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162화-정의 (2)
“……무슨 용건이냐?”
“에이, 까칠하게 말하기는.”
살벌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정무회주의 모습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꽤나 얌전히 사네?”
자연스럽게 그 앞에 자리 잡고 앉는 설천위.
그런 설천위가 마음에 안 든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정무회주.
‘……이놈이?’
평온한 겉과 달리 그 속은 긴장으로 한껏 조여져 있었다.
아니, 대체 왜?
나한테 말을 걸 이유가 있나?
설마, 계획이 샜나?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순간.
“뭐야, 대화도 하기 싫다는 거야? 새끼, 쪼잔하기는.”
그저 침묵하는 정무회주의 태도에 어깨를 으쓱이는 설천위.
그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밥 맛있게 먹어라.”
대충 손을 휘젓고 일어서는 설천위.
이내 빈자리에 앉은 그의 앞으로 주문한 음식들이 나온다.
식사를 시작한 설천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정무회주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가 됐든, 이 이상 이곳에 있는 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식사를 마무리하고 바로 객잔을 떠나는 그 순간.
[크릉?]
“으헉?!”
문을 가로막은 거대한 늑대의 모습에 기겁한 정무회주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아니, 무슨 무인이 늑대한테 놀라?”
이게 그냥 늑대냐?
무슨 사람 키만 한데?
투덜거리는 설천위를 한 번 째려본 정무회주는 이내 이를 악물고 늑대를 스쳐 지나갔다.
다급한 걸음걸이로 멀어지는 정무회주.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설천위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 청랑을 향해 손짓했다.
[왕!]
순식간에 작아져 그의 곁으로 다가오는 청랑.
혀를 빼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청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설천위는 웃었다.
“기억했어?”
[왕!]
“그럼 됐어.”
그나저나 패기와 살업을 통한 실체화를 청랑도 꽤 잘 받아들이네.
영체로 지낸 짬이 있어서 그런 건가.
패융을 실체화시켜 싸울 때 보조를 위해 나도 모르게 한 조치였는데 그게 될 줄이야.
‘그럼, 그 실체화가 패융의 고유 능력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건가.’
용의 육체를.
용의 기를.
용의 마음을.
이 세 가지가 모여 진짜 용이 되는 것.
그것이 패융의 실체화라고 생각했는데…….
“흠.”
잘 모르겠다.
아직 잘 모르는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혈패황이란 사람은 어떻게 싸웠어요?”
게임 설정으로 봤을 땐 뭐, 1보에 병졸이 쓸려 나가고, 2보에 고수들이 쓸려 나갔다.
뭐 그런 식으로 적혀 있던데.
[그건 갑자기 왜 묻느냐?]
“그냥 참고나 좀 해 볼까 해서요. 일단 본질이 같으니까요.”
패기도, 패융도 결국 [혼원패공(魂元覇功)]을 통해 얻은 거다.
혈패황도 이걸 익히고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 싸웠는지 알면 참고가 될 것 같은데.
패기도, 살업도 상당히 낯선 힘이라 어떻게 발전시키는 게 좋을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으니까.
[참고라……. 아마 별 도움은 안 될 거다.]
“예? 왜요?”
[그자는 너와 달리 진짜 재능을 가진 자였으니까.]
진짜 재능.
[일단, 술(術)에도 어느 정도 능했다. 직접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잘 쓰지 않은 이유는 그의 적이 주로 인간이었기 때문이지만.
[문제는 무(武)의 재능이다.]
“그게 왜요?”
[격이 다르다.]
단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그는 극에 이른 투술(鬪術)을 직접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로 무에 대한 재능이 넘쳐났지.]
“……진짜요?”
[그래. 지배한 혼들 전부를 직접 힘으로 찍어 눌러 예속시킨 것이었으니까.]
와, 그 정도야?
[그런 완벽한 예속을 통해, 그는 자신의 힘으로 혼들을 직접 실체화시켰다.]
“실체화요?”
[그래, 예를 들면 네가 직접 싸우지 않고, 소 아우를 실체화시켜 싸우는 식으로 전투를 했다.]
“……스탠드?”
어, 어디 기묘한 모험의 세계에서 오셨나?
익숙한 향기가 나는데?
[스탠드? 그게 무엇이냐?]
“아, 별거 아니에요.”
[싱겁기는. 여하튼 혈패황은 그런 식으로 혼을 실체화시켜 싸웠다.]
