺏으려던 배천문은 큰 차이도 안 나는 계(癸)를 벌레라고 불렀다.
절정에서 일류에 속하는 정(丁), 무(戊), 기(己)는 물론, 그 아래인 경(庚), 신(辛)조차 자신의 아래를 무시한다.
왜냐고?
실력이 가장 중요하니까.
그것이 곧 존재 가치이고, 그것이 곧 존재의 증명이니까.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허나, 그것이 과연 정파로서 옳은가?
그 의문에 대다수의 사람은 아니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
“우리는 선과 의를 좇아야 하는 이들! 바른길로 가지 않는 이들은 정파가 아니다!”
정파이니까.
바른길로 가야 하는 이들이니까.
나는 그렇지 않아도, 정파의 협객이라면 그래야 하니까.
그게 옳은 것이다.
그런 생각을 옳지 않다고 부정할 이들 따윈 없다.
“평등한 기회를 주고 평등하게 경쟁하여……!”
감정이 절절하게 실린 목소리가 울려 퍼짐에 따라 소란스러움이 점점 더 커진다.
“……아미타불.”
웅성거리는 군중의 모습에 혜송은 작게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
그 모습에 걱정스럽게 혜송을 바라보는 제갈소.
이윽고 결국 처음 한 말이 전부인 이야기를 열심히 부풀리고 치장하던 상대가 말을 멈췄다.
“우리는! 공정한 기회를 원한다!!”
절규에 가까운 포효.
그 포효에 동조하는 이들이 호응하려는 그 순간.
“개소리!”
목소리 하나가 그 모든 열기를 잠재웠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목소리 하나가 해낸 것은 아니다.
공간 전체를 짓누르는 기이하기 그지없는 힘.
그 힘이 군중의 고양감을 단숨에 강탈했다.
억지로 뺏고 짓밟아 불씨조차 꺼트려 버렸다.
“공정한 기회?”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
어느새 혜송을 지나쳐 앞으로 나온 이가,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자를 보며 비웃었다.
“공정한 기회를 원하는 녀석이 하는 짓으론 안 보이는데? 보통 결과가 마음에 안 드는 녀석들이 이런 생떼를 많이 부리지.”
“설천위 네놈! 네놈이 무슨 낯짝으로 그딴 말을 지껄이는 것이냐!!”
화가 가득한 목소리.
설천위를 향해 버럭버럭 소리치던 사내, 구혹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린다.
“부정한 방법으로 이 학관에 들어와 사술로 모두를 현혹시키는 네놈이 어찌 그딴 말을 감히 입에 담을 수 있냔 말이다!”
가문의 힘으로 들어오고.
혼을 다루는 방법으로 성장했다.
이미 알 만한 이들은 다 아는 사실.
그야말로 무인의 수치나 다름없는 자가 아닌가.
그런 자가 어찌 저리도 뻔뻔하게……!
“오! 부정한 방법으로 들어와? 좋아,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 이거지?”
고개를 끄덕이는 설천위.
그는 웃으며 몸을 돌려 군중을 바라봤다.
“너희들은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하냐?”
“……잘못됐소.”
설천위의 질문에 누군가가 대답했다.
잘못됐다.
정당한 경쟁을 거치지 않고, 학관에 들어온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모두가 그리 생각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설천위의 눈에 들어온다.
그렇기에 설천위는 웃으며 물었다.
“왜?”
“입관 시험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오! 정당한 경쟁을 치러서……!”
“아니? 나는 기회의 평등을 얻었을 뿐인데? 이 학관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
군중에게서 몸을 돌린 설천위는 구혹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말하는 기회의 평등, 그 자체 아닌가?”
“개, 개소리하지 마라! 그딴 게 어찌 기회의 평등이…….”
“그렇지, 될 수 없지? 애초에 없다니까? 기회의 평등 따위.”
있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태어난 환경이 다르고, 개개인의 재능이 다르다. 그런데 기회의 평등 같은 게 있겠냐? 배움의 시작이 되는 학관의 입관 시험조차 평등하지 않음을 전제로 하는데?”
“…….”
“그래, 뭐 좋아! 백번 양보해서 평등 좋다, 이거야. 그런데 너 뭔가 착각하고 있지 않냐?”
착각.
그것도 아주 큰 착각.
“여긴 무림맹의 무인을 키우는 곳이다. 일종의 군사시설이란 말이지.”
“그게 무슨 상관이더냐! 우리는 정파의 협객으로서……!”
“야, 뭐 정의가 올바르면 사파 놈들의 칼이 무뎌져? 네 목은 안 베고 지나가?”
골골대는 병사를 받아 주면, 그 병사한테 칼 휘두르는 적은 뭐 똑같이 평등한 조건에서 싸우려고 자기 팔 하나를 자르나?
“적(敵)이 존재하는 집단의 병력을 키우는 이곳에서 평등을 바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행동이다.”
개념을 상실한 거지.
