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137화-흑룡은 고고해야 한다 (4)
패기(覇氣)란 군림하는 힘이다.
선천적으로 얻을 수도 있고, 후천적으로도 얻을 수 있다.
설천위의 경우는 당연히 후천적으로 얻은 것이다.
[혼원패공(魂元覇功)]이라는 절세의 무공으로 없던 재능을 강제로 개화시킨 것.
거기에다 게임 시스템을 이용해 억지로 스탯을 올린 것일 뿐.
설천위라는 인물 자체는 패기(覇氣)와 그리 어울리는 인간이 아니다.
이제는 꽤나 익숙하게 사용하지만, 스탯이 낮고 스킬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을 땐 패기로 누군가를 압박하는 것도 능숙하게 해내지 못했을 정도였으니까.
지금이야 꽤나 세세하게 제어가 가능해졌지만.
여하튼, 패기란 것은 후천적으로 손에 넣을 순 있지만 방법이 극히 제한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그 성장 또한 힘겹다.
즉, 후천적으로 얻기에는 정말로 힘든 힘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그렇기에 패기를 선천적으로 지니고 태어난 자들은 격이 다른 삶을 살아간다.
농부로 태어나서 왕이 된 자가 그렇듯.
소국의 왕으로 태어나서 천하를 통일한 이가 그렇듯.
그 자질을 타고난 이는 그것이 개화되는 시점부터 보통의 사람과는 궤를 달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시작점을 지금 설천위는 목도하고 있다.
[타고난 군주로다.]
천마의 칭찬 겸 감탄에 설천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흑룡을 몸 전체에 두른 채 검은 아우라가 넘실넘실 흘러넘치는 백유의 모습은 그야말로 군주라는 말이 딱 어울렸으니까.
더불어.
[벌써 능숙하게 제어하고 있구나.]
급격한 개화로 흘러넘치는 패기를 자연스럽게 통제하고 있었다.
주변에 피해가 가지 않게, 자신의 등 뒤에 선 이들이 자신의 존재에 짓눌리지 않게.
오로지 적을 향해서, 자신에게 검 끝을 향하는 이들에게만 그 힘을 행사하고 있다.
그 능숙함은 마치 수년간 이 힘을 다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섬세했다.
“검이 멈췄어, 할배.”
“……기고만장하지 마라.”
입꼬리를 올린 채 자신을 비웃는 백유를 보며 사추홍은 까득, 이를 악물었다.
고작해야 기세가 바뀌었을 뿐이다.
저 흑룡의 존재는 기겁할 만큼 놀랍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신이 우위에 서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던 시선을 낮춰 차분하게 싸우면 승리는 오로지 자신의 것이 된…….
“쯧, 말했잖아.”
순간, 거리가 가까워진 것이 느껴질 정도로 또렷해진 목소리에 사추홍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화려한 초식 따윈 없는, 오로지 베기 위한 일격.
본능에서 나온 깔끔하기 그지없는 일격은 사람을 양단하기에 차고 넘치는 예기(銳氣)를 품었지만…….
“안일하다니까.”
[크르르르르르.]
막혔다.
너무나도 허무하게.
흑룡의 주둥이에 물린 검은 마치 바위틈에 단단하게 낀 것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거기에다.
뿌득.
“당신들은 너무 안일해. 아, 그러고 보니 이건 당신한테 했던 얘기가 아닌가?”
“끄윽!”
검을 쥔 팔이 백유의 손아귀에서 부러지며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에 사추홍은 이를 악물었다.
대체 언제?
대체 어떻게?
자신이 반응하기도 전에 내 팔을……!
“이게 당신이 이류라는 증거지.”
“네년……!”
“세월이 쌓여 검은 단단해졌을지라도 스스로는 물렁하기 그지없다는 증거.”
사추홍의 분노에도 백유는 그저 담담하게 사추홍의 어깨를 붙잡았다.
“내가 빨라진 것이 아니야. 당신이 둔해진 거지.”
차갑게 빛나는 눈동자.
그 손은 사추홍의 어깨를 그대로 으스러트린다.
압도적인 악력.
양팔에서 흑룡의 문양이 묵빛으로 일렁인다.
“끄으으으윽!!”
차마 대놓고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이를 악물고 애써 참는 사추홍이지만, 그 모습은 이미 모두의 눈 속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들 모두가 품은 의아함은 하나.
왜 사추홍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가.
백유가 빠르긴 하지만 사추홍의 실력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은데.
대체 왜?
