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147화-내놔 (5)
“설가 놈!”
창에 꿰뚫려 허공에서 튕겨 나가는 설천위를 보고 다급하게 외치면서도 그의 몸은 확실하게 적에게 반응했다.
내공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하고, 적의 공격에 대비한다.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절제된 기세.
하지만, 그 속에서 미친 듯이 요동치는 흉포한 기세가 살짝살짝 고개를 드는 것이 느껴진다.
그야말로 괴물.
‘……쉽기만 할 리가 없었나.’
그 사혈천 놈들의 지부 중 하나를 습격했다.
몇이나 되는 곳을 부숴 버렸으니 놈들의 반응이 없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빠르게 일 처리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혈천 놈들은 기묘한 방법으로 그 사실을 파악하고 움직이는 놈들이니까.
그에 대비하고 철저히 경계해야 했음인데.
나이를 먹어 안일해져 버린 것일까.
‘……아니. 인정해야겠군.’
자신을 책망하던 곤괴는 거한의 기세를 느끼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설령 경계하고 있었다고 한들 조금 전의 일격은 허용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지금 바로 눈앞에 서 있는데도.
그 속에서 꿈틀거리는 흉포한 기세가 여실히 느껴지고 있는데도 그 존재감이 희미하다.
자신을 숨기는 방법을 아는 진짜배기.
아마 여태까지 자신들이 상대해 왔던 놈들과는 궤가 다른 사혈천의 진짜 전력일 터.
무림맹조차 뿌리 뽑지 못하는 괴물들 중에서도 제대로 된 전력으로 평가받는 강자.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설천위를 데리고 저 신의라는 혼까지 구해서 도주할 수 있을까?
가능할까?
[이, 이 노오오옴!]
거한을 보고 부들부들 떨면서도 악을 쓰는 신의의 모습을 보면서 곤괴는 이를 악물었다.
손녀를 구할 희망.
할 수 있느냐가 아니다.
반드시 해내야 하는 거다.
어떻게든 구해야 한다.
희망도, 어린 새싹도.
[생각이 많군. 노인.]
그런 곤괴를 향해 거한의 싸늘한 시선이 꽂힌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잠시라도 가만히 있었던 이유.
거한이 보기에도 곤괴는 쉽사리 상대할 수 없는 적이었기 때문.
서로에게 상성은 좋지 않지만, 서로가 격이 높기에 그 한계가 뚜렷한 적.
자신도 저 노인을 죽일 수 없지만, 저 노인도 자신을 죽일 수 없다.
하지만.
[그 반푼이는 두고 가야 할 것이다.]
쿵!
어느새 그의 손에 잡힌 창이 바닥을 묵직하게 때린다.
전신을 감싼, 칠흑 같은 갑주에서 그와 같은 색깔의 아우라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인간의 신체를 훌쩍 벗어나는 키는 물론이고, 무시무시한 위압감이 절로 느껴지는 거구.
그 얼굴은 인간의 얼굴 형태를 한 가면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그런 괴한의 몸에서 압도적인 기세가 흘러나오는 광경은 그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신의의 다리마저 풀리게 할 정도로 위압적이었다.
“그것을 왜 네 녀석이 정하느냐?”
폭발적으로 기세가 상승하기 시작한 거한을 향해 곤괴가 이죽거린다.
당장에라도 싸울 수 있다는 듯, 기세를 팽팽하게 당기는 곤괴.
그 모습에 마찬가지로 창을 겨누는 거한.
일촉즉발의 상황.
“아으…….”
미약한 신음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일순 그곳으로 향했다.
[으음?]
의외라는 듯 놀라는 거한과 입꼬리를 올리는 곤괴.
조금 전 창에 꿰뚫렸다고 생각한 설천위.
짧은 신음과 함께 땅에 발을 딛는 모습엔 그 어떤 출혈도 보이지 않는다.
몸 전체가 날아갔을 것 같은 강렬한 일격에 비해, 그 몸은 의외로 멀쩡하기 그지없다.
[내 일격을 막아 내다니 처음 있는 일이로군.]
약간의 놀람이 담긴 감탄에 삐딱하게 고개를 꺾은 설천위는 손을 털었다.
“뭐래, 고작해야 허드렛일이나 하는 놈이.”
털어 내는 손을 따라 흐트러지는 검은 파편.
그와 함께 자세를 고친 설천위는 허리를 펴고 거한을 바라봤다.
“뭐, 그래도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이 왔네.”
고개를 끄덕이는 설천위.
그 기묘한 반응에 거한은 미간을 찡그렸지만, 설천위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방금 일격, 성공 못 한 거 꽤나 가슴 아플 텐데 괜찮겠어?”
[혓바닥이 화의 근원이 되는 놈이구나.]
