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140화-노인 공경 (2)
은은한 살기와 함께 쇄도하는 것은 쇠로 만들어진 채찍과도 같은 강기(罡氣).
그 기세는 바위라도 쉽게 부숴 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렬했다.
하지만.
“흡!”
막는다.
아니, 막아 낸다.
“끄으읍!”
악문 잇새로 흘러나오는 신음과 함께 설천위의 도가 결국 힘의 부하를 견뎌 내지 못하고 튕겨 나온다.
그로 인해 몸으로 퍼지는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는 설천위.
“참으로 알기 힘든 놈이로다.”
그런 설천위를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노공은 검을 세웠다.
일전에 있었던 괴이한 변화.
사람이 바뀐 것처럼 도를 휘두르던 모습을 전하니 교의 술사들이 빙의라고 짐작했다.
믿기 힘들었지만, 다른 해답이 없었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던 대답.
“참수사신은 아직도 네놈과 함께하는 것이냐?”
“뭐래.”
얼얼한 손에 힘을 더해 감각을 되돌리며 설천위는 삐딱하게 고개를 꺾었다.
이건, 아주 상황이 안 좋다.
사방을 포위한 적.
화경급의 고수.
이쪽은 지원 올 사람 하나 없는 혈혈단신.
참…….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고…….”
아주 피똥을 싸는구나.
흑룡학관에선 살 만했다고 너무 방심했나.
“후.”
작게 호흡을 고른 후 아직도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는 노공을 노려보며 설천위는 도를 들었다.
“천천히 요리하시게? 나는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은데.”
“네 녀석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선택지를 말하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노공.
그 모습에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에이, 설마 식상하게 고독 따위를 먹이고 부하가 돼라, 뭐 그딴 소리 하려는 건 아니지?”
“…….”
기묘한 침묵.
입을 다문 노공 뒤로 묘한 표정으로 선 사내들.
그 모습에 설천위는 도를 쥐지 않은 왼손을 들어 올려 친절히 중지를 치켜세웠다.
여기에서는 욕이 아닌 손동작이니 문제없지.
“꺼져.”
“……어리석은 놈.”
“식상한 녀석들보단 나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하는 짓이 그리 뻔하냐.”
노공을 비웃으며 설천위는 도의 날을 노공을 향해 세웠다.
“참수사신이 아직도 나와 함께하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히죽 미소 짓는다.
“그럼 몸으로 한번 알아내 봐.”
* * *
시종일관 여유를 잃지 않는 설천위의 모습에 조용히 뒤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윤백은 침음성을 흘렸다.
고작해야 몇 달 전이다.
해 봤자 초절정 고수.
기상천외한 변수만 조심한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
그런데…….
‘……삼 할.’
많이 쳐주면 사 할 정도.
이젠 승리를 자신할 수 없게 되었다.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기묘하리만치 강렬한 기세는 물론이고, 유일하게 눈에 띄던 흠인 어색한 동작도 상당히 사라졌다.
전투 중간중간에 펼치는 기술에 비해 미숙한 것이 한눈에 보였던 임기응변.
억지로 몸에 익은 기술로 무마해 내던 뻣뻣한 자세가 상당히 부드러워졌다.
분명 무언가 성장이 있었던 거겠지.
‘여전히 말도 안 되게 빠른 숙련도로군.’
거기에다 대체 어떤 식으로 수련을 하는지 모르겠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기술의 숙련도.
화경급 고수의 동작을 그대로 베낀 듯한 수준의 말도 안 되는 숙련도는 여전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다 넘어가고서라도 말이 안 되는 점이 하나 더 있었다.
“컥!”
노공의 검을 받아 내고 또다시 몇 걸음 물러서는 설천위.
그 모습에 노공이 미간을 찡그리는 모습이 보인다.
하긴 그럴 수밖에.
“네 녀석……. 대체 무슨 사술을 부리고 있는 것이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설천위를 노려보는 노공.
그의 검에는 선명하기 그지없는 강기(罡氣)가 새겨져 있었다.
지고의 상징.
강기(罡氣).
초절정의 고수들은 이 무림에 생각보다 많다.
그중에서도 수많은 전투 경험을 거치면서 성장한 특출 난 고수들이 많다.
그런데, 대부분의 거대 조직에선 진짜 강자를 규정하는 기준을 화경에 둔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강기.
같은 수준이라고 했을 때, 특출 난 보검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검을 맞대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드는 파괴의 상징.
그것과 벌써 몇 번이나 충돌했을 설천위의 도는 도저히 보도(寶刀)라 부르기엔 부족한 물건이다.
즉.
‘……화경에 올랐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던 윤백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강기(罡氣)가 괜히 파괴의 상징인 것이 아니다.
