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136화-흑룡은 고고해야 한다 (3)
치욕적이다.
이런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을 느끼며 사추홍은 검을 휘둘렀다.
깡!
검은 막혀 허공에 잠시 머물었지만, 사추홍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벤다.
오로지 그 사실 하나에 집중한다.
왜냐고?
베어야 하니까!
교관 시절, 자신에게 검을 들이밀었던 놈들을 멀쩡하게 숙소로 보낸 적이 없었다.
최소 며칠, 길면 몇 주는 앓아누워야 할 정도로 혼쭐을 내 줬다.
당연히 나중에는 자신에게 검을 들이미는 놈 따윈 없었다.
전장에 나서는 놈들도 그러했는데.
감히 학생 따위가.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들이……!
상황을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더욱 강해지는 치욕감과 솟구치는 분노에 사추홍의 검은 점차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난폭하게.
잔혹하게.
모든 공격은 사혈을 노린다.
설령 상대가 피하더라도 어떻게든 추적해 사지라도 노린다.
그야말로 잔혹하기 그지없는 검술.
교관이 되기 전, 전장에서 갈고닦았던 실전 검술이다.
거창한 검법?
쓸 필요 없다.
학생 놈들에게 오히려 낯선 것은 실전에서 다져진 날카로우면서도 질척거리는 검술이다.
그러니, 빠르게 정리해 주마.
네년을 정리하고 나면 다른 놈들 따윈 순식간에 무너트릴 것이다.
독기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백유를 노려보는 사추홍의 검이 한층 더 거칠어진다.
“흠.”
몰아붙이고, 또 몰아붙인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설천위는 가볍게 턱을 쓸었다.
사추홍, 생각보다 강한데?
[승률이 그리 높진 않겠구나.]
[연륜이란 쉽사리 무시할 수 없는 법이지.]
혼들의 평가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상황.
백유가 뛰어난 감각으로 공격을 제때 막아 내서 큰 피해를 막고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유는 당연히 내공의 차이 때문.
늙으면 육체가 약해지는 것은 당연하나 내공은 시간의 축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추홍 정도의 나이라면 내공으론 거의 백유의 배에 가까울 터.
영약을 먹고 난 뒤에도 그 정도니 먹기 전에는 도저히 상대해 볼 엄두가 나지 않을 수준이었을 거다.
그걸 알았으니 백유도 가만히 있었던 것일 테고.
광기가 있는 거지 어리석은 건 아니니까.
뭐, 지금 감탄해야 할 부분은 그게 아니다.
“용케도 잘 버티네.”
자신보다 내공이 곱절은 많은 사추홍과의 전투를 잘도 버텨 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무림인들이 외공보다 내공에 집중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내공은 그 자체로 비현실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는 불가해한 힘.
노화로 인한 육체의 쇠약?
내공만 있다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
반대로, 무기에 담아내는 내공과 검기를 유지하는 내공.
이 두 가지가 풍부하면 서로 같은 효율을 낼 수 있어도 더 많은 양을 투자해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하물며 사추홍은 검을 쓰는 반면, 백유는 강화된 자신의 육체로 싸우고 있다.
불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백유는 생각보다 더 안정적으로 버텨 내고 있었다.
한순간의 빈틈을 노리며.
설천위를 비롯해 그 사실을 읽어 낸 이들은 두 사람의 전투를 흥미롭게 지켜봤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전투를 바라봤다.
점점 더 격화되는 싸움.
카각!
이젠 소매가 완전히 사라진 매끈한 팔로 사추홍의 검을 받아 내는 백유.
사추홍이 양손으로 내려친 공격을 막기 위해 양팔을 교차시켜 방어한 백유는 검을 빼지 않는 사추홍을 보며 웃었다.
“할배, 왜 이렇게 팔팔해?”
“쯧, 이리도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서 그릇된 길로 나아가다니.”
백유의 도발을 혀를 한 번 차는 것으로 넘겨 버린 사추홍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는 백유를 바라봤다.
뛰어나고.
훌륭하다.
교육자로서의 감각이 이 아이는 분명 크게 될 거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렇기에 욕심이 났다.
이 녀석을 내 손으로 키워 낼 수 있다면.
내가 이 녀석의 스승이 될 수 있다면……!
욕심으로 번들거리기 시작한 눈동자.
조금 전까지의 치욕도 분노도 잊어버리고 오로지 욕망으로 번뜩이는 눈빛은 그야말로 사파의 표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단한 놈이네.”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을 읽어 낸 설천위가 헛웃음을 지을 정도로 너무나도 노골적인 욕망의 표현.
