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158화-이게 맞나? (1)
도망쳐야 한다.
본능이 악을 쓰지만 현실은 그것과 별개.
삶을 외치는 본능과 달리, 육체는 움직이질 않았다.
삶을 향한 본능보다 더 큰 무언가가 육체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공포.
‘이런, 말도 안……!’
[크르르르르르.]
그 육체를 휘감은 용은 마치 전설에나 나올 법한 무언가.
그 육체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포식자의 그것이었다.
“넌 또 뭐냐?”
짜증이 섞인 물음.
그 물음에 사내는 한 번 더 이를 악물었다.
살아야 한다.
공포에 밀렸던 생존 본능이 겨우 주도권을 되찾았다.
멈췄던 근육이 움직이고.
영력을 이용한 술법이 발동된다.
최고의 속도로 도망가자.
대답 없이 이를 악문 사내가 다시 땅을 박차는 그 순간.
“어리석구나.”
또 다른 목소리가 그 앞을 막아섰다.
뿌득 뿌드득.
철강시 하나가 그 손에서 실시간으로 사지가 뜯겨 나가고 있었다.
‘분명 두 구였을 텐데……?’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사내의 시야에 여태껏 잊고 있던 인물 하나가 들어왔다.
곤괴의 등장과 함께 서하영을 챙기기 위해 뒤로 빠져 있었던 철백.
그가 남은 하나의 철강시를 붙잡고 팔을 비틀어 뜯어내고 있었다.
“고작해야 기세 따위에 발길을 멈추다니.”
사지를 뜯어낸 철강시를 내팽개치며 곤괴가 손을 뻗는다.
몸을 비틀어 피하려고 해도, 그의 어설픈 움직임보다 최소 3수는 앞서 있는 곤괴다.
“큭!”
“거리를 내어주고도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 팔을 붙잡은 곤괴가 단숨에 그 몸을 잡아당긴다.
남은 손이 그 목을 붙잡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
[바로 죽이면 안 된다.]
즉시 목을 꺾으려던 곤괴는 설천위 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손을 멈췄다.
[저 여아는 보아하니 시독에 중독된 것 같으니, 그자의 조력이 없으면 치료에 너무 긴 시간이 걸린다.]
조력이 없어도 치료할 수 있다.
그런 자신감이 담긴 말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부족함도 인정하는 말이었기에 곤괴는 손길을 멈췄다.
타당했으니까.
“호, 호호, 내가 알려 줄 것 같아?”
그러나 목이 붙잡힌 상태에서도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는 사내의 모습에 곤괴가 미간을 찡그린 그 순간.
“죽여요.”
시큰둥한 목소리와 함께 성큼성큼 걸어 설천위가 곤괴를 지나갔다.
“뭐, 죽으면 벗어날 수 있나?”
“그것도 그렇구나.”
삐딱하게 고개를 꺾으며 묻는 설천위의 모습에 곤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 슨?”
뿌드드득.
최후의 도박을 시도했던 사내가 제대로 된 의문을 미처 표하기도 전에 목뼈가 산산조각이 난다.
즉사(卽死).
말 그대로 순식간에 죽어 버린 사내의 시신을 내던지는 곤괴.
그리고…….
[이, 이게 무슨?!]
육체에서 빠져나오던 사내의 혼을 설천위가 붙잡는다.
강제로.
아마 예전의 설천위였다면 그 혼을 붙잡지 못했을 거다.
사내는 혼의 소양을 닦은 술사였으니까.
생전의 강함 여부를 떠나 혼으로서 움직이는 법을 알기에 붙잡기 힘들었을 것이다.
한데.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지금은 그게 가능했다.
사소한 잔재주는 그 체급이 맞는 경우에나 통하는 법.
“어쭈, 반항하네?”
상급(上級)에 도달한 설천위의 영력은 이미 그 분야에서 단주(團主)급이나 마찬가지다.
사내가 뛰어난 술사이긴 하지만, 결코 그 수준에 도달한 술사는 아니었다.
체급 차이가 너무나도 크다.
[크아아아아!]
생전엔 낸 적 없었던 기괴한 소리와 함께 사내의 혼이 속박된다.
폭력적이기 그지없는 영력이 패기와 함께 혼을 묶어 버린다.
추에 묶여 바다에 빠진 사람처럼 한없이 가라앉는다.
단숨에 사내의 혼을 속박하는 데 성공한 설천위는 반항하는 사내를 다른 혼들에게 맡긴 채 다시 걸었다.
고작해야 몇 초 만에 일어난 일.