무인도 엄밀히 말하면 군인인데.
뭐.
“재미없는 혓바닥 싸움은 여기까지 하고.”
슬쩍 몸을 돌린 설천위는 두 눈을 감고 열심히 불경을 외는 혜송을 바라봤다.
‘……좀 더 있으면 터질지도?’
저런 애가 어떻게 불자(佛者)를 하고 있는 걸까.
“자! 그럼 특별히 설명해 줄게!”
큰 소리로 외치며 설천위는 가볍게 손뼉을 마주쳤다.
“하나! 이 무림학관에서 너희 정도 수준으로 인질극을 벌이는 짓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왜?”
이곳이 어딘가?
무림학관이다.
그리고 이 무림학관에는…….
“둘! 철백! 대충 시간은 다 벌었으니 움직여라!”
……그건 설명이 아닌데?
쾅!!
누군가가 머릿속으로 의문을 품는 순간, 구교사의 외벽 한쪽이 통째로 날아가며 사람이 튕겨 나왔다.
“셋! 기본적인 수준 파악도 못 할 정도로 멍청하니 이용이나 당하는 거다!”
외벽에서 하나둘 튕겨 나오는 인간들을 보며 설천위는 도를 뽑았다.
“크아아아!!”
무려 3층에서 도약한 녀석이 설천위를 향해 달려든다.
나름 날카롭다면 날카로운 검이지만…….
“내공을 쌓으면 뭐 하냐, 검에 예기(銳氣)가 없는데.”
검의 날카로움까지도 조잡한 기술이 먹어 치운다.
무식하게 내공만을 담은 공격이 통할 리가 없다.
“끄아아악!”
간단하게 구혹의 검을 베어 버리고, 그대로 그 팔 하나까지 잘라 낸 설천위는 악을 쓰며 바닥을 뒹구는 구혹을 바라봤다.
“아파서 구를 시간이 있으면 어떻게든 달려들어야지.”
“네, 놈……!”
이를 악무는 구혹을 바라보며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참, 사람이 착해 빠졌어.”
이러면 안 되는데 말이야.
가볍게 발을 내질러 혈을 가격한 설천위는 게거품과 함께 쓰러지는 구혹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왜 이렇게 얌전히 있었어?”
그래서 고개를 돌린 설천위는 웃는 얼굴로 기절한 인간을 둘이나 끌고 나오는 주현운을 바라봤다.
“철 소협이 신호가 오기 전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요. 그나저나, 철 소협 연기 잘하던데요?”
아주 분한 것 같은 연기가 일품이던데?
“걔가 은근 여우라니까.”
“곰이라고 꼭 멍청할 필요는 없긴 하죠.”
설천위의 말에 어깨를 으쓱인 주현운은 기절한 이들을 둔 채 다시 구교사를 바라봤다.
저 안에서 날뛰는 철백 덕에 망가진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저걸 또 언제 다 치우지.
“그래서, 대가리는?”
“그게…….”
주현운이 뒷머리를 긁적이던 그 순간.
“이, 개, 같…… 은……!”
본능을 자극하는 강렬한 기운.
그것은 마치 생명이라는 장작으로 만들어 낸 거대한 불길 같았다.
“우리가……! 우리가 옳은 것이다!!”
“어쭈? 말도 제대로 못 해?”
흰자위 쪽이 붉게 충혈된 거로도 모자라 동공에 붉은 기운이 일렁인다.
전형적인, 사특한 수법의 증거.
거기에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 입은 끊임없이 같은 말만을 중얼거린다.
“음, 이거 어떻게 하죠?”
그리고 그 순간, 주현운의 물음에 설천위는 주현운이 데려온 두 사람도 몸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곤 미간을 찡그렸다.
아니, 무슨 좀비물도 아니고 왜 하나둘 일어나.
“하, 이 새끼들 멍청한 건 알았지만…….”
이용당해도 이렇게 제대로 이용당하면 어떡하냐.
이러면 정보를 캐내기도 힘든데…….
설천위가 미간을 찡그리는 사이,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크아아아!!”
“이 미친놈들이?!”
괴성을 내지르는 놈들이 무차별적으로 주변의 구경꾼들을 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다.
“크아아아압!”
“흡!”
철백을 거칠게 몰아붙이는 천병식까지.
있는 척 다하더니, 똘마니들이랑 똑같네.
혹시 연결점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설천위는 빠르게 식은 눈으로 다시 구혹을 바라봤다.
미친 듯이 달려드는 구혹.
이전보다 더 움직임이 단순해져서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응?”
이상하다.
뭔가 이상하다.
이, 뭐랄까.
간질간질?
음……. 뭔가 거슬리는데…….
대체 뭐가…….
우웅.
“아.”
기절했던 구혹이 어째서 다시 일어났나 했더니.
어떤 놈이 일시에 깨운 거네?
“이거 술법이구나?”
그러면 방법이 있지.
구혹의 몸을 살피는 설천위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