하지만 그 욕망의 표현에 백유는 오히려 입꼬리를 비틀었다.
“뱀의 머리긴 해도 역시 머리는 다르네.”
저기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가짜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결속이라는, 말도 안 되는 교육관만 아니었어도 꽤나 마음에 드는 교관이었을지도.
사추홍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올리며 백유는 사추홍의 검을 튕겨 냈다.
“끝내자.”
아직 길게 싸우기엔 내공이 부족하거든.
* * *
끝내자.
백유의 그 선언과 함께 전투는 더욱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그저 사추홍의 검을 받아 내기만 하던 백유가 태세를 공세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달려들어 팔을 휘두른다.
주먹이 아닌 손을 뻗는 동작.
조법(爪法)이라 부르는 무공의 결과 비슷했지만, 본질적인 부분에서는 차이가 났다.
여타 조법(爪法)은 강화된 손톱으로 상대를 할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베어 내거나 살점을 긁어내는 형태의 공격법.
하지만 백유는 살점을 쥐어뜯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아니, 살점을 쥐어뜯는 것만이 아니라 붙잡아 뼈를 부수고 근육을 꿰뚫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무공이라는 것으로 정의할 수 없는, 그저 살육과 파괴만을 위한 움직임.
거칠게 몰아붙이기 시작하는 공격에 사추홍이 방어밖에 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주변에 모인 학생들의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거 어쩌면.
어쩌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추홍이라는 폭군을 끌어내리고 이 학관에 자유를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학생들이 부푼 기대로 뜨겁게 달궈지는 그 순간.
[이건 좋지 않구나.]
[너무 섣부르군.]
[경험이 부족한 게지.]
혼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설천위만이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천마를 비롯한 화경급 고수들의 비관적인 견해.
그들은 하나같이 백유의 패배를 점치고 있었다.
“이유가 뭔데요?”
[저자는 분명 교관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예, 맞아요.”
[교관이란 건 강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가르칠 것이 있어서 되는 것이지.]
“그렇죠.”
그러니까 더더욱 의문이다.
사추홍이 강한 건 사실이지만, 늙은 것도 사실.
아무리 내공의 격차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지만 백유는 그 격차를 훌쩍 뛰어넘는 재능을 지니고 있다.
누가 봐도 백유가 유리한 지금, 사추홍이 이길 확률은 썩 높아 보이지 않는데…….
[하지만 사파의 교관은 강할 필요가 있지. 최소한 자신이 가르치는 대상보다는 말이다.]
[그리고 강함은 꼭 무공의 고하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너도 잘 알고 있지 않으냐?]
혼들의 설명이 끝난 순간.
그제야 무언가를 느낀 설천위가 다시금 사추홍을 관찰하려는 순간.
“흡?!”
사추홍의 검이 백유의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쯧쯧, 정말 훌륭한 재능이다.”
혀를 차는 것과 달리 칭찬의 말이 나온다.
검 끝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사추홍은 담담하게 백유를 바라봤다.
한순간의 빈틈을 정확하게 베어 낸 것이다.
그 한순간의 빈틈조차 치밀한 계산으로 만들어 낸 것.
“어설퍼. 합공은 왜 하지 않았느냐?”
“방해되니까.”
“쯧쯧, 그게 어설프다는 것이다. 합공은 소꿉놀이가 아니다. 또 다른 방패를 세우는 것이지.”
방패를 세운다는 것.
그 말의 의미를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못 알아들을 리가 없다.
같이 싸우는 상대를 방패 삼아, 미끼 삼아 적을 공략하라는 뜻.
도저히 학생들 앞에서 할 만한 얘기는 아니지만…….
“맞는 말이군.”
“역시 학관장인가?”
사파의 새싹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들.
그 모습에 헛웃음을 흘린 설천위는 백유를 바라봤다.
사실, 맞는 말이긴 하다.
합공은 사파의 기본.
아니, 어떤 악당이 적과 혼자 싸운단 말인가.
전대물의 괴인도 아니고.
1대 다수는 전략의 기본이다.
하지만.
“그러니까 당신은 안 되는 거야.”
담담하게.
옆구리에 흐르는 피를 근육을 조여 막은 백유는 사추홍의 말을 부정했다.
왜냐고?
“아까 말했을 텐데? 흑룡은 고고해야 한다고.”
“고고하다고 한들 죽어 나자빠지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건, 전장에서의 이야기.”