허나, 그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던 곤괴는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괴물 같구나.”
“성장했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궁금하구나.”
몸 전체에서 흘러넘치는 영력.
보는 것만으로 짓눌리는 느낌이 드는, 그런 힘이다.
그렇기에 곤괴는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깊이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올 의문이 아니니까.
곤괴가 머릿속에서 잡념을 떨쳐 내는 사이, 철백의 앞에 도달한 설천위는 서하영의 옆에 유예린을 내려놓으며 철백을 바라봤다.
“유 매가 싸우던 곳에 암혈단의 부상자들이 있어. 데려와 줘.”
“알겠다. 서 매는…….”
“확실하게 치료해 줄 테니까 걱정 말고.”
“음.”
설천위의 호언장담에 철백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알기론 그의 친구는 결코 허언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게 단숨에 움직이는 철백.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곤괴는 이내 그 뒤를 따랐다.
“나도 함께하마. 손녀의 치료는 조금 미뤄야겠구나.”
“죄송해요. 어느 정도 정리되면 바로 시작할게요.”
“천천히 하거라. 괜히 조급하게 하다가 사람이 죽으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음의 극치이니.”
“예. 확실하게 할게요.”
설천위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곤괴마저 떠나고, 자리에서 일어난 설천위는 서하영에게 다가갔다.
[놔둬라. 놈에게서 시독의 배합을 알아낸 뒤에야 제대로 치료를…….]
“아, 괜찮아요.”
말리는 신의에게 대충 손을 저어 준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서하영의 팔을 쥐었다.
그리고 빨아들인다.
[독기 흡수(毒氣吸收)]
이 스킬도 배워 두길 잘했네.
생각보다 쓸모가 많아.
[음? 이건?]
설천위가 무엇을 하는지 깨달은 신의의 눈이 점점 경악으로 물든다.
[위험하다! 아무리 너라도 시독은……!]
“아, 그것도 괜찮아요.”
시독에 의해 내부가 상하기 직전, 설천위는 스킬 하나를 더 발동했다.
[해독(解毒)]
단숨에 치료되는 건 아니나, 어느 정도 시간만 들이면 충분히 해독해 낼 수 있다.
시독은 독하긴 해도 그 독의 수준이 그리 높진 않다.
‘철강시의 시독이면 이 정도면 충분하지.’
후에 나오는, 진짜 전설에나 나올 법한 강시들의 독이면 이거론 부족하겠지만.
서하영의 독을 빨아들이며 동시에 해독까지 진행한 설천위는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서하영의 호흡을 정상까지 되돌리는 데 성공했다.
[약하게 남겨 놨구나.]
“이 정도면 내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음,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적절한 도움만 준다면 독은 득이 되어 돌아오는 법이니.]
신의의 긍정에 손을 뗀 설천위는 마른침을 삼키며 이쪽을 바라보는 중년인을 보곤 빙긋 웃었다.
“남척 아저씨죠? 곤괴 할아버지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으음, 그렇소, 소협. 그렇다면 소협이 설천위 소협이겠구려?”
“에이, 소협은 무슨. 그냥 천위라고 부르세요.”
대충 손을 휘저은 설천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아직도 공포에 떨며 그의 옆에 붙어 있는 남혜를 보니 쓴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약재가 필요합니다.”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데 쓸 약재 말인가?”
“예, 상당히 많이 필요해요. 그리고 치료를 위한 도구들도요.”
“침이나 뜸을 말하는 것이로군.”
과연 이름난 상단의 주인.
설천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남척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바로 구해 오마.”
“감사합니다.”
“아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고개를 저은 남척은 몸을 돌려 남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혜야, 이 아비가 해야 할 일이 생겼구나. 그러니 아비가 돌아올 때까지 방 안에서 얌전히 기다릴 수 있겠느냐?”
“……우웅. ……네.”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남혜.
그 모습에 부드럽게 웃은 남척은 이내 설천위가 불러 주는 약재를 단숨에 암기한 뒤 바로 산 아래로 뛰어갔다.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설천위는 이내 몸을 돌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멍석을 가져와 땅에 깔아서 사람이 누울 만한 공간을 만들어 놓고, 탕약을 끓일 준비와 깨끗한 물까지 어느 정도 마련했을 때.
“천위! 이 숫자가 끝인가?”
철백과 곤괴가 돌아왔다.
대체 왜 여러 번 안 움직이나 했더니, 거대한 들것을 만들어 열 명이 넘는 인원을 한꺼번에 옮기다니.
무식한 자식.
[저, 저! 무식한 것이!]
