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151화-애력(愛力) (2)
암혈단(暗血團).
섬서유가의 무력대 중 그 명성이 가장 높은 이 단은 본래 소가주 직속의 무력대가 아니었다.
가주 직속.
가주가 직접 길러 낸 정예.
그 무력은 합공을 통해 능히 화경급 고수를 이길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힘을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 암혈단은 노공이 빠진 혈사련의 무사들을 빠르게 줄여 나가고 있었다.
까득.
‘이놈들……!’
그야말로 압도적.
일방적인 학살이나 다름없이 죽어 나가는 부하들의 모습에 노공은 이를 악물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들을 도와주고 싶다.
하지만, 그것이 하책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노공은 되레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반 시진이라고 했느냐?”
지금 해야 할 것은 부하들을 돕기 위해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란 전장에서 홀로 온전할 수 없는 존재.
눈앞의 적이 휘두르는 검을 피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
검을 피하지 못한 아군이 이미 죽어 피를 흘리며 쓰러지면 그것은 현실이 되어 뼛속으로 스며든다.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한 순간, 인간이란 나약한 존재는 올곧게 자신을 유지할 수 없다.
아군이 죽어 나가면 공포에 빠지고.
적군이 죽어 나가면 기세가 등등해진다.
그것이 본능이고, 그것이 심리다.
인간이 홀로 온전할 수 없는, 무리라는 괴물이 되는 곳.
그것이 바로 전장.
그런데 그 괴물의 머리가 눈앞에 있다.
이 아름다운 괴물은 무방비해진 자신의 등에 송곳니를 박아 넣을 수 있는 위험한 맹수다.
하지만 동시에 이 상황의 중심이 되는 존재.
이 녀석을 베면, 기세를 가져올 수 있다.
그것이 부하들의 희생을 더 적게 만드는 일이자 임무의 성공으로 가는 길이다.
의지를 다진 노공의 검이 수십 개의 중첩을 만들어 내며 움직인다.
고작해야 초절정에 오른 어린 녀석.
주제도 모르고 덤비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아비를 상대로 반 시진을 버틴 것이 진짜라고 생각하느냐?”
화경급 고수라고 해도 결국 사람.
천륜의 정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에 노공은 유예린의 자신감을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이 방심으로 이어져서는 안 되지만, 그 말에 겁먹을 필요도 없다는 소리다.
묵직하게 중첩된 강기를 담은 일격이 유예린을 향해 떨어진다.
화려한 초식 따윈 없다.
눈속임이란 것도 그것을 쌓아 올린 자만이 가능한 것.
변검이나 환검이 무용지물이라고 말하진 않겠으나, 최소한 비슷한 급에서 사용하려면 그 나름대로의 수준이 필요하다.
노공의 검은 위력에 치중했기에 환과 변에서 그 수준이 부족하다.
허나, 그렇기에 그 위력만큼은 강력하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피가 튀고 살이 저며질 정도로.
그렇기에 노공은 자신 있게 검을 휘둘렀다.
어떻게든 회피하려 할 것이고, 최소한 방어라도 하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승기는 이쪽으로 기울어진다.
내공도, 경험도 이쪽이 우세하다.
하물며 상대는 강기조차 쓰지 못하는 반푼이.
방어라는 선택지가 거의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회피하는 것에 맞춰 상대하면…….
쾅!!
허공에서 강력한 충돌음이 터진다.
정말 찰나의 시간.
사람이 눈을 깜빡하기도 전에 떨어졌어야 할 검이 중간에 강력한 장애물을 만나 튕겨 나온다.
그 과정에서 검에 담긴 막강한 경력조차 흩어져 굉음이 산 전체를 뒤흔든다.
“확실히, 아버지이기에 봐주신 점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노공을 보며, 어느새 소매 속에 두 손을 감춘 유예린이 웃었다.
“하지만, 저희 아버지가 봐주셨다고 해도 지금의 어르신과 비슷할 것 같군요.”
유려한 미소를 머금은 입가와 달리,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은 노골적인 도발이다.
우리 아빠보다 넌 딱 봐도 못해 보이니까 충분히 이길 수 있다.
그 노골적인 도발에도 노공은 분노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으니까.
지금의 충격.
대체 어떻게 한 것이지?
어떤 수법을 쓴 것이지?
도저히 가늠이 되질 않는다.
미지는 곧 위협이며, 공포이다.