여전히 위압적인 기세를 뿜어내며 스산한 눈빛으로 설천위를 훑어보는 거한.
그를 바라보며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뭐?”
어깨를 으쓱이며 왈패처럼 이죽거리는 모습은 참으로 꼴 보기 싫은 경박한 모습이다.
곤괴조차 작게 혀를 찰 정도로 얄미운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를 노려보는 거한, 장서(葬曙)는 움직일 수 없었다.
왜냐고?
그의 본능이 외치고 있었으니까.
방심하지 말라고.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고.
실체를 품었다고 한들 그 본질은 악귀인 자신의 본능은 그냥 감이 안 좋다고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확실한, 그야말로 예지에 가까운 감각.
즉.
‘눈앞의 이 녀석이 무림맹의 그 샌님들보다 더 위협적이라는 소린가.’
그가 죽인 무림맹의 술사만 해도 몇인가.
그들을 호위하던 무인들을 죽인 숫자만 해도 스물이 넘는다.
요 몇 년간 너무 격하게 활동한 탓에 단주들이 움직일 것을 경계해서 휴식기를 가졌기에 이 정도 수준이다.
그런데.
[예사롭지 않은 놈이로구나.]
그 수많은 싸움들 중에서도 이토록 긴장됐던 싸움은 없었다.
방심하면 죽는다.
그 사실을 직감하며 장서는 자신의 창을 설천위를 향해 겨눴다.
[네놈만큼은 확실하게 정리해…….]
주마.
그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장서는 자신도 모르게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강제로 만들어 낸 육체의 오감이 깨어나고, 근육과 뼈가 미친 듯이 요동친다.
인간의 것을 벗어난 육체가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상황.
그것이 긴장에서 비롯된 것이란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장서는 동굴 전체를 가득 채우던 자신의 기운이 점차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이쪽에서 할 말인데.”
[크르르르르르르.]
분노가 담긴, 흑룡의 울음소리와 함께 도를 뽑는 설천위.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패도(覇道)의 기운은 동굴 내부에 가득한 장서의 영압을 단숨에 밀어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그 기가 꺾여 이지를 잃었어야 할 힘이 너무나도 간단하게 밀려난다.
영역보다도 인간에게 더 가깝게 적용되는 힘.
영압.
그것도 십이군(十二君)의 일인인 장서의 영압이다.
그것을 이리도 쉽게…….
[네놈, 절대 살려 둬선 안 되는 놈이로구나.]
딱 봐도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외견.
거기에다 단련된 육체와 범상치 않은 자세.
상당한 수준의 무(武)를 쌓은 것으로 보이는데, 자신에게 밀리지 않을 정도의 영적인 힘까지?
이건, 살려 두면 무조건 미래에 큰 걸림돌이 된다.
지금 바로 처리해야 한다.
[네놈만큼은 절대 살려 보내지 않으마.]
영력을 창에 휘감고 흉포한 기세를 뿜어내는 장서를 보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여태까지 그 말 하고 성공한 놈이 없어요.”
그거 패배 플래그야.
* * *
전투는 생각보다 빠르게 시작됐다.
먼저 움직인 건 장서였다.
단숨에 땅을 박차 도끼를 내려치듯 창을 내려치는 장서.
창의 끝을 붙잡고 휘두르는 그 일격은 보통의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참으로 비효율적인 공격이었다.
허나, 그건 창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할 수 없는 인간이 휘두를 때나 적용되는 소리.
원심력의 이치를 최대로 받은 창끝에는 말도 안 되는 거력이 담겨 설천위를 향해 떨어졌다.
쾅!!
하지만 거기까지.
자세를 잡고 단숨에 도를 쳐 올려 그 공격을 튕겨 낸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폭음이 터지는 충격 속에서도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움직임으로 다음 공격을 시작한다.
천마의 수련이 시작되고 나서 한결같이 단련해 온 하체의 힘.
아직 그 수련이 모든 것을 꽃피운 것은 아니나…….
“흡!”
지금의 일격을 위한 뿌리는 충분히 내렸다.
대지를 밟고, 허리를 비틀어 도를 긋는다.
쳐올린 것의 반대로.
위에서 아래로, 대각선으로 긋는 일격.
더불어 그 안에 담긴 참(斬)의 묘리는 싸늘하기 그지없는 예기를 도에 담았다.
그렇기에.
[흡!!]
마찬가지로 근육을 쥐어짜 겨우 자세를 되찾은 장서는 땅으로 발을 구르는 것과 동시에 창을 땅에 박아 넣으며 설천위의 일격을 막아 낸다.
키이이이잉!
창대와 도가 만나 기와 기가 갈려 나가는 섬뜩한 소리가 동굴 전체에 울려 퍼졌지만, 둘 다 그런 소음 따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런 전투에선 당연히 딸려 오는 것이니까.