“그런데, 하나 궁금한데요.”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굳이 그럴 필요 있어요? 얘기를 들어 보니 본인도 그냥 겁나 강했던 것 같은데, 왜 굳이?”
[음, 거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소적검을 생각하면 된다.]
“예?”
그게 갑자기 거기서 왜 나와?
[소적검을 썼다는 게 아니다. 경지에 오른 무인들이 죽음 이후에도 갈고닦아 만들어 낸, 살아 있는 인간이 쓸 수 없는 영역에 닿은 기술.]
“아.”
[그걸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건 확실한 장점이며, 혼의 수는 수십이 넘어 같은 공격을 찾기 어려울 정도니 공략도 어렵지.]
……뭔가 듣기만 하면 그냥 개사기캐 같은데?
“일단 별로 참고는 안 될 것 같네요.”
[깨달아서 다행이구나.]
그만한 무(武)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이야기만 들어 보면 최소 현경인데.
말이 현경이지, 그 괴물들이랑 어떻게 동수에 올라.
다른 방법이나 찾아봐야겠다.
“으어, 여기 음식 괜찮네.”
천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깔끔하게 식사를 마친 설천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은 어디 객잔을 갈까.
* * *
“히끅, 더러운 인생.”
술에 취해 휘청거리며 걷는 걸음.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걸음은 위태로워 보였다.
“으아아아! 더러운 인생!!”
악을 쓰며 외쳐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니, 오히려 허무해지기만 한다.
“……훌쩍.”
공허해진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눈앞이 뿌옇게 변한다.
“에이 씨…….”
왜 또 눈물이 나오냐.
소매로 눈가를 비빈 소년은 허리를 쭉 폈다.
“이제 진짜 그만둬야 하나.”
무림학관의 낙제생 중 하나인 계급(癸級)의 배천은 깊은 한숨을 삼켰다.
하늘이 너무 푸르러서 더 서글프다.
“천위 놈이나 철백 놈은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나는 대체 왜…….
아직도 벗어나질 못하고 있냐.
노력하면, 보답 받는 거 아니었어?
수업에 빠지고 술을 마신 건 오늘이 처음이다.
무려 2년.
어떻게든 올라가려 이를 악물고 노력했는데.
왜 자신은 아직도 삼류인 건지.
대체 그때 시험관은 뭘 보고 날 뽑은 건지.
그냥 서류상의 실수는 아니었던 걸까.
아니면 나 같은 녀석을 뽑을 리가 없잖아.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져서 도저히 수업에 집중이 안 돼 이렇게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나니 깨달았다.
아, 이 이상은 안 되겠구나.
포기하는 게 낫겠구나.
이렇게 현실을 인정하게 되는 거구나.
‘……집에 가자.’
면목이 없어도 돌아갈 곳은 한 곳밖에 없으니 돌아가야지.
학관으로 가서 어서 짐을 싸서 나가자.
그렇게 결심한 배천이 터벅터벅 골목길을 걷던 그 순간.
“배천, 맞나?”
누군가의 부름에 배천은 고개를 들었다.
암행복으로 몸을 감싼, 딱 봐도 자신이 수상하다고 주장하는 인물.
그가 배천을 보며 물었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 볼 생각 없나?”
* * *
“그래서, 자경단 활동은 나름 재미있나?”
“재미있긴. ……조금은?”
말썽 피우는 놈들을 쥐어 패는 건 생각보다 재미있었지.
반항하는 놈들은 꽤나 손맛이 좋았어.
무협지에서 손맛, 손맛 하던 게 바로 이런 느낌인가.
고개를 끄덕이는 설천위의 모습에 피식 웃은 철백은 주먹을 뻗었다.
가벼운 대련.
어디까지나 가볍게 공방을 나누는 대련을 하면서 설천위와 철백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최근 학관이 꽤나 소란스러운 것 같더군.”
“음? 왜?”
“동호회가 꽤나 뜨거운 모양이야.”
“동호회?”
그게 왜?
그냥 학생들끼리 모여서 친목이나 도모하는 곳이잖아.
흑룡학관의 대(隊)처럼 끈끈한 집단도 아니고.
그냥 적당히 취미가 맞는 애들끼리 노는 거 아닌가?
게임에서도 관련 에피소드는 몇 없었는데?
“구교사를 쓰기 시작하면서 동호회실에 여유가 생겨 그것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벌어진다더군.”
“아, 근데 그걸 이제야?”
“원래는 선착순으로 진행했다던데…….”
“했다던데?”
“어떤 동호회에서 비무로 동호회실을 뺏는 일이 생겼다.”
