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157화-애력(愛力) (8)
아득한 속도도.
경악스러운 위력도.
불굴의 단단함도 없다.
오로지 변화. 변하고 또 변하다가 끝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검.
무흔(無痕)의 검격.
보이지 않는다.
그것 하나만으로 얼마나 상대하기가 까다로워지는지는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검을 분명 휘둘렀는데, 휘두르는 것이 보이는데 궤적이 없고.
궤적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곳에 궤적이 없다.
그렇기에 노공은 이를 악물고 검술을 펼쳤다.
어디를 향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니 모든 곳을 다 막아 내는 수밖에.
카가가가가각.
전신을 가린 검막에 무형의 검격이 부딪히며 기와 기가 갈려 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섬뜩하기 그지없는 공격.
허나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선유적월검(仙遊跡月劍) 제1초 선월(線月)]
본래의 궤적과 살짝 다른, 비틀어진 궤도를 만들어 내는 초식.
설천위가 사용할 때는 정말 약간의 차이를 두는 것이 전부였던 초식이지만…….
“흡?!”
다급하게 숨을 참으며 검을 휘두른 노공은 전신을 관통하는 예기에 이를 악물었다.
하마터면 베일 뻔했다.
아주 조금만 반응이 늦었다면.
조금 전의 공격을 막기 위해 검막을 펼친 상태가 아니었다면.
분명 어디 한 군데 근육이 끊어졌다.
궤적을 숨기고.
궤적을 만들고.
궤적을 바꾸는 검.
조금 전에 보았던 무흔의 일격만이 경계의 대상이 아님을 깨달은 노공은 침착하게 검을 휘둘렀다.
자신의 검은 강(强)의 검.
상성이 좋지 않다.
천천히, 확실하게 그리고 동시에 아주 조금씩 짓밟아 가며 싸워야 한다.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성급하게 나서선 안 된다.
한껏 가라앉는 눈빛으로 노공은 현태중의 검을 받아 내기 시작했다.
‘그 계집의 검과는 또 다르군.’
읽어 내는 것조차 난해해 겨우겨우 그 끝에 닿아 막아 내면서도 노공은 차분하게 현태중의 검을 읽었다.
아예 검 자체를 숨기는 유예린의 검과는 다르다.
은신이라기보다는 환혹 혹은 환상이라 불러야 하는 종류의 검.
숨기는 것이 아니라 속이는 것.
베고 찌르는 모든 동작에 작은 속임수가 들어가 있고, 그것들이 모여 검 자체를 의식 밖으로 날려 버린다.
까딱하다간, 정말 눈뜨고 코 베이듯 목을 내어줄 수도 있는 검.
“흡!”
그렇기에, 노공은 한껏 긴장한 상태를 유지했다.
왜냐하면…….
[소적검(消跡劍)]
카가가각!
지금처럼, 아예 전체를 막는다는 선택지를 언제 취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일순 또다시 아예 사라져 버린 검을 막기 위해 중요 사혈은 물론 급소를 모두 검막으로 감싼 노공은 검막 위를 두드리는 강한 충격에 이를 악물었다.
“역시 아쉽군.”
[역시 아쉽군.]
그리고 그런 노공을 보며 검을 거두는 현태중.
그는 검을 쥔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쉬움이 담긴 그 표정에 노공은 가볍게 숨을 고르며 물었다.
“전에 싸웠을 때보다 오히려 검이 날카로워졌군.”
일순 궤적이 사라지는 그 공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전의 모든 공격보다 한층 더 날카로워진 게 느껴졌다.
일전에 싸웠을 때보다 최소 반수 이상 검이 날카로워졌다.
정확한 노공의 지적에 현태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가 성장한 덕이지.”
[이 아이가 성장한 덕이지.]
검을 쥔 손을 보며 현태중은 검을 들었다.
감각이 다르다.
이 아이의 영적인 재능이 성장하며 빙의가 더 강력하게 이뤄졌다.
육체의 감각은 어느 때보다 선명하며, 생전만큼이나 육체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물론, 육체의 수준이 생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나약하지만…….
“감각이 돌아온다는 것 하나만으로 검은 한층 더 날카로워지는 법이지.”
[감각이 돌아온다는 것 하나만으로 검은 한층 더 날카로워지는 법이지.]
담담하게 말하며, 검을 당기는 현태중.
그 모습에 노공은 땅을 박찼다.
상대가 공격하는 것을 일일이 보고 있을 순 없다.
관찰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언제까지고 방어만 하고 있을 순 없는 법.
승기를 잡기 위해선 움직여야 할 때다.