자신의 첫 공격이 알 수 없는 수법에 의해 막혔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노공의 움직임은 위축됐다.
한층 더 움직임이 조심스러워진 것은 물론이고, 그 눈빛에는 경계심이 가득 차오른다.
후속 공격 없이 자세를 다잡는 노공을 보며 유예린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좋지 않은 선택이에요.”
슬쩍 돌아가는 유예린의 시선, 그 시선의 방향을 눈치챘지만 노공은 애써 무시했다.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절반에 가깝게 숫자가 줄어 버린 자신의 부하들을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야 뻔하다.
그런 식으로 하면 결국 죽는 건 너다.
그것은 도발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공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조금 전에 보았던 이상하리만치 읽어 낼 수 없는 공격.
또 하나는…….
‘노리고 있군.’
전장에서 반걸음 물러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들의 존재다.
빈틈이 보이면 당장에라도 찌르겠다는 기세로 대기하고 있는 이들.
저들이 이쪽을 보지 않고 부하들을 봤다면 줄어드는 속도가 이 할은 더 빨라졌을 테지.
그럼에도 부하들의 희생을 감수하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방금 일격, 아무래도 많이 쓸 순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되겠군.’
섣부른 짐작은 금물이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됐다.
짧지만 깊은 고뇌.
그 끝에 노공은 다시금 검을 세웠다.
결론이야 빠르게 났다.
뭐가 됐든 뚫어야 한다.
이대로 가면 어장에 갇힌 물고기처럼 서서히 그물에 걸려들 뿐이다.
뚫어 낸다.
그물을 찢고, 이 포위를 뚫어 내는 거다.
두 눈을 번뜩인 노공이 유예린을 향해 달려든다.
그에 맞춰 팔을 휘두르는 유예린.
“흡!”
쾅!
그리 멀지 않은 두 사람 사이에서 또다시 굉음이 터져 나온다.
기와 기가 부딪혀 생기는 폭음.
그 폭음의 충격 속에서 노공은 끊임없이 전진했다.
그리고 벤다.
검을 휘둘러 베고, 또 벤다.
쾅!
충격이 몸을 뒤흔들지만 벌써 세 번째다.
이미 읽어 낼 수 있는 수 안에 들어간 공격.
벤다.
그것이 가능하기에 화경이다.
챙!
뒤쪽에서 날아온 비수를 한 손으로 쳐 내며 몸을 비튼다.
빈틈을 노리는 놈들의 공격을 쳐 내는 것?
일도 아니다.
고작해야 멀리서 견제만 하는 수준이니 별다른 방해가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전진한다.
앞으로 나아가고, 또 나아간다.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질치는 유예린을 향해 끊임없이 검을 휘두른다.
베고 또 벤다.
충격에 휘말려, 검이 멈췄던 것도 잠시.
이내 적응을 끝낸 노공의 검은 매섭게 유예린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피해 내지만 그 여파에 옷이 찢어지고, 피부가 갈라진다.
강렬한 충격이 지척에서 터지며 곱게 단장해 놨던 머리가 산발한 채 흐트러졌다.
가끔씩 강렬한 충격이 노공의 검을 날려 치명상을 피해 냈지만, 딱 거기까지.
노공의 검은 확실하게 유예린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렇게 수십 번의 공격이 오갔을 때, 노공은 놀람이 담긴 눈으로 유예린을 바라봤다.
“광기(狂氣)가 선을 넘었구나……!”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검을 튕겨 내는 그 강렬한 충격.
그것의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이젠 움직이지 않는, 유예린의 왼팔.
뼈는 상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그 혈도와 근육은 만신창이가 됐는지 피가 흐른다.
순간적인 내공의 격발.
압축시킨 내공을 일시에 격발한다.
그 와중에 은신의 묘리를 담아내 그 시작과 과정을 숨긴 것은 그야말로 경이롭기 그지없는 기술이지만…….
“독하구나, 독해!”
압축된 내공이 혈도를 순간적으로 통과하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몇 번이나 반복해 쓰는 것으로 보아하니, 특수한 단련으로 그것을 어느 정도 버틸 만한 혈도를 만든 것 같으나 그래도 분명 한계는 있다.
화약을 이용해 침이나 구슬을 날리는 암기가 잘 안 쓰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일회용이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발생한 열과 충격으로 그 관이 망가져 두 번째부터는 정확한 조준이 힘들어져 일회용으로밖에 쓸 수 없어서다.
