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149화-내놔 (7)
[모른다.]
“이런 비협조적인 태도는 매우 좋지 못한데?”
[흥, 그렇게 말해도 모르는 건 모르는 거다.]
휙 고개를 돌리는 신의.
설천위의 존재감에 겁먹은 혼이 바들바들 떨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굳은 의지로 반짝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설천위는 이내 그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방금 본 거로 증명됐잖아? 딱히 당신 적은 아닌 것 같지 않아?”
[흥, 못 믿는다.]
아, 이 인간 불신에 빠진 의원 같으니라고.
어차피 죽은 몸 아주 배 째라 이건가?
뻔뻔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치는 신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설천위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원하는 걸 말해 봐.”
[복수.]
아주 바로 나오네.
이 속물 같으니라고.
뭐, 그런 속내가 이해는 된다만.
게임에서도 퀘스트로 이것저것 냈으니까.
그땐 그냥 복수 때문인 줄 알았지만, 이제 보니 아군 식별의 의미도 있었던 것 같고.
“지금 당장은 안 돼. 그건 당신이 가장 잘 알 텐데?”
[……네 녀석, 그놈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냐?]
“알지.”
살짝 불신이 깃든 눈빛.
그 눈빛에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알고 있는 이유가 중요한 건 아닐 텐데? 중요한 건 그걸 이뤄 줄 수 있느냐 없느냐 아닌가?”
[……흥.]
작게 코웃음을 치는 신의.
하지만 그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이미 설천위에게 기울고 있었다.
[놈들에 대해 알면서도 복수를 이뤄 줄 수 있다고 하는 거냐?]
“뭐, 그렇지.”
단호하면서도 확고한 답.
그 대답에 신의의 눈이 한층 더 깊어졌다.
너무나 확고하기에 믿을 수 없다.
대체 어떻게?
그놈들은 은밀하다.
이 무림에서 인간의 삶을 넘는 시간 동안 암약해 왔고, 이어져 왔다.
강호 곳곳에 스며들었으며, 그 힘은 능히 구대문파 따위는 충분히 찍어 누를 수 있을 정도다.
이 넓은 강호에 그 힘이 퍼져 그러지 못하고 있을 뿐.
그런데, 어찌 저리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가.
[놈들은…….]
“아직 신이 되지 못한 반푼이일 뿐이야.”
더 이상 대화가 길어지는 것이 싫은 설천위가 신의의 말을 끊었다.
게임 속에서 알아낸 지식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증명하는 것도 귀찮다.
그 증명은 결국 거짓말로 해내는 수밖에 없으니까.
결과는 진실이 될지라도 그 과정이 거짓이면 귀찮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런 과정 따윈 생략한다.
결국 믿지 못한다면 힘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하지만, 그 전에 마지막 기회다.
자리에서 일어나 신의의 앞에 선 설천위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나는 놈들의 머리를 확실하게 제거할 거다. 당신이 돕든 말든 어떤 식으로든.”
[…….]
“그러니, 내게 손을 빌려주는 것만으로 당신의 복수는 완성되는 거야. 한 손 거드는 거니까.”
천천히 내미는 손.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보던 신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 손을 잡았다.
[……믿어 보마. 애송이.]
* * *
귀주성에 있는 수많은 석회동굴.
사혈천은 이곳에서 한 가지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다.
혼의 집합.
인간의 손이 잘 닿지 않는 석회동굴에 악귀들을 푼다.
그들에게 인간을 제공하며 그들의 성장을 돕는다.
커져 가는 악귀들.
석회동굴 내부에 차오르는 원념(怨念).
석회동굴 곳곳으로 스며드는 피와 살.
그 끝에 무엇이 탄생할까.
작은 씨앗을 심어 놓고 그것을 기다리는 것은 사혈천이 세운 계획 중에서도 상당한 중요도를 지닌 계획이었다.
[때문에, 이곳에도 그것을 관리하는 인간이 있다.]
“그래서?”
신의를 얻고 동굴을 빠져나가는 길.
약재의 위치를 묻는 질문에 이상한 대답을 하는 신의를 보며 설천위가 삐딱하게 고개를 꺾었다.
대체 무슨 상관인데 그게.
만약 복수의 증명으로 그쪽부터 처리해 달라는 거라면…….
교육이 필요할 것 같은데.
설천위의 눈 깊은 곳이 스산하게 빛나는 순간,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의는 말을 이어 갔다.
[네가 찾는 약재는 그 인간에게 있다.]