한번 보면 단숨에 그것이 강기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고 그 특색이 뚜렷하다.
설천위가 도에 강기를 둘렀다면 자신은 몰라도 상대하는 노공은 반드시 알았을 것이다.
노공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얇게 강기를 두를 수 있는 수준이라면 저렇게 당하고 있지도 않을 테지.
즉, 설천위는 무언가 모종의 방법으로 저 강기를 버텨 내고 있다는 소리다.
‘역시 처리하는 것이 답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윤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해서라도 이 계획을 강행한 것이 역시 정답이었다.
교 내부에 있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공이 직접 움직인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만약 노공 없이 자신들끼리만 왔다면…….
‘확실하게 놓쳤겠지.’
설령 이쪽이 전멸당하지 않았더라도 확실하게 놓쳤을 거다.
그랬을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지금의 설천위는 기묘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윤백이 긴장을 유지한 채 전투를 관찰하는 사이, 마찬가지로 경계심을 품은 상태로 설천위를 바라보던 노공은 미간을 찡그렸다.
‘변했다.’
기세가 변했다.
그것을 감지한 노공은 검을 쥔 손에 미약하게나마 힘을 더했다.
긴장으로 힘을 더하는 건 악수지만, 어쩔 수 없다.
‘참수사신…….’
애송이의 몸을 빌려 자신의 검을 막아 냈던 고인.
생전의 평도 자신보다 위였던 진짜 고수.
그 실력을 몸으로 느꼈던 자신이다.
무엇이든 베는 참격이라는 벽을 뚫지 못하고 결국 물러났던 치욕.
이번에는 그리되지 않으리라.
각오를 품은 노공의 검이 순식간에 하늘로 솟구친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더 빠르게 아래로 내리긋는다.
초절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신속의 내려치기.
거기에 더해 혈첩검(血疊劍)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는 그의 독문무공이 빛을 발한다.
기(氣)의 중첩으로 인해 생기는 거대화.
마치 동시에 몇 번이나 내려치기를 하는 것 같은 참격이 설천위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자, 베어 봐라.
참수사신.
하지만 이번엔 같은 수에 당하진 않을 것이다.
죽어 버린 당신의 도(刀)는 앞으로 나아가는 내 검을 결코 막아 내지 못할…….
깡!
순간, 본능적으로 몸을 비트는 것과 함께 검을 당긴 노공의 표정이 변했다.
“……검?”
어느새 설천위의 손에 들려 있는 또 다른 무기.
분명 설천위가 검과 도를 번갈아 쓴다는 정보는 알고 있다.
하지만, 참수사신의 도(刀)를 배우고 있다고 추정되는…….
“……설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또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린 노공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만약, 죽은 참수사신에게 도(刀)를 배우고 있는 거라면.
다른 혼에게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가 있는 무림학관이라면.
또 다른 화경급 고수의 혼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흐음, 이런 느낌인가?”
[흐음, 이런 느낌인가?]
여태까지의 설천위와는 전혀 다른, 차분한 음성이 울려 퍼진다.
거기에다 그저 담담하게 가라앉은 눈동자.
전혀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그 눈동자에 노공은 검을 쥔 채 그를 바라봤다.
“허허, 자기소개를 부탁해도 되겠는가?”
허허롭게 웃는 노공의 부탁에 설천위가 아닌 현태중은 고개를 저었다.
“적과 담소를 나누는 취미는 없다.”
[적과 담소를 나누는 취미는 없다.]
담담하게 대답하며 현태중은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크르르르르르르.]
그의 몸은 물론 검을 감싸고 있는 패융의 기운이 느껴진다.
부족하기 그지없는 설천위의 무재(武才).
그런데 어느새 초절정 고수를 상대할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강해졌다.
그 힘의 핵심.
“훌륭하군.”
[훌륭하군.]
왜 패도를 걷는 자가 품어야 하는 힘인지 알 것 같다.
전신에 가득 흘러넘치는 힘.
육체를 감싸는 강렬한 힘.
무너지지 않는, 불굴의 존재까지.
만약, 얼마 전에 보았던 백유라는 아이에게 이 힘이 있었다면 능히 혼자만의 힘으로 눈앞의 상대와 자웅을 가릴 수 있었겠지.
무(武)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해 주는 또 하나의 힘.
그것은 무인들이 흔히 사술이라 부르는 것이지만, 그 영역을 가볍게 뛰어넘은 힘이다.
그래, 지금처럼.
한순간 눈빛이 날카로워진 현태중의 검이 자취를 감춘다.
설천위가 억지로 몸에 새겨 넣은, 딱딱한 움직임이 아니다.
