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128화-꼬우면, 알지? (2)
검기(劍氣).
검 혹은 자신의 무기에 내공을 둘러 절삭력, 내구력, 범위 등등을 상승시키는 기술.
절정 이상의 무인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기술.
일류만 돼도 흉내는 낼 수 있는 기술이다.
그런데 설천위는, 그 검기를 제대로 써 본 적이 없었다.
왜냐고?
그만한 제어력이 없으니까.
내공 자체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정신력이 높고, 영적인 부분에 재능이 뛰어나기에 내공도 어느 정도는 잘 다뤘다.
문제는 육체다.
그 내공이 흐르고 뭉쳐야 할 육체가 말썽이었다.
끊임없이 변하는 육체.
그걸 감각으로 제어해 항상 같은 수준을 유지해야 하는데, 설천위는 그게 되지 않았다.
혈도의 상태는 좋았다 나빴다를 마치 널뛰듯 하고.
근육은 미묘하게 틀어져 혈도의 폭을 좁히며.
날카로워야 할 감각은 쉽게 흐려져 버린다.
그 악조건 속에서 설천위는 싸웠다.
“좋네.”
그렇기에, 흑원대주라는 강적을 앞에 두고서도 설천위는 여유로울 수 있었다.
왜냐고?
원하는 대로 됐으니까.
이젠 바라는 대로 몸이 움직였으니까.
[크르르르르르.]
설천위의 내공을 타고 움직이는 패융이 기분 좋게 울음을 흘린다.
설천위의 안에서, 그 기의 흐름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느끼던 패융이기에 그 상쾌함에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노옴!”
쾅!!
말 그대로 공간이 터지고 땅이 뒤집히는 것 같은 충격 속에서도 설천위는 웃었다.
본격적으로 내공을 끌어올리니 그 날카로움이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다.
오로지 힘과 힘의 충돌만으로 충격파를 만들어 낼 수 있었는데, 거기에다 이젠 검기가 추가됐으니…….
두 사람 다 검(劍)을 쓰지 않기에 검기라 부르면 어색하지만.
뭐, 무슨 상관인가.
“좋네.”
이렇게 할 만한데.
몸을 비틀며 공격을 피해 내는 것과 동시에, 몸의 선을 하나로 만든다.
마치 펜싱을 하듯.
차분백을 향해 선을 만드는 육체.
그리고 무게중심을 단숨에 앞으로 기울인다.
도(刀)를 들고 있는 것은 한 손뿐이지만, 자연스럽게 무게 전체를 실은 일격은 빠르고 강력했다.
“큭!”
미친 멧돼지처럼 공격하던 차분백이 내려찍던 도끼를 다급히 회수할 정도로.
키이이이이잉!
기(氣)와 기(氣)가 맞물리며 생겨난 기묘한 소음이 공간 전체로 퍼져 나간다.
그 모습에 학생들은 생각했다.
‘……우리끼리 하면 안 저러던데?’
검기(劍氣)가 위험한 기술이긴 하지만 연습을 안 할 순 없다.
합을 맞추는 대련에선 검기를 쓰는 연습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안전이 확보된 대련이니까.
그런데, 그 어떤 때라도 저리 강렬한 소리가 난 적은 없었다.
‘……괴물 놈이.’
그 답을 알고 있는 사추홍은 살기가 일렁이는 눈빛으로 설천위를 노려봤다.
알고는 있었지만, 더 뛰어나다.
확실하게 검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저기 있는 미숙한 학생들처럼 무작정 무기에 내공을 욱여넣어 만들어 내는 가짜가 아니다.
무기에 내공을 흐르게 해 원하는 흐름을 만들어 낸 진짜 검기.
그 절삭력은 학생들이 쓰는 미숙한 검기에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학생들 중에선 제대로 쓰는 이가 거의 없는 검기다.
‘무림학관…….’
벽이 느껴질 정도의 강함.
전에 왔던 놈들은 쭉정이였던가?
이만한 녀석이 대체 왜 여태까지 몸을 낮추고 있었던 거지?
낙제생으로 1년을 보냈던 설천위의 정보를 떠올리며 사추홍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까지다.
여기까지 봤으면 충분하다.
차분백이 반발하겠지만, 이제는 말려야 할 때다.
이대로 가면 둘 다 크게 다칠 것은 확실하고 설령 이긴다고 할지라도 오명밖에 남지 않을 거다.
흑원대주에게도, 자신에게도.
그러니 말려야 한다.
결정을 내린 사추홍이 끼어들려는 그 순간.
“안 됩니다. 학관장님.”
“……뭐 하는 짓이냐.”
자신의 앞을 막은 백유의 모습에 사추홍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흑룡학관의 학생이 내게 맞서?