“……뭐라?”
순간 분노가 깃드는 사추홍의 눈빛.
백유의 재능을 기꺼워하던 교육자의 풍모조차 날릴 정도의 헛소리에 사추홍의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그럼, 지금 이곳은 전장이 아니라는 소린가?
그런 정신 나간 상태로 이 자리에 서 있다고?
사추홍뿐만 아니라 지켜보던 이들 모두의 표정도 의아하게 변하는 순간.
“집안싸움에선 그렇게 해선 안 되는 법이지.”
“뭐라……?”
“맏형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다른 형제들이 전부 손을 잡고 맏형의 목을 치는 건 너무 도리가 아니잖아?”
……뭐, 그럼 동생이 일대일로 맏형의 목을 치는 건 되냐?
아무리 그래도 그건…….
“일대일로 정정당당하게 겨뤄서 목을 쳐야지.”
……씁.
너, 미친년이었지?
조금 멋있어서 내가 깜빡 까먹고 있었네.
대체 어떤 도리가 형제간의 살육을 용인해 주는지는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의 도움 정도는 받을 수 있겠지.”
피식 웃으며 백유는 나를 바라봤다.
“천위, 그것 좀 빌려줘.”
“그거?”
“네가 몸에 두르고 다니는 녀석.”
“응?”
순간,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내가 몸에 두르고 다니는 것, 아니 녀석.
하나밖에 없다.
패융.
백유는 초기부터 영안을 가진 캐릭터가 아니다.
즉, 아직 패융을 볼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패융의 존재가 꽤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긴 했어도 흑룡학관에 퍼질 정도는 아닌데?
하물며 외부 활동을 하는 세력을 가지지 않은 백유가 알 수 있는 정보는 더더욱 아니고?
“왜 못 빌려줘?”
“……아니, 빌려준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해 봤는데?”
의아하긴 하지만 일단 넘어가자.
워낙 동물에 가까운 감각을 지닌 녀석이니 대충 눈치챈 것일 수도 있겠지.
사소한 의문점은 넘긴 채 설천위는 패융을 불러냈다.
[뀨?]
작을 땐 한없이 귀여운 녀석.
“……갈 수 있겠어?”
아니, 무리겠지.
사추홍도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그냥 바라보고 있으니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 상당히 뻘쭘해질…….
[뀨!]
“……갈 수 있어?”
[뀨뀨!]
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가고 싶었던 거구나?
나를 버릴 생각은 아니지? 응?
살짝 서운함까지 들 정도로 격하게 기뻐하는 패융의 반응에 한숨을 내쉬며 설천위는 힘을 끌어올렸다.
그냥 준다고 한들 뭐 보이지도 않을 테니 실체화 정도는 시켜 줘야겠지.
[패룡지체(覇龍之體)]
[패룡지기(覇龍之氣)]
[패룡지심(覇龍之心)]
심기체가 일치되어 패융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크르르르르르.]
“요, 용?”
“흑룡이다!!”
나의 몸을 감싸며 나타난 패융이 낮은 울음소리를 흘리며 몸을 날린다.
두 눈을 크게 부릅뜬 사추홍이 입을 열 생각도 못 한 채 경악하고 있었지만, 백유는 그런 것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패융을 받아들였다.
[크르.]
“이 아이 이름은?”
“……패융.”
“나쁘지 않네.”
웃으며 패융의 머리를 쓰다듬는 백유.
그러자, 제가 무슨 고양이라도 된 것처럼 몇 번 그르릉 소리를 내던 패융은 자신의 몸으로 백유를 휘감았다.
언뜻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
허나, 패융이 그녀를 완전히 휘감는 순간 그런 걱정 따윈 깔끔하게 날아가 버렸다.
“……미친?”
공간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기세.
그야말로 위에 서는 자.
훤히 드러난 백유의 양팔에 새겨지는 흑룡 문양.
그 모습을 본 순간, 설천위는 깨달았다.
자신이 게임을 하면서 패기 스탯을 보지 못했던 이유.
백유를 주캐로 플레이하지 않아서였던 거다.
패융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에게 간 이유가 짐작이 갔다.
애초에 그녀가 패융의 주인이었을지도 모르는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과연, 이런 느낌인가?”
흑룡을 두른 채 검은 패기를 넘실넘실 뿜어내는 백유가 고혹적인 미소와 함께 사추홍을 바라본다.
“말했지? 흑룡은 고고해야 한다고.”
사추홍의 검이 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