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142화-노인 공경 (4)
천천히, 아주 느리게 압박이 들어간다.
제정신을 유지한 절정급 무인들과 유일한 초절정인 윤백.
이들만으로도 어지간한 중소 문파는 그냥 짓밟아 버릴 정도의 전력이다.
그런데 거기에다.
“흐읍!”
잘려 나간 팔의 고통과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난 노공이 두 눈을 부릅뜨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우리의 승리다!’
그렇기에, 윤백은 이를 악물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이 상황에서 자신들의 승리를 의심하는 건 어리석기 그지없는 행동이다.
이토록 승리에 가까운 상황이 어디에 있을까?
심지어 미약하게 떨리는 저 오른팔은 누가 봐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지 않은가?
아까까지 오른손으로 쥐고 있던 검을 왼손으로 쥐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한 팔이 망가진 상황.
거기에다 노공을 상대하던 그 날카로운 기세는 이미 사라진 상태.
교에서 예상했던, 고수의 혼을 빙의시켜 싸운다는 추측이 맞았다고 확신해도 되겠지.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에서 빙의를 푼 건 그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더 이상 화경급 고수는 없다.
설천위 본인도 분명 강해졌겠지만, 그래 봤자 자신 혼자서도 승리를 점칠 수 있는 상대다.
거기에다 부상까지.
승리를 확신하다 못해 이젠 방심을 해도 될 정도로 유리한 상황인데…….
까득.
‘대체 뭐냐!’
이 위압감은!
검은 아우라를 두른 채 오만하게 자신들을 바라보는 설천위.
그 두 눈에 담긴 감정은 놀랍도록 차가웠다.
뼈에 사무칠 정도로 시려서 발이 얼어붙은 것 같다.
찔끔찔끔 접근하던 다른 무인들의 걸음이 거의 멈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더뎌졌다.
그런데, 그것을 뭐라고 욕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의 걸음도 더뎌져 있었다.
상처 입고 으르렁거리는 맹수를 향해 접근할 때처럼.
갑자기 몸을 일으켜 자신의 목에 이빨을 꽂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이 오한이 되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왜 그래? 다들 발이 굳어 있는데?”
흠칫.
그렇기에 설천위가 툭 하고 내던진 한마디에 일제히 흠칫 놀란 이들은 이내 자신들의 추태를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그건 윤백도 마찬가지.
‘……내가 저딴 애송이에게!’
이를 악문 윤백은 크게 호흡을 들이쉬었다.
뭐가 됐든, 들어가야 한다.
내가 죽더라도 다음에 오는 이가 저 심장에 검을 박을 수 있는 길을 터야 한다.
‘지금 하지 않으면…….’
이를 악문 윤백의 두 눈에 아직도 담담하게 서 있는 설천위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 괴물은 진짜 용이 되어 교의 목을 물어뜯을 것이다.
혈주의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이 될 것이다.
그것만은 절대 참을 수 없다.
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것만은 막아 내겠다.
목에 핏발이 서도록 이를 꽉 악문 윤백이 검을 위로 치켜들었다.
“단번에 끝내 주마……!”
그리고 땅을 박찬다.
방어를 도외시한, 오로지 상대의 목숨을 거두기 위한 일격.
자신의 심장을 내주고 적의 목을 치는 이 공격이 거둬 가는 것은 적의 목숨만이 아니다.
그럼에도 강행한다.
왜냐고?
그래야 하니까!
해야 하는 일이니까!
각오를 굳힌 윤백이 땅을 박차고 설천위를 향해 쇄도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공은 이를 악물고 팔을 들었다.
검은 없다.
검을 쥐고 있던 오른팔을 통째로 설천위에게 뺏겨 그의 발밑을 구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팔 하나가 없다고 해도 자신은 삼공의 일인.
빙의가 풀려 제 실력을 드러내는 애송이 하나도 마무리하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진 않다.
이 자리에서 설천위의 목을 거두기만 한다면, 패배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설천위가 된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마무리를……!
윤백과 마찬가지로 핏대가 설 만큼 이를 악문 노공이 땅을 박찬다.
그 순간, 이미 설천위에게 도달한 윤백은 거칠게 검을 내리쳤다.
그리고 그 공격에 망설임 없이 왼팔로 검을 찔러 넣는 설천위.
목을 노리고 떨어지는 검?
방어할 필요가 없다.
[크르르르르.]
이쪽은 손이 하나가 아니니까.
그 담담하기 그지없는 반응에 윤백의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인들이 놀라는 그 순간.
“그럴 줄 알았다!!”
윤백은 설천위가 내지른 검을 향해 더욱 몸을 들이밀었다.
네가 목을 내줄 각오를 한 것은 아닐 터!
무언가 수가 있겠지!
사술이든 다른 것이든!
하지만……!
“그래 봤자 그 한계가 있을 터!”
“말이 길어.”