검을 당긴 기수식을 취한 채 노공의 검과 마주하게 된 현태중.
현태중이 아직 준비 중인 상황에서 노공의 검이 그 머리 위로 떨어진다.
그리고 그 순간.
쾅!!
“크흑?!”
용의 거대한 꼬리가 노공의 측면을 후려갈겼다.
육체를 뒤흔드는 강력한 충격.
순간적으로 호신지기를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어디 한 군데가 부러졌을 거다.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뭐 하는 것이냐!”
저 쓸모없는 놈은 대체 뭘 하고 있기에 이 용이 나를 공격한단 말이냐!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를 악문 노공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상황을 보기 위해 눈을 돌려?
기파를 읽어 내?
그게 가능할 리가 있나.
고오오오오오.
눈앞의 이 검에서 시선을 돌리는 순간, 날아가는 건 내 목이 된다.
모든 신경을 집중해라.
마치 주변의 모든 공기를 빨아들일 것 같은 기세.
바람이 저 녀석을 향해 불고 있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
[선유적월검(仙遊跡月劍) 제9초 풍월(風月)]
바람이 불었다.
저 녀석을 향해서가 아니라 이쪽을 향해서.
날카로운 예기를 품은 바람이 전신을 두들긴다.
이를 악물고 검막을 펼치면서도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해 낸다.
용의 일격에 자세가 흐트러진 것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막고 반격까지 할 수 있을 만한 공격.
하지만, 흐트러진 상태론 방어하는 것이 한계…….
“……언제?”
“바람이 불어 구름을 걷어 내기 이전부터 달은 이미 떠 있었느니라.”
[바람이 불어 구름을 걷어 내기 이전부터 달은 이미 떠 있었느니라.]
가슴을 길게 가르는 참흔(斬痕).
흐르는 피가 옷 전체를 붉게 적신다.
“소적검이 미완성이 아니었다면, 그것으로 끝내 줬을 것을.”
[소적검이 미완성이 아니었다면, 그것으로 끝내 줬을 것을.]
지금 설천위의 몸에 부담이 가지 않는 수준으로 펼치면, 제 위력이 안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두 번이나.
어디로 올지 모르니 전부를 막는다는 식의 검막조차 뚫지 못했으니 그 위력의 절감은 말할 필요도 없다.
허나 자고로 무인은 필살기만으로 적을 죽이는 이가 아니다.
모든 검이.
모든 순간이.
적을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 무(武)다.
“검을 놓는다면, 고통 없이 보내 주마.”
[검을 놓는다면, 고통 없이 보내 주마.]
검을 들어 올리며, 한층 더 기세를 끌어올리는 현태중의 마지막 자비에 노공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기엔 내 삶이 썩 순탄치 않았느니라.”
회광반조(回光返照).
죽음 앞에서 모든 기운을 끌어올리는 노공의 모습에 현태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검은 순식간에 수십 개의 궤적을 만들어 낸다.
베고 또 벤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참상에 난자당하는 노공의 육체.
끌어올리던 선천지기마저 역류하는 강렬한 충격.
그 상황에 노공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내가 반응하지도 못할 정도로 빠르게?
제대로 말을 이어 나가지 못하는 노공의 질문이었지만, 그 의도를 눈치챈 현태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약해진 것이다.”
[나약해진 것이다.]
현태중의 대답.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노공은 깨달았다.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은검과 암혈단과의 전투.
궤적을 읽을 수 없어 몸 전체를 막느라 소모된 내공.
육체를 충격만으로 뒤흔든 용의 일격.
몸 전체를 가르는 참격에 의한 상처와 출혈.
보통의 사람이라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
아니, 웬만한 무인이어도 죽었을 상태.
“허, 허허.”
육체는 이미 꺾여 버린 것이다.
이 공간을 잠식한 거대한 기운에 꺾여 버린 것이다.
이 노공이 애송이의 기세에 꺾여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한 것이다.
사실을 깨달은 노공은 허탈한 웃음과 함께 주저앉았다.
[크악!]
고개를 돌리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용과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봉백의 모습이 보인다.
어떻게든 버텨 보겠다고 악을 쓰는 모습을 보니 왜 용이 자신을 향해 공격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크르르르!
용만이 아니다.
검은 아우라를 두른, 웬만한 대호의 뺨을 후려칠 것 같은 크기의 늑대가 봉백을 물어뜯고 있었다.
“……괴물이 따로 없군.”
저자는 그가 알기론 분명 상당히 강한 존재인데.
이리 압도적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 말이 되는 건가.
거기에다 자신을 상대하면서 동시에?
고개를 돌려 설천위를 바라본 노공은 이를 악물었다.