“……하?”
신의의 재교육 계획은 빠르게 파기됐지만, 그 이상으로 골치 아픈 문제에 직면한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 인간, 얼마나 강한데?”
[최소 초절정이고, 주변에 상당한 수준의 호위가 깔려 있다.]
이런 미친.
“그런 인간이 대체 약재를 왜 가지고 있는데?”
[내가 생전에 관리하던 약재는 진즉에 전부 압수당했다.]
씁,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결국 쳐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소린데…….
고민이 깊어진 설천위의 미간이 한층 더 찡그려지자,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곤괴가 끼어들었다.
“약재라니, 대체 무엇이기에 그러는 것이냐.”
약재를 직접 구해야 한다기에 살아 있는 약초를 찾는 줄 알았다.
아니면, 영물이나.
시간이 지나면 효력이 약해져 시장에 유통되지 않는 약초도 있으니까.
“장기간 보관이 되는 약재라면 구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으냐?”
이럴 줄 알았으면, 아들놈에게 말해 놓고 왔어야…….
[아니, 구할 수 없네.]
그런 곤괴의 말을 단숨에 부정한 신의는 설천위를 바라봤다.
[이놈이 대체 어떻게 안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약재는 나만이 가지고 있었지.]
“그게 대체 무슨…….”
아니, 그 전에.
“그렇게 희귀한 약재라면 이미 팔거나 놈들이 썼을 것 아니오?”
[그건 아닐 걸세.]
또 한 번 고개를 젓는 신의.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가치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또 명확하게 해답을 내놓지 않는 신의의 대답에 곤괴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 순간.
“좋아! 갑시다!”
고민을 끝낸 설천위가 외치며, 곤괴를 바라봤다.
“할아버지도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죠!”
안 되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무엇보다.
“슬슬 초절정한테 쫄 깜냥은 아니거든요!”
* * *
“……소식이 끊겼다?”
“예.”
부하의 보고에 귀주성의 계획을 총괄 관리하던 사내, 서주웅은 미간을 찡그렸다.
제물이 될 사람을 나르던 놈들의 보고가 끊긴 지 약 세 시진.
이건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이 확실했다.
확실한데…….
“장서 님이 직접 순찰을 하고 있는데, 어찌…….”
그럴 수 있지?
이해할 수 없다.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서주웅이 한층 더 깊게 미간을 찡그리는 순간.
“보, 보고입니다!”
“무엇이냐.”
“자, 장서 님께서 소멸하셨다고 합니다!”
“뭐라!”
벌떡 일어선 서주웅은 이내 입술을 깨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지금 당장 지부를 비울 준비를 하거라!”
“지부를 말입니까?”
“장서 님께서 소멸하셨다는 소리는 대 하나가 통째로 움직였거나 그 이상이라는 소리!”
무림맹 소속의 백화단, 만귀단은 분명 혼을 전문으로 상대하는 집단이긴 하지만, 그 뿌리는 결국 무인들의 연합인 무림맹이다.
무공이 뛰어난 이들도 많으며 무인에게 큰 힘을 쓰지 못하는 술사들을 지키기 위해 항상 호위를 붙인다.
십이군의 일인인 장서를 소멸시킬 정도의 술사들이라면, 그 호위도 상당한 수준일 터.
잘못했다간 이 지부가 통째로 날아가는 수가…….
쾅!!
순간, 거대한 폭음과 함께 서주웅은 직감했다.
올 것이 왔구나.
이렇게 된 이상 도주는 이미 늦었다.
“전원 전투 준비!”
외침과 함께 밖으로 나가는 서주웅.
그 뒤로 부하들이 따랐지만, 그들은 아무런 대화도 없이 달렸다.
소리의 진원지는 은신처의 입구.
뒤로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입구가 막힌 건 큰 문제다.
일단, 그쪽의 상황을 먼저 파악해야…….
우드득.
입구에 가까워진 순간, 눈에 보이지 않았음에도 알 수 있을 것 같은 섬뜩한 소음과 함께 무언가가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입술을 깨문 서주웅이 걸음을 재촉했고, 이내 입구에 도착한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만 이를 악물었다.
목 혹은 사지, 아니면 허리.
인체의 어딘가가 돌아가 더 이상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된 부하들의 사체가 땅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죽은 그들의 혼이 육체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지만,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뭐 하는 놈이냐.”
압도적인 존재감.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 이쪽이 위축되는 위압감.
그 상대를 보며 서주웅은 어떻게든 버텼다.