그걸 몸으로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아무리 단련을 해도 인간의 육체로 그것을 해낸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될 만큼 무모한 행동이다.
그런데 그것을 아무런 사전 동작 없이 실행하는 정신력과 그것을 숨기는 기술력이라니.
“어린 시절부터 연습하지 않으면 이리 많이 아니, 쓰는 것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기술이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상황을 고려하면 어떻게든 그 빈틈을 찔러 빠르게 마무리해야 하지만, 도저히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 노공이 잠시 검을 멈추고 질문을 던졌다.
“무엇이 어린 너를 그리 만든 것이냐?”
가문의 강요? 아니다.
이건 그냥 연습한다고 되는 기술이 아니다.
압도적인 재능에 자기 학대에 가까운 훈련이 필요한 기술.
그것을 대체 왜…….
“필요했으니까요.”
노공의 질문에, 아직은 여유가 있는 오른손으로 검을 쥔 유예린은 옅은 미소와 함께 노공을 바라봤다.
은신의 극을 담을 수 있게 된 것도.
음(音)을 다룰 수 있게 된 것도.
압(壓)을 다룰 수 있게 된 것도.
전부 필요해서다.
무엇에?
한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
지이잉.
유예린의 오른손에 들린 비수가 기이한 소리를 흘린다.
압은 이제 거의 쓸 수 없게 됐으니 아끼던 것을 꺼낼 때가 됐다.
“음?”
순간 몸 안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감각에 노공은 본능적으로 내공을 움직였다.
“흡!”
내부로 스며드는 힘을 강제로 튕겨 낸다.
“……음공까지 익혔더냐?”
“보이지 않는 것을 익힐 필요가 있었습니다.”
형제간의 경쟁.
살인과, 상대를 불구로 만드는 것 이외에 전부 허용되는 혈육 간의 싸움.
앞의 두 가지가 금지됐으니 인간적인 투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으나, 인간은 생각보다 더 잔인한 생물이다.
상대를 한 번에 무력화시킬 수 없으니 끊임없이 짓밟는다.
그 내면에 자신을 향한 공포를 새겨 놓기 위해 펼쳐진 수많은 폭력과 폭언.
그 속에서 어리고 나약했던 유예린은 대놓고 무기를 손에 쥐는 일조차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은신의 극의를, 음공을 익혔고, 그 두 가지를 발전시켜 압을 만들어 냈다.
살아남기 위해서?
아니다.
어차피 죽지 않으니 가만히 있었으면 그냥 조용히 살아갈 수 있었다.
원하는 것은 오로지 한 사람.
한 사람의 곁에 있는 것.
한 사람을 곁에 두는 것.
“자, 계속하지요.”
어느새 미약하게 경련하는 왼손에까지 비수를 쥔 유예린이 웃는다.
“제 검은, 반드시 당신에게 닿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더라도 그 실체는 있으니.
대체 왜 이리 무모하게 자신과 싸우려고 하는 것일까.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없어 의심하면서도 노공은 그녀에게 검을 겨눴다.
부하들은 이제 진짜 최후까지 몰린 상황.
저 아이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어 금세 끝낼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렇다면, 이쪽도 패를 숨기고만 있을 순 없지.
“네가 하고 있는 이 발악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면 그래도 그리 서 있을 것이냐?”
“……별동대인가요?”
“눈치가 빠르구나.”
노공의 긍정에 잠시 그를 바라보던 유예린은 작게 웃으며 물었다.
“그곳에 당신 같은 수준의 강자가 있나요?”
“……없다면?”
“그렇다면 문제없겠네요.”
양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는 유예린.
두 자루의 비수가 허공에 부딪혀 맑은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과 함께 유예린은 빙긋 웃었다.
“제 낭군님 주변엔 재능이 넘치는 분들이 많거든요.”
* * *
남혜가 머무는 오두막.
유모와 남혜, 남척과 서하영이 전부 집 안에서 쉬고 있는 사이, 홀로 마당으로 나온 철백은 이리저리 목을 꺾었다.
“빠르군. 별동대인가?”
“……네놈은?”
“철백이라고 한다.”
한쪽 다리에 의족을 대고, 도끼를 어깨에 걸친 거한.
그를 보며 철백은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시작하지.”
양팔을 가슴 앞쪽으로 모은 자세를 취한 철백의 기세가 거악(巨嶽)과 같이 적들을 짓누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