감히 내 앞을 가로막아?
현재의 상황에다 있어선 안 될 행동까지 목도한 사추홍의 눈빛은 단숨에 살기로 물들었다.
감히, 감히……!
“천위가 아직 싸우고 싶어 하니 저는 당연히 그 싸움을 지켜보고 싶습니다.”
“꺼져라. 내, 너를 특별히 여겨 여태껏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더니 오만함이 정도를 넘어섰구나.”
“그래도 안 됩니다.”
담담하게 고개를 젓는 백유.
어느새 사추홍의 살기가 끈적하게 그녀를 옥죄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추홍을 바라봤다.
“안 됩니다.”
담담하게.
그러나 확고하게.
감당하지 못할 살기를 받은 육체는 도주를 외치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감당하지 못할 실력의 차이를 인지한 본능이 도주를 외치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왜냐고?
그녀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러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니까.
“이 대결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날카롭기 그지없는 눈동자가 사추홍의 살의를 가른다.
앞뒤를 생각하지 않았기에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받는 인간.
광인(狂人).
그것은 조롱이지만, 그녀의 속을 아는 사람은 그 수식어를 모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앞뒤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이유를 알기에.
“제 의동생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의동생.
그 단어에 사추홍의 눈썹이 꿈틀거리고, 지켜보던 이들의 표정이 변했다.
흑원대를 개박살을 낸 놈이 백유의 의동생이라고?
백유가 나름대로 조용히 지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뛰어난 실력과 기묘한 행동은 이미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엔 충분했다.
많은 이들이 지켜보던 인재.
그렇기에 알 수 있는 그녀의 예측 불가능한 성격.
그 성격을 감안해도 정파의 인물을 의동생이라고 부르다니.
그것도 학관장 앞에서?
이런 상황에서?
‘미쳤군.’
‘제대로 미쳤어.’
모두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상황에서 저리 대들면 쫓겨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백유를 포기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백유를 포기한 이들이 이어지는 사추홍의 행동에 집중하던 그 순간.
“그럼 슬슬 여기까지 할까.”
담담한 목소리.
설천위의 그 목소리에 그를 바라본 이들은 하나같이 경악했다.
설천위가, 차분백을 보고 있지 않았으니까.
자신의 앞에 있는 흑원대주를 두고도 백유와 사추홍 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 말도 안 되는 오만방자한 행동에 어찌 경악하지 않을 수가 있나.
그리고 분노하지 않을 수가 있나.
“이, 이 개자식이이이……!”
직접적으로 모욕을 당한 차분백의 얼굴이 분노로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여태까지 생각 외로 뛰어난 실력에 자신도 모르게 침착하게 대응했던 것이 무색해질 정도로 분노가 본능을 이겨 내기 시작한다.
더 거칠게.
더 강하게.
차분백의 도끼가 설천위의 방어를 두들긴다.
그리고.
깡!
“노오옴!”
설천위의 도를 날려 버린 차분백이 환희의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그 머리통을 날려 주마.
흐트러진 숨을 억지로 가다듬고, 자신을 바라보는 설천위를 보면서 차분백이 도끼를 내려찍는 그 순간.
“안일하다니까.”
나지막한 비웃음과 함께 공간이 갈렸다.
그 순간, 차분백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하나였다.
‘……왼손?’
설마 이 개자식이?
조금 전의 도발에 여태껏 설천위의 왼손을 경계하던 의식이 흐려졌다는 것을 깨달은 차분백은 등줄기를 훑고 지나는 섬뜩함에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참, 전투 하나는 잘하는 놈이구나.”
[참, 전투 하나는 잘하는 놈이구나.]
설천위가 아닌 것 같은 말투와 함께 상대가 검을 집어넣었다.
검을, 집어넣어?
그리고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소적검(消跡劍)]
“끄아아아아아아아악!!”
도끼를 쥐던 양팔 중 오른팔이 땅에 떨어진 것을 깨달은 차분백의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진다.
“아, 더럽게 아프네.”
[그래도 많이 발전해서 복합골절까진 가지 않았구나.]
그게 지금 말이야, 방구야. 이 양반아.
뼈에 금이 가고 근육이 죄다 터져 나가서 [회복]을 풀로 돌려도 두 시간은 걸리겠구먼.
그나마 관절은 조금 상태가 좋네.
부드러워졌나?
차분백의 비명을 들으며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왼팔을 보고 미간을 찡그린 설천위는 이내 고개를 돌려 웃었다.
“왜, 더 하려고?”
비명을 삼키며 왼손으로 도끼를 쥐고 서 있던 차분백은 오금이 저린다는 감각을 오랜만에 느꼈다.