완벽에 가까운 패기의 사용으로 생기는 괴리감이 이 공간 전체에 드리워졌다.
오로지 설천위만이.
그 힘의 사용법을 아는 설천위만이 상황을 온전히 이해했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력이 부족하긴 해.”
초절정의 무인이다.
아무리 패융을 빌려주었고 백유가 선천적으로 패기의 자질을 타고난 인물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손발을 제대로 못 쓰는 건 이상하다.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
실력에 비해 정신력이 부족하다는 소리다.
젊은 시절에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좋은 환경에서 약한 학생들을 상대하는 것만을 업으로 삼으며 자신의 수양을 게을리 했기에 나약해진 것이다.
약자보다 항상 우위에 있는 자신에게 만족한 채 나태해진 것이다.
약자가 자신을 추월하면, 젊은이의 성장이라며 외면했기에 뒤처진 것이다.
설천위도 짐작할 수 있는 명확한 사실.
당연히 그 중심에 선 백유는 누구보다 확실하게 사추홍의 모자람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역시 당신은 학관장의 자질이 없어.”
학생의 모범이 되어야 할 자가.
후학들의 목표가 되어야 할 자가 이런 꼴이라니.
이건…….
“살려 둘 가치조차 없구나.”
조소와 함께 백유는 팔을 당겼다.
그리고 그 모습에 순간 얼어붙는 이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모두의 시선이 경악으로 물드는 순간.
“안……!”
여미려가 다급하게 외치려는 순간.
이미 백유의 손은 사추홍의 목을 가르고 있었다.
벤다기보다는 뜯어낸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끔찍한 방식.
그 목이 땅에 떨어진 것을 확인한 백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우리는 본래 가야 할 길로 갈 것이다.”
* * *
“……하?”
사천맹의 제3 참모, 도백은 아침부터 들려온 보고에 놀라 헛바람을 삼켰다.
“아니, 다시 말해 봐. 내가 잘못 들은 거지?”
“그것이……. 그렇다면 제대로 들으신 게 맞을 겁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부하의 반응에 도백은 한 번 더 탄식을 흘렸다.
“사추홍이 죽었다고? 그것도 학생의 손에?”
“예. 백유라는 녀석입니다.”
“……이름조차 들어 본 적이 없군.”
이건 아주 큰 문제다.
중대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일단, 아침 회의에 이 안건을 올리도록 하지.”
“예. 자료를 정리해 오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자세한 경위서도 가져와. 당장.”
“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는 부하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도백은 이내 천장을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허……. 이것 봐라?”
흑룡학관이 세워진 지 수십 년.
학관장이 바뀐 적이 몇 번 있긴 했지만, 이렇게 바뀐 사례는…….
“……있지.”
있다.
놀랍게도.
옛날에도 한 번 이랬던 적이 있다.
흑룡학관이 한 번 문을 닫기 이전.
사파가 정파를 억누르기 이전에 있던 흑룡학관에서 일어났던 일.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고 몇 년 뒤에 사파는 역사에서도 얼마 없었던 성세를 누렸다.
단 한 사람의 존재로 인해.
“……주책이야.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는군.”
과연, 어떤 녀석이 그 역사를 재현하고 있는 걸까.
아니, 역사가 재현되고 있는 것은 맞을까?
도백의 입꼬리가 삐죽거리며 올라갔다.
* * *
“……대책 회의가 필요해요.”
“뭐 할 수 있는 게 있나?”
“없어도 해야죠!”
심드렁한 거완의 대답에 여미려가 빽 하고 소리쳤다.
“사천맹은 하극상을 엄하게 처벌하는 조직이에요! 지금 당장 야반도주를 해도 살까 말까 한 상황인데……!”
“우리가 뭐 잘못한 게 있나?”
이딴 반응이라니……!
백유의 심드렁한 반응에 벼랑으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감을 느끼며 여미려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후, 잘못한 게 많죠. 그것도 아주 많아요.”
교관들을 학살한 것.
사추홍을 죽인 것.
전부 잘못이다.
그것도 큰 잘못.
아무리 사파가 서로 물고 뜯는 세계이고, 배신은 당하는 놈이 잘못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선이란 것이 있다.
부모 자식.
형제.
사제지간.
이런 관계에서 배신이 일어나면 당연히 일으킨 놈이 죄인이 된다.
저 관계는 그야말로 천륜으로 묶인 사이가 아닌가.
아무리 느슨한 사제지간이라고 하지만 교관들을 몇이나 학살하고 그 우두머리인 학관장까지 죽인 건 사안이 크다.