심장을 찌르는 검을 옆구리로 받아 내며 몸을 들이미는 윤백.
심장을 빗겨 갔다고 해서 치명상이 아닌 것은 아니다.
최대한 피하긴 했으나 장기의 손상을 피할 수 없는 각도.
하지만, 그 각도가 아니면 설천위에게 닿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기에 윤백은 망설임 없이 몸에 바람구멍을 만들었다.
그렇기에 닿을 수 있는 것.
“죽어라아아아!”
초근거리에 접근한 윤백은 내공을 한껏 머금은 두 팔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검으로 벤다?
그럴 필요 없다.
언제나 상대의 목숨을 앗아 가는 것은 의표를 찌르는 공격.
그러니 어떤 방식으로든 의표를 찌를 수만 있다면 충분하다.
내공을 담아 손잡이로 머리를 내려치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골통을 부수기엔 충분하니까!
우득.
하지만, 거기까지.
“안일하네.”
[크르르르르.]
패융에게 붙잡혀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진 오른팔에 쥔 검은 빠져나가지 못한 채 허공에 머무른다.
뚫을 수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윤백은 이를 악물면서 검을 놓은 왼팔을 뻗었다.
붙잡는다.
어떻게 해서든.
움직임을 멈추자!
그렇게만 하면.
“흐읍!”
저분이 마무리해 주실 거다!
어느새 설천위의 지척까지 접근해 왼팔을 휘두르는 노공.
아주 간단한 협공이지만, 그렇기에 위력적인 협공.
자, 막을 수 있겠느냐?
혈첩검의 이치를 담은 주먹은 인간의 목숨 따위 가볍게 앗아 간다.
아무리 네놈이라도 맨몸으로 저 공격을 받으면…….
“청아.”
“네.”
순간, 설천위가 검을 뽑는 것은 물론이고 팔을 압박하던 무언가가 사라진 것을 느낀 윤백은 두 눈을 부릅떴다.
이놈이,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냐?
내가 고작 이 정도 부상으로 멈출 거라고?
부러진 오른팔로 힘겹게 쥐고 있던 검을 왼팔로 쥐자.
그리고 그대로 저 등에 찔러……!
“후후후후.”
순간, 비틀거리며 균형을 잃은 윤백은 자신의 등을 감싸는 부드러운 손길에 오한을 느꼈다.
“당신은 참 맛있겠네요.”
달콤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오한이 드는 요사스러운 목소리.
“끄아아아아아아악!!”
빨려 나간다.
생기가.
원기가.
“이, 이이, 게 무……!”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하는 윤백의 시야에 노공의 주먹을 막아 내는 설천위가 들어왔다.
마지막 희망.
자신의 삶이 여기까지라는 것을 직감한 윤백의 의식이 끊어져 가는 그 순간.
“노오옴!!”
노공의 호통과 함께 설천위가 밀리는 것을 확인한 윤백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맺혔다.
* * *
“노오옴!!”
‘뒈지겠다!’
노공의 호통.
이쪽의 목숨을 앗아 가기 위해 쇄도하는 주먹.
그것을 막아 내며 설천위는 이를 악물었다.
내공은 바닥.
영력은 아직 좀 남았지만, 무인과의 대결에선 거의 무용(無用).
패기는 정신력을 기반으로 두르고 있는 것이니 아직 여유가 있긴 하지만, 그조차도 그리 길지 않을 터.
현태중의 빙의로 인한 소모가 생각보다 컸다.
화경급 고수를 상대로 제대로 치고받고 싸웠으니 당연한 소모이긴 하지만…….
‘그래도 뒈지겠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노공의 주먹을 겨우 막아 내며 그 여파로 뒤로 튕겨 나간 설천위는 이를 악물었다.
노공의 주먹엔 조금 불안하지만 확실히 강기라 부를 만한 것이 맺혀 있었다.
주력인 검이 아니라 주먹으로 쓰는 것이기에 그 위력은 조금 부족하지만, 그래도 강기는 강기.
[크르르르르.]
패융의 도움으로 겨우 받아 내는 데 성공했지만 거기까지.
이 이상 싸움이 길어지면 이쪽의 필패다.
거기에다…….
“타핫!”
물러난 빈자리를 채우며 바닥에 떨어진 검을 회수한 노공.
이건 위험하다.
어떻게든 있는 거, 없는 거 쥐어짜서 허세를 부려 윤백이란 놈을 처리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역시 저 노공은 너무 큰 벽이다.
여기서는 어쩔 수 없지.
‘튀자.’
암영의적에게 맡기면 아무리 상대가 노공이라 할지라도 도주 성공률이 오 할은 넘을 터.
팔 하나 잘랐으니 솔직히 할 만큼 했다.
이 정도면 됐어.
충분히 도망…….
“노옴! 못 간다!!”
맹렬하게 검을 휘두르는 노공.
내공의 안배 따윈 전혀 생각하지 않는 그 폭발적인 공격에 설천위는 이를 악물었다.