기세가 변했다.
“정녕 괴물이 됐구나.”
“뭐, 조금 무리를 하고 있지.”
진짜 한시가 급하니까.
영력과 패기를 너무 과도하게 쥐어짜 슬슬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역시 청랑까지 실체화시킨 건 너무 무리였나.
살짝 미간을 찡그린 설천위는 검을 넣고 도를 꺼내며 노공을 향해 걸어갔다.
“송곳은 결국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법. 네 녀석은 반드시…….”
“오케이, 거기까지.”
의미심장한 노공의 경고를 끊으며 설천위는 도를 휘둘렀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육체로 제대로 된 반항도 하지 못하고 목이 잘리는 노공.
본래라면, 이것으로 끝나야 할 것이지만…….
“그 뒷이야기는 천천히 하자고.”
[네놈?!]
노공의 혼을 강제로 붙잡은 설천위는 그를 억압해 짓눌러 갈무리했다.
노공의 혼을 순식간에 제압해 빨아들인 설천위는 그대로 몸을 돌려 아직도 분전하고 있는 봉백을 바라봤다.
저쪽도 이제 한계나 다름없는 상태.
[흑관(黑棺)]
[크학?!]
일순 움직임을 봉인하는 흑관으로 인해 봉백이 빈틈을 보이자, 그 틈을 파고든 청랑이 봉백의 팔을 물어뜯었다.
어깨 아래로 사라진 왼팔.
균형이 흐트러진 육체로 거대한 용의 몸통이 떨어진다.
[카흑!]
뿌드득.
압도적인 힘을 이겨 내지 못하고 결국 몸을 이루는 뼈가 부서져 나가는 봉백.
빈말로도 멀쩡하다고 할 수 없는 처참한 몰골이 된 봉백의 목을 향해 도(刀)가 스쳐 지나간다.
[내가, 이렇게……!]
“허무하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말 안 해도 전부 알고 있으니까.
대사가 너무 뻔하다.
반쪽짜리 육체와 분리되기 시작한 봉백의 혼을 붙잡으며 설천위는 단숨에 그 혼을 흡수했다.
딱히 노공처럼 본래 상태를 유지해서 흡수할 필요는 없다.
별로 쓸모 있어 보이진 않으니까.
봉백의 혼을 흡수하며 설천위는 빠르게 움직였다.
암혈단의 부상자들을 추스르고, 죽은 이들의 혼을 어루만진다.
“질긴 목숨들이네.”
부상자들을 전부 모으고 나니 대주급에 속한 이들은 전부 목숨이 붙어 있었다.
물론 지금이라도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것 같은 상태지만…….
“일할 시간이야.”
[흥, 문제없다.]
코웃음과 함께, 설천위의 몸에 깃드는 혼.
딱히 큰 부담은 없다.
부담이 있더라도 했을 테지만.
“뭘 도와줄까요?”
“일단 출혈부터 잡자꾸나.”
[일단 출혈부터 잡자꾸나.]
보조로 청아가 움직이고, 부상자들의 앞에 선 설천위는 웃었다.
아니.
“이 시간 이후로, 더 이상의 사망자는 없을 것이다.”
[이 시간 이후로, 더 이상의 사망자는 없을 것이다.]
신의(神醫)가 웃었다.
* * *
“후, 과연 곤괴로군요. 호호호.”
이리저리 흐트러진 옷매무새.
필사적으로 도망치면서 생긴 흔적이다.
물론, 덕분에 거리를 상당히 벌릴 수 있었지만.
‘진짜 괴물이네.’
겉으론 웃고 있지만,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은 어쩔 수 없었다.
철강시를 우습게 찢어발기는 압도적인 무력.
덕분에 아직 철강시로는 화경급은 상대할 수 없다는 정보를 얻긴 했지만…….
“손해가 너무 크네.”
“목이 날아가면 손해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 따윈 하지 못하게 될 터인데?”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며 주먹을 쥐는 곤괴의 모습에 사내는 어색하게 웃었다.
“응, 역시 안 되겠어.”
튀자.
이 정도로 거리를 벌려 놨으니, 남은 두 구의 철강시를 미끼로 던지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다.
거기에…….
“가라!”
망자를 일으키는 소귀법으로 죽은 혈사련 놈들의 시체를 일으킨다.
쓸모없는 놈들이지만, 시간 벌이 정도는…….
“어이!”
순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오한에 반사적으로 땅을 박차지만, 거기까지.
“넌 또 뭐야?”
유예린을 품에 안은 채 얼굴을 한껏 구긴 설천위의 기세가 그 발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