교관들을 죽인 것이야 그들이 잘못된 억압을 하려던 상황이니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겠지만…….
사추홍은 다르다.
교관의 목을 들고 대로를 걸으며 시비를 먼저 건 것은 백유이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난투에서 죽은 학생들의 숫자도 상당하다.
나름 이름 있는 가문의 자제들도 죽거나 다친 상황.
모든 죄가 누구에게로 향할지 안 봐도 뻔했다.
그런데 정작 그 당사자는…….
“천위, 어때 잘 구워졌지?”
“역시 요리 솜씨 하나는 훌륭하네.”
“지금 꼬치가 중요해요?!”
산에서 잡은 사슴이나 구워 먹고 있는 꼴이라니.
짜증 나는 점은 진짜 요리를 잘해서 노린내가 거의 안 날 정도로 잘 굽고 있다는 점이다.
무슨 향신료를 썼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뭐, 걱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나?”
[뀨우!]
어깨에서 그르릉 소리를 내는 패융을 쓰다듬으며 설천위는 꼬치를 뜯었다.
패융 녀석, 그래도 내게 돌아와 줬구나.
네가 실체만 있었어도 이 고기를 나눠 먹었을 텐데…….
패융의 복귀에 행복해하던 설천위는 끊임없이 패융을 바라보는 백유에게서 슬쩍 패융을 숨기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아마 잘 해결될걸?”
설천위가 사추홍에게 막 들이댔던 이유가 뭔가.
사추홍은 대부분 죽거나 쫓겨나는 결말을 맞이해서였다.
그 뒤에 올 후폭풍?
그리 걱정 안 해도 되는…….
‘……그러고 보니 조금 상황이 다르네?’
게임에선 친선전의 대패로 사추홍의 입지가 거의 나락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당연히 그의 패배를 마음에 안 들어 하던 사천맹의 수뇌부는 그를 내치는 선택을 했고.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잖아?
순간, 살짝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설천위는 옆에서 고기를 굽고 있는 백유를 바라봤다.
“만약 진짜 위험해지면 어떻게 할 거야?”
“응?”
여태껏 느긋하던 설천위가 갑자기 걱정하는 듯한 질문을 던지자 순간 의아한 얼굴로 반문한 백유는 묘한 걱정이 담긴 설천위의 눈을 마주하곤 피식 웃었다.
“너한테 시집가서 정파에 의탁할까? 그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난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라니까.”
“삼처(三妻) 정도야 영웅의 덕목이지.”
“그건 귀족들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고.”
나 같은 일반 양민은 처를 셋이나 먹여 살릴 능력이…….
‘……되네?’
우리 가문이 어딘가.
거기에다 나는 무공 실력도 있으니…… 어쩜 할 만할지도?
[마님한테 이를 거예요.]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청아의 청아한 협박.
몸의 반응은 재빨랐다.
“헛소리 말고, 진짜 대책 없어?”
[껄껄껄, 공처가 놈.]
천마를 비롯한 혼들의 비웃음을 넘기며 설천위는 백유를 바라봤다.
“뭐, 정말 안 되면 도망치겠지만 굳이?”
“흠……. 꽤나 당당한 태도구나.”
순간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어느새 백유의 앞, 여미려의 옆에 해당하는 자리에 앉아 꼬치를 들고 있는 노인.
흰머리는 물론 수염까지 하얗게 세어 버린 노인은 기골이 장대해 도저히 노인이라고 보기 힘들어 보였다.
거기에다 모두의 이목을 당연하다는 듯이 속이는 은신술.
순간, 당황한 이들은 각자 다른 반응을 보였다.
여미려는 무기에 손을 올렸고.
거완은 위압된 듯 딱딱하게 굳어 버렸고.
서현덕은 기묘한 것을 본 것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각자가 다른 반응을 보이게 만드는 존재감.
그 존재감을 드러낸 노인을 보며 백유는 웃었다.
“할아버지는 어디서 오셨어요?”
“나 말이냐? 허허, 그냥 재미난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구경 온 것뿐이다.”
구경 온 것뿐이다.
그 말을 모두가 믿지 않았지만, 설천위는 믿었다.
그는 노인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까.
사존(邪尊) 구령학.
현 사천맹의 맹주.
사파의 지존.
“허면 나도 궁금하구나. 너는 무엇을 원해 그들의 목을 취한 것이냐?”
그가 백유를 보기 위해 직접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