마치 부하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처럼.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처럼.
부드럽기 그지없으면서도 한없이 자연스러운 일격.
허나, 그 결과는 부드럽지 않았다.
“큭!”
거의 베일 뻔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노공은 흐트러진 자세를 억지로 다잡아 검을 휘둘렀다.
몸이 삐걱거리지만 억지로 충격을 소화해 내며 검을 움직인다.
아무리 자신이 모르는 고수의 혼이 몸에 깃들었다고 한들, 고작해야 빌린 몸.
그리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강기(罡氣) 없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참수사신과 다르다.
참수사신은 말 그대로 베는 것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던 존재.
자신의 강기를 베어 내는 것이 가능했다.
상성이란 것이 있는 법.
벨 수 있지만, 딱 거기까지.
속도도, 힘도 부족하다면 얼마든지 찍어 누를 수 있다.
그리 생각해서 이리 온 것이다.
거기에.
‘보고로 들었던 그 검법(劍法)의 주인일 터!’
설천위가 이따금씩 보여 주는, 말도 안 되는 검식(劍式).
그 궤적이 존재하지 않는 검이 바로 지금 상대하고 있는 존재의 것일 터.
그렇다면 그것만 주의하면 된다.
무엇보다, 시간을 끌 수만 있다면 승리는 자신들의 것.
한 번.
딱 한 번만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다면, 침착하게 상황을 주도해 나가면…….
“강기(罡氣) 따위에 집착하니 그 나이가 되도록 그 자리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강기(罡氣) 따위에 집착하니 그 나이가 되도록 그 자리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비웃는 듯한, 아니 훈계하는 듯한 목소리.
그 목소리와 함께 검이 움직였다.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내는 궤적.
입으로는 허세를 부려도, 결국 하는 건 방어다.
그 허세를 단숨에 찍어 눌러 주마.
노공의 눈이 살벌한 안광으로 번뜩이고 두 검이 맞부딪치는 순간.
“……노오옴!”
억지로 검을 비틀어 공격을 막아 낸 노공은 노성과 함께 설천위를 노려봤다.
방어를 하는 듯하면서 동시에 내지르는 공격.
조금 전의 공격은 그야말로 동귀어진의 수법이었다.
궤적을 숨기는 기묘한 검술을 쓴다고 한들, 방어를 버렸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으니까.
“네 녀석이 목숨을 내던지더라도 나를 벨 순 없을 것이다.”
순간 상대의 계략에 당할 뻔했다는 것을 깨달은 노공이 한껏 경계심을 끌어올렸지만…….
“어리석구나.”
[어리석구나.]
[크르르르르르르.]
패융을 믿고 오로지 공격에만 집중했던 현태중은 혼자서 난리를 치는 노공을 비웃으며 검을 들었다.
“네놈은 오만에 빠져 있다.”
[네놈은 오만에 빠져 있다.]
담담하게 검을 든 현태중은 어떻게 해서든 손해 없이 이 몸을 베고자 하는 노공을 바라봤다.
“지금 네가 하고자 하는 것이 욕심이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 듯하군.”
[지금 네가 하고자 하는 것이 욕심이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 듯하군.]
“무슨 헛소리를…….”
“쯧쯧.”
[쯧쯧.]
혀를 차는 목소리.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노공을 보며 현태중은 고개를 저었다.
“이놈을 죽이고 싶었다면, 네 녀석 혼자 왔어야지. 쓸데없는 돌다리를 만들지 말고.”
[이놈을 죽이고 싶었다면, 네 녀석 혼자 왔어야지. 쓸데없는 돌다리를 만들지 말고.]
끄륵.
무언가가 숨이 넘어가는 소리.
그 순간, 기묘한 위화감을 느낀 노공의 시선이 돌아갔다.
“이, 이놈들 왜 이래!”
“커헉!”
서로 칼부림이 나기 시작한 부하들.
그 속에서 몇 개의 검이 자신을 향한다.
끼릭.
일류.
그냥 제어하라면 힘들겠지만…….
[끄아아아아아!!]
인간의 혼을 제물로 영력을 뽑아낸다면 억지로 지배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하물며 정신력이 낮은 사파의 무인이라면, 절정급 무인도 충분히 지배할 수 있다.
“이, 이게 무슨……!”
처음 죽인 혈사련의 무인을 시작으로 혼들을 불태우며, 괴를 조작해 주변을 침식하기 시작한 설천위.
그로 인해 펼쳐진 끔찍한 혼란에 노공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그리고 그런 노공을 보며 현태중은 검을 들어 그를 겨누며 웃었다.
“빠르게 끝내지.”
[빠르게 끝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