전장에서 보았던, 그 괴물 놈들이 선사하던 절망감이 전신으로 스며든다.
순식간에 눈이 죽어 버린 차분백을 바라보며 천마는 가볍게 혀를 찼다.
[사파 놈들은 이래서 문제인 거다.]
왼팔이 망가지며 전체적으로 틀어지는 신체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재능이 설천위에겐 없다.
그런데 홀로 수련을 거듭해 초절정에 오른 차분백은?
당연히 크게 약해지긴 했지만 균형이 흐트러져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수준까진 가지 않는다.
왼팔이 망가진 설천위에게 달려들면 오히려 승기를 잡을 수도 있는데, 지레 겁을 집어먹고 뒤로 물러난다.
제 목숨을 최우선으로 챙기는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후퇴.
만약, 정파의 무인이었다면 승산을 떠나서 명예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계속 달려들었을 거다.
혈교나 마교라면, 뭐 말할 것도 없고.
사파가 무림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는 이유가 꼭 결속력이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란 소리다.
전의를 잃어버린 차분백의 모습에 설천위는 몸을 돌렸다.
“백유, 끝났어. 밥이나 먹으러 가자. 맛있는 밥이 먹고 싶다.”
절실하게.
“밥?”
진지한 표정으로 밥을 찾는 설천위의 모습에 백유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이 상황에서 나오는 첫마디가 겨우 그거야?
“후후후, 좋지.”
역시 마음에 들어.
재미있다는 듯이 웃은 백유는 분노로 부들거리는 사추홍을 무시한 채 설천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이런 개 같은 놈이…….”
기어코 분노로 단어 선택이 힘들어진 사추홍이 몸을 떠는 모습을 보며 설천위는 웃었다.
“왜요? 좀 더 하시게? 싸움으로 약해진 틈 좀 노려 보시게?”
비웃음.
그 안에 담긴 조롱에 사추홍은 치욕으로 몸을 떨며 이를 악물었으나 그 이상 입을 열진 않았다.
입을 열었다간 무슨 말을 하게 될지 몰라서가 첫째.
이 이상 꼬투리를 잡혀 도발을 당하면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몰라서가 둘째다.
“그럼 저는 이만 갑니다.”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화를 삭이는 사추홍을 보며 피식 웃은 설천위는 그대로 손을 흔들며 그 자리를 떠났다.
설천위가 떠나고, 순식간에 적막만이 남은 봉마곡 입구에서 몇몇 학생들도 떠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믿고 따르는 이에게 이 상황을 알려 주기 위해.
혹은 자신이 본 상황을 고려해 판단을 내리기 위해.
떠날 사람은 떠나가고, 흐름을 주도할 의지가 없는 이들만 남은 봉마곡.
떠나가는 흐름, 정체된 이들만이 남은 봉마곡 입구.
그곳에서 사추홍은 그저 분노로 떨고 있을 뿐이었다.
* * *
“깔깔깔깔!”
“아, 그 이상한 웃음 좀 하지 말라고.”
“아니, 웃긴 걸 어떻게 해요?”
흑룡학관의 외부에 있는 기루.
그곳에서 한 남자와 마주한 여인은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학관장, 그놈의 분노로 부들거리는 얼굴을 당신이 직접 봤어야 했는데.”
“쯧, 그래서 뭐 어쩌자고?”
“뒤집어엎어야죠.”
담담한 대답.
하지만 그 내용은 결코 담담하지 않았다.
“역시 학관장은 자질이 부족해요. 무림학관의 도왕(刀王)과 비교하면 너무 격이 떨어지죠.”
도왕(刀王) 팽후(彭厚).
무림의 거목.
하나같이 괴물이라는 각 맹의 단주들과 맞먹는 진짜 괴물.
그와 비교하면 사추홍은 부족함이 많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그는 사고가 낡았어요.”
옛날 전쟁이 있었던 시절 사천맹의 교관 출신이었던 그는 결집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무조건 대를 중심으로 한 활동만을 고집했다.
물론 전체의 향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지만, 개인의 향상에는 확실하게 방해가 된다.
그런데 현 무림을 주도하는 건 다수의 강함이 아니라 절대적인 강자의 존재다.
그런 강자가 되고 싶은 학생들이 분명 있는데, 개인의 수련에만 집중하고 싶어도 단체 활동을 강요하니 불만이 안 쌓일 수가 있나.
여태까지 진짜 강자라 불리는 이들이 침묵하고 있던 이유다.
괜히 움직였다가 사사건건 학관장의 제재가 들어오면 불만이 터져 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 불만을 터트릴 불씨를 얻었다.
문제없이, 확실하고 제대로.
“때가 됐습니다.”
사파의 강자존은 이곳에도 존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