바람을 가르는 소리, 흙을 밀며 움직이는 발소리는 물론이고 기본적인 상대의 호흡 소리까지.
이 전투 속에서 들어야 할 소리는 많다.
그러니 그런 사소한 소음에 신경 쓸 때가 아니란 소리다.
[좋구나!!]
근육의 폭발과 함께 설천위의 도를 튕겨 내며 장서가 호쾌하게 소리쳤다.
가면의 입꼬리를 비틀 정도로, 진심으로 즐기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설천위는 또 웃었다.
“좋기는 개뿔!”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좋기는 개뿔이 좋아요! 변태 새끼야!
두 사람의 서로 다른 문답과 함께 전투는 본격적으로 거대한 흐름에 올라탔다.
공격하고 막고.
도가 파고들면, 창이 막아 내고.
창이 파고들면, 도가 막아 낸다.
때때로 두 무기가 튕겨 나가며 생긴 빈틈을 발과 주먹이 오갔지만, 그것은 사소한 문제.
[크르!]
드문드문 달려드는 패융을 쳐 내며 장서는 웃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고작해야 이 정도라면.
‘내가 이겼노라!’
가면 속에서 뿜어지는 안광과 함께 장서의 창이 변하기 시작했다.
더욱 거칠게, 더욱 빠르게.
“안 좋군.”
[뭐가 안 좋다는 거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곤괴는 옆에서 묻는 신의를 잠깐 바라보다가 이내 대답했다.
손녀의 치료법을 아는 유일한 존재일지도 모르는데, 괜히 차갑게 대할 필요는 없었다.
“설가 놈은 강하긴 하지만 사실 무학적 측면에서 보면 반푼이나 다름없소.”
어깨에 짊어진 상태였다곤 하나, 땅에 떨어질 때 제대로 된 낙법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뻔하다.
무학적 재능은 그야말로 바닥.
지금 도를 휘두르고 땅을 내딛는 모든 무학은 그야말로 뼈에 새긴 호된 훈련의 성과일 터.
솔직히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며 칭찬해 주고 싶지만, 현실은 현실.
설천위는 1의 힘으로 2의 힘을 이기는 기술이 없다.
무학이란 약자가 강자를 상대하기 위해 발전한 것.
1로 2를.
2로 4를.
4로 8을 이기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설천위는 1로 2를 이기지 못하고, 1로 1밖에 이기지 못한다.
때문에, 원초적인 강함은 곧 설천위가 감당하기 힘든 벽이 된다.
그저 빠르고.
그저 강하고.
그저 단단한 것.
그런 원초적인 강함이 일정 수준을 넘어 버리면, 설천위는 그것을 극복해 내지 못한다는 소리다.
“……내가 나서야 할 것 같군.”
속도와 위력이 올라가기 시작한 창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이대로 방심하다간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하는 수가 있…….
[잡았다!]
“설가 놈!”
곤괴가 예상한 것보다 더 떨어지는 재능.
거기에 더해 난폭하면서도 날카로운 장서의 창은 곤괴가 예측한 것보다 더 빨리 치명적인 빈틈을 만들어 파고들었다.
단숨에 복부를 파고드는 창.
이미 막을 수 없다.
패융이 달려들고자 하나, 직전에 튕겨 나간 충격을 전부 해소하지 못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상황.
결국 곤괴가 땅을 박차기 전에 창이 설천위의 복부를 꿰뚫었다.
“놈!”
[잠시 기다리게.]
다급하게 달려 나가려던 곤괴는 자신을 붙잡는 목소리에 일순 발을 멈췄다.
설천위가, 놀랍게도 천마라고 부르던 혼.
그 진위 여부가 궁금하긴 하나 그것을 떠나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
아마 그가 살아 있었다면, 자신이 졌을 강자라는 것.
그런 강자가, 설천위를 생각하는 강자가 자신을 말리는 것엔 다 이유가 있을 터.
움직임을 멈춘 곤괴가 고개를 돌려 천마를 바라보자, 그는 웃으며 곤괴를 바라봤다.
[분명 무학적인 측면에선 반푼이나 다름없는 녀석이지만…….]
천마의 웃음이 길게 늘어지는 곳의 끝.
창이 복부를 파고든 상태에서 천천히 허리를 펴는 설천위의 복부엔 검은 벽이 창을 막아 내고 있었다.
[영적인 측면은 그 모든 단점을 뒤덮을 정도로 넘쳐나네.]
천마의 웃음과 함께, 금이 간 검은 벽을 털어 내는 설천위.
그리고 그 순간.
[흑관(黑棺)-방벽(防壁)]
수십 개의 작은 흑관이 장서를 감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