환자의 상태를 우려한 신의가 눈을 부릅떴지만, 그와 함께 부상자를 데려온 곤괴가 고개를 저었다.
“확실하게 챙겨 왔으니 문제없을 걸세.”
곤괴의 장담대로 별문제가 없었는지 사람들의 이곳저곳을 확인한 신의는 이내 별말 없이 설천위에게로 돌아왔다.
“서 매의 상태는?”
“멀쩡해. 남 아저씨가 약재를 가져오면 전보다 더 튼튼하게 회복할 테니 걱정 마.”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철백.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설천위는 유예린의 곁에 다가갔다.
완전히 망가진 몸.
여러 곳이 골절되었고, 치유되고도 흉터로 남을 자상도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 있다.
그걸로 충분했다.
유예린의 이마를 쓸며 쓰게 웃은 설천위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시작하죠.”
[음, 약재가 없어도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
신의의 긍정과 함께 그를 자신의 육체에 빙의시킨 설천위는 그에게 주도권을 내어주고 한발 물러났다.
외부는 신의에게 맡겨 놓고…… 이쪽은 내부를 다스려 볼까.
설천위의 의식이, 서서히 내면세계로 가라앉았다.
* * *
“……이건.”
간간이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혈을 이곳저곳 누르던 신의는 해가 지기 전에 남척이 가져온 약재와 의료 도구를 받자마자 쉴 틈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침을 놓고, 탕약을 끓인다.
거기에다 몇몇 약재는 바로 짓이겨 바르는 약으로 만들어서 환부에 도포한다.
어떤 낭비도 없는 깔끔한 동선과 움직임.
“……천위가 저 위치로 미리 준비해 놓은 이유를 알겠군.”
탕약을 끓이는 장소와 맑은 물을 둔 장소.
어느 것 하나 동선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 배치되어 있다.
참, 대체 언제 저런 뛰어난 의원의 혼을 데려온 건지…….
고개를 저은 철백은 이내 고개를 돌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서하영을 바라봤다.
그저 자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편안해진 안색.
일어나면 지금 끓이고 있는 탕약 중 하나를 먹여야 한다고 했지.
철백이 그저 하염없이 서하영을 바라보고 있을 때.
‘확실히 뛰어나구나.’
마찬가지로 신의가 사람들을 치료하는 과정을 지켜보던 곤괴는 자신의 무릎 위에 쪼그려 앉아 있는 손녀를 바라봤다.
“혜야.”
“네.”
“혜아는 이곳을 내려가면 무엇이 하고 싶으냐? 서당도 좋고, 무관도 좋다. 하고 싶은 것이 있느냐?”
곤괴의 물음에 잠시 입을 우물쭈물하던 혜아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언니 오빠가 다니는 학관에 가고 싶어요!”
“무림학관에 말이냐?”
“네!”
“그래?”
그래, 그것도 좋겠구나.
고개를 끄덕인 곤괴는 웃으며 남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다면, 이 할아비가 힘을 좀 써 보마.”
몸만 나으면, 자식 놈이 배우지 못한 무공을 전수하는 것도 좋겠지.
빙긋 웃은 곤괴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이놈들아! 와서 손이나 보태라! 신선놀음 그만하고!”
[이놈들아! 와서 손이나 보태라! 신선놀음 그만하고!]
뿔이 난 신의의 외침이 초가집에 울려 퍼졌다.
* * *
“또 실패인가.”
입에 문 당과를 꺼낸 소녀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생각해요?”
“…….”
침묵.
그녀의 물음에 아무 대답 없이 침묵하던 사내는 자신의 몸보다 훨씬 거대한 옥좌에 앉아 낮게 가라앉는 눈으로 소녀를 바라봤다.
“에이, 또 그렇게 그냥 넘기려고 하신다. 노공이 죽은 건 상당히 큰일인가요?”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됐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
소녀의 말에 고개를 저은 사내는 담담한 눈으로 소녀를 바라봤다.
“허나, 노공의 죽음으로 우리는 하나 알게 된 것이 있지.”
“그 녀석이 위험하다는 거요?”
“그래. 그리고 최근에 들어온 정보가 있다.”
“아, 혈성지록(血聖之錄) 말이죠?”
까득.
당과를 깨물어 부순 소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 물건은 단순히 역사만 기록되어 있는 건 아닌 것 같으니까.
“되찾아야죠. 그럼 이번엔 제 방식대로 해도 될까요?”
소녀의 물음에 사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혈주의 허락.
당과의 파편을 씹어 삼키던 소녀의 눈동자가 기이한 광기로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