아, 뭐 회장끼리 동방을 걸고 싸운 건가?
이기면 이 동호회실은 내가 가져간다 같은?
“문제는 그 뒤에 그런 일이 너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 결국 다수의 부상자까지 나왔다더군.”
“부상자?”
“패싸움으로 번진 것 같다.”
허이구?
이 새끼들이 과연 정파가 맞나?
골때리는 놈들일세.
“그래서 그 중재를 학생회가 맡았고, 아예 학기별로 동호회실을 정하는 비무 대회를 연다더군.”
“대표 한 사람만 나서서 싸우는 건가?”
“이번 대회는 아마 그럴 것 같더군.”
하긴, 그리 여유롭게 준비한 것도 아닐 텐데 단체전을 하긴 좀 그렇겠지.
그나저나 이건 나쁘지 않네.
“흠, 우리도 하나 할까?”
“뭘?”
“동호회.”
어느새 손을 멈춘 설천위의 눈에 천막을 쳐서 그 밑에 의자나 몇 개 둔 휴식 공간이 들어왔다.
“우리도 이제 사람이 좀 늘었는데, 제대로 쉴 곳을 마련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
* * *
“……혼령연구회요?”
“설천위가 신청한 동호회 이름입니다.”
서기의 대답에 허허롭게 웃은 학생회장, 혜송은 눈앞에 놓인 종이를 바라봤다.
“명단에 적힌 면면들이 참 독특하기 그지없군요.”
병(丙) 등급의 유예린부터 시작해 그 면면이 꽤나 화려하다.
최근 학관의 폭풍이라 불리는 이들이 다수 속해 있고.
“친선전에 나가는 이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는데, 그 동호회의 이름이 혼령연구회라니……. 이건 나름 신선하군요.”
“설천위의 독특한 능력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설천위가 혼을 다룬다는 것은 이제 알 만한 사람들은 전부 아는 사실이다.
그의 특이한 행실을 보고도 모를 수가 없을 테니까.
듣기론 백화단주가 직접 그를 만나러 왔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라던가.
그런 재능으로 왜 아직도 무림학관에 발붙이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이러면, 일단 우승자는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이겠군요.”
이번에 동호회실을 놓고 싸우는 동호회는 거의가 신생이다.
원래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던 이들은 굳이 나서지 않았고, 신생도 괜히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으니까.
서로 비슷하다고 느끼니까 아웅다웅하는 거다.
격에서부터 차이가 난다고 느끼면 도전하는 자는 많지 않다.
“그럼 일단 알겠습니다. 그다음으론…….”
“이들입니다.”
“……음.”
다음 안건을 받아 든 혜송은 낮게 신음했다.
“역시, 약물의 증거는 나오지 않았습니까?”
“예. 약제당에서 검사한 결과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고 합니다.”
“……으음.”
최근 급격하게 실력이 늘어난 학생들이 많았다.
학관의 교육이 드디어 빛을 보고 있다는 증거이니 좋아해야 마땅했지만…….
문제는 그들의 실력이 늘어난 방식이다.
내공의 증가를 통한 단순한 위력의 증가.
그것만으로 이류 수준까진 쉽게 도달할 수 있고, 어느 정도 감각만 있으면 일류 수준에도 검을 들이밀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급격하게 강해지는 것은 대부분 약에 의한 경우가 많다.
영약 같은 영구적인 효과를 가진 귀물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내공을 부풀리는 형태의 약들.
반드시 심한 부작용을 동반하기에 사실 그냥 두는 것만으로도 그 증거가 나와야 하지만…….
“이상하군요.”
“다들 별문제 없이 학관 생활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이게 더 문제였다.
왜 아무도 부작용을 나타내는 사람이 없지?
누가 진짜 영약이라도 뿌리고 있단 말인가?
혜송의 미간 주름이 더 깊어지는 순간.
서기가 깜빡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린 듯 혜송을 불렀다.
“회장님, 추가로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또 있나요?”
“예. 이번에 내공이 크게 늘어난 학생들이 대부분 수업 시간에 몰래 나가는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나가요?”
“예. 아무래도 외부에서 무언가 하는 것 같습니다만……. 이쪽 인원은 밖으로 잘 돌아다니지 않다 보니…….”
정확한 상황 파악이 어렵다.
뒷말을 삼키는 서기를 잠시 바라보던 혜송은 짧은 고민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설 소협을 불러 주십쇼.”
아무래도 이번 일은 외주를 맡길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