이거 뒤를 도는 순간, 바로 등짝에 검기 박힌다.
잘못하면 구멍도 뚫리겠네.
도주를 막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
내공의 소모를 생각하면 그리 오래 이어지진 않겠지만…….
과연 그때까지 자신이 버틸 수 있을까?
점점 더 길이 막히는 상황에 설천위가 이를 악무는 순간.
“끌끌끌, 이건 또 무슨 재미있는 구경거린가?”
누군가의 웃음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검기와 강기가 줄줄이 뿜어져 나오고, 땅과 나무를 뒤집고 있는 이 상황에서 저런 여유.
또 다른 고수다.
그 순간, 거의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칠까 봐 긴장하며 시선을 돌렸던 노공은 이내 안도했다.
호리병에 담긴 술을 홀짝이며 낄낄거리는 노인.
그 옷은 허름하나 더럽지 않았고, 얼핏 막 자라 있는 수염과 머리카락도 난잡하긴 하나 지저분하진 않았다.
참으로 특이한 외형.
하지만 그를 실제로 본 적이 있는 노공은 그에 대한 관심을 바로 접어 버렸다.
어차피 저 괴짜가 이 싸움에 관여할 일은 없다.
고개를 돌려 다시 설천위를 바라보는 노공.
그의 시선은 아직도 저 노인을 향해 있다.
헛된 희망을 붙잡는 거겠지.
하지만 그 희망도 금방 꺼트려……!
“천음절맥의 치료법! 알려 드릴게요!!”
이 자식이 지금 뭐라는…….
“애송이.”
순간, 싸늘하게 식은 공기와 함께 노공의 검이 튕겨 나온다.
왼팔로 노공의 검을 가볍게 쳐 낸 노인은 불길이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설천위를 바라봤다.
“네놈이 그것을 어찌…….”
“살려 주시면 알려 드립니다!”
노인의 말을 끊고 본론을 말하는 설천위.
그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노인은 이내 고개를 돌려 노공을 바라봤다.
“미안하이, 이 아이는 내가 데려가야겠어.”
“그게 지금 될 거라고……!”
생각하나?
그 말을, 노공은 이어 가지 못했다.
“그럼, 잘 계시게.”
어느새 설천위를 어깨에 둘러멘 노인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공은 속에서 끓어넘치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곤괴(坤怪)!!”
* * *
“크, 큰일 났습니다!”
“또 뭔가!”
무림학관.
고작 며칠 전에 있었다는 흑룡학관의 학관장 살해 사건.
암살 따위가 아니라, 학생이 대놓고 목을 베어 버렸다는 그 충격적인 사건 소식은 당연히 무림학관에도 전해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들부들 떨던 팽후는 범인이 설천위가 아니라는 말에 겨우 안심한 지도 아직 일주일이 안 되었다.
물론 그 뒤에 설천위가 범인의 주력 동료 중 하나로 활동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절할 뻔했지만.
뭐가 됐든 사천맹에서 너그럽게 용서해 준 덕에 그냥 교환학생을 돌려보내기로 합의를 본 상황.
이쪽에서도 흑룡학관에서 왔던 적랑대 아해들을 돌려보냈다.
잘하면 서로 가는 길에 마주칠 수도 있겠거니 했는데…….
‘설마 또 사고를 친 건가?’
그놈이?
그냥 계(癸)에 짱박아 두고 졸업할 때까지 밖에 못 나돌아 다니게 해야 했나?
부질없는 후회와 함께 몸을 일으키던 팽후는 이어지는 부하의 보고에 헛기침을 토했다.
“설천위가 납치됐다고 합니다!”
“또?”
아니, 무슨 이놈은 허구한 날 납치를 당해!
어디 가서 맞고 돌아다닐 정도로 약한 수준도 아니면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납치는 이번 한 번인가?
보통 오다가 도망치다 보니 엇나간 것뿐이니까.
그나저나 납치라니.
“……누구에게?”
“그것이…….”
부하가 대답을 하기도 전, 학관장실의 문이 거칠게 열린다.
그리고 당당하게 들어오는 여인.
“외출하고 싶습니다.”
두 눈에서 살기가 번들거리는 유예린의 모습에 팽후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허가한다.”
……절대 쫄아서 허락한 거 아니다.
그냥 설천위를 얌전하게 만드는 거의 유일한 인간인 것 같아서 허락한 거다.
팽후가 자기 합리화에 빠져 있는 사이, 그대로 몸을 돌려 학관장실을 나온 유예린은 뒤를 따르는 이들을 보며 말했다.
“한 시진 후에 출발합니다.”
“알겠소.”
“네.”
철백과 서하영.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을 두고 유예린은 담담하게 자신의 숙소를 향해 걸어갔다.
‘……무사하지 않으면 지옥을 보게 해 드리죠.’
그녀의 두 눈은 여전히 강렬한 살기로 번뜩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