여기서 자신이 무너지면 희망이…….
[끄아아아아아!]
순간, 뇌리를 파고드는 비명에 등줄기를 타고 전류가 흐른다.
마치 벼락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간 것 같은 섬뜩한 감각.
“……이게 무슨?”
혼이 빨려 들어간다.
입구로.
“흐음, 이거 어렵네.”
느긋한 목소리.
그에 맞게 천천히 내딛는 걸음.
그 외모는 젊다기보다는 어리다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파릇파릇하지만, 옷 사이론 꽤나 야성적인 근육이 드러난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이, 이게 대체?”
적 앞에서 의연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다짐마저 단숨에 날려 버리는 압도적인 광경.
혼들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 이러어어어어!]
괴성을 지르며 빨려 들어가는 혼들.
마치 저승으로의 문이 열린 것처럼 혼들이 걸어오는 사내를 향해 빨려 들어간다.
거기에다.
[끄아아아아아!!]
그 혼들이 실시간으로 분해되는 것이 두 눈에 보인다.
혼이 보이기에 볼 수 있는, 도저히 보고 싶지 않았던 절망.
죽은 후에 저승으로조차 가지 못하는 완전한 소멸.
“역시 내가 죽인 게 아니면 좀 어렵네.”
[쯧, 네 녀석은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아직도 모르는 것이냐?]
“뭐, 알 것 같긴 한데요.”
혼조차 소멸시키는 섬뜩한 광경과 달리 평온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걸어오는 사내.
자신이 이곳으로 오는 짧은 시간 동안 수십의 부하를 죽인 노인보다 천천히 걸어오는 어린놈의 모습이 더욱 공포스러웠다.
“음, 없나?”
없다?
뭐가?
“있었으면 이쯤에서 뭐 하는 놈이냐고 외치며 나타났을 테니…….”
[화경급은 없는 것 같구나.]
“내가 느끼기에도 그렇다.”
천마와 곤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다시 고개를 돌려 서주웅을 바라봤다.
한껏 긴장한 얼굴.
그 무력이 초절정이라 들었는데, 상당히 자신감이 없네.
곤괴 할배 때문인가?
생각보다 훨씬 싱거운 전개에 입맛을 다신 설천위는 혼들을 강제로 빨아들이기 위해 끌어올렸던 패기에 패융을 더했다.
[패룡지체(覇龍之體)]
[패룡지기(覇龍之氣)]
[패룡지심(覇龍之心)]
검은 묵빛의 용이 그의 몸을 감싸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크르르르르.]
낮게 우는 패융의 울음소리와 함께 설천위는 아직도 한껏 굳어 있는 서주웅을 보며 웃었다.
“그냥 다 내놓을래, 죽고 내놓을래?”
[아니, 거긴 맞고 내놓을래 아닌가?]
이상한 선택지에 암영의적이 끼어들었지만, 모두가 무시했다.
그리고 조금 뒤늦게 그 협박의 의미를 깨달은 서주웅의 표정이 붉게 물들었다.
“이…… 이 어린놈이!”
이렇게,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순 없다.
자존심이 있는…….
“쓸데없이 시간 끌지 마라.”
거대한 존재감.
일순 설천위의 기괴하기 그지없는 등장에 정신이 팔려 깜빡 잊고 있었던 거악의 존재가 떠오른다.
서주웅의 발악에 곤괴가 움직인 것이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신의가 말했다.
천음지체는 최대한 빨리 치료하는 것이 좋다고.
그렇다면.
“나는 한 톨의 시간도 낭비할 생각이 없다.”
순간, 그 몸이 대지를 가른다.
지쳤다곤 하나 노공조차 일순 움직임을 놓칠 정도의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것이 곤괴다.
“컥!”
단숨에 서주웅의 목을 움켜쥔 곤괴의 눈이 스산하게 빛난다.
“어디에 있느냐, 신의의 약재는.”
* * *
“찾았다!”
“꺄~!”
서하영과 놀고 있는 남혜를 가만히 바라보던 유예린은 작게 미소 지었다.
참으로 보기 좋은 광경이다.
나도 나중에…….
유예린의 볼이 살짝 붉어지는 순간.
[혈사련으로 보이는 자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귓가로 파고드는 전음에 유예린의 표정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짧은 고민.
그 뒤에 내린 지시는 간단했다.
[준비하세요.]
마침 잘됐다.
복수할 기회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으니.
옛날, 설천위를 극한까지 몰아넣었던 노공을 떠올린 유예린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