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127화-꼬우면, 알지? (1)
기묘한 정적.
상황을 이해한 공간에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차분백, 그가 누구인가?
흑원대의 대주이자 이 흑룡학관에 다니는 이들 대부분이 나중에 윗사람으로 모실 자이다.
즉, 학생인 그들의 입장에서는 감히 올려다보는 것도 힘든 위치에 있는 사람이란 소리다.
사파(邪派)는 그 힘으로 고하(高下)가 결정되는 법.
물론 그 힘이 무조건 무력일 필요는 없기에 무공의 고하만으로 그 상하 관계가 결정되진 않는다.
하지만, 무력대(武力隊)라면.
그리고 그런 무력대의 대주를 맡고 있는 자라면 그 고하는 무력으로 결정된다.
그러니 흑원대주라는 직함은 차분백이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사파인들 속에서 그 위치를 지킬 힘이 있다는 증명과도 같다.
그런 차분백이, 고작 일격에 밀려났다.
“……무슨.”
차마 완성된 말을 내뱉지도 못할 만큼 당황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누구도 그 목소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왜?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
“이…… 개, 같은……!”
분노와 살기가 임계점을 넘어선 듯, 주변에까지 그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한 차분백의 얼굴이 마치 흉신악살처럼 무섭게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도망쳐라.
그런 본능을 절로 일게 하는 끔찍한 기세.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학생들은 주춤주춤 물러섰지만…….
“재미있네.”
백유는 그 누구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웃었고.
“음…….”
서현덕은 묘한 고뇌가 담긴 눈으로 상황을 지켜봤으며.
“후후후후.”
화려한 경장을 입은 여인은 웃으며 상황을 살폈다.
“괴물 놈……. 성장했다는 건가?”
그리고 모든 과정을 순식간에 읽어 낸 사추홍은 자신의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간을 찡그렸다.
이건 위험하다.
‘위험해.’
몇 번이나 보여 줬던 설천위의 기세.
보통 놈이 아니다.
만에 하나.
흑원대주가 놈에게 지기라도 하는 날엔…….
끔찍한 상상이 이어지자, 사추홍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현실에 손을 뻗었다.
“잠깐 기다리……!”
사추홍의 손이 차분백의 옷깃을 붙잡으려는 순간.
“노오오오옴!!”
강렬하기 그지없는 노성과 함께 차분백의 몸이 쏘아져 나갔다.
분노.
그리고 살의.
이 두 가지 감정만이 느껴지는 그 흉흉한 기세에 사추홍마저도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말리면 되레 자신이 피를 볼 수밖에 없으니까.
부디 바라건대, 최악의 상황만은 면했으면…….
“아씨.”
짜증.
공포나 긴장감 따위가 아니다.
최악의 상황은 면하길 바라는 사추홍의 기대를 정면에서 부숴 버리는 반응.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설천위는.
‘……흑원대주를 위협이라 여기지 않고 있다.’
완숙한 초절정에 이른 흑원대주를 그리 위험하지 않은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오만이라 불러 마땅한 태도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불안하다.
그럴 놈이 아니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으니까.
“읏차.”
그리고 그런 사추홍의 직감대로 설천위는 담담하게 도를 휘둘렀다.
쾅!!
강렬한 폭음과 함께 터져 나오는 충격파.
몇몇 학생들이 휘청일 정도로 강렬한 충격파에 이번엔 대부분의 학생들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말이 충격파지, 이만한 바람과 충격을 만들어 내는 건 보통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전력으로 대검을 휘두른 것도 아니고, 서로의 무기가 부딪쳤을 뿐이니까.
그런데 이 정도 수준이란 건…….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일순 피어올랐던 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한 곳으로 향했다.
도와 도끼가 마주친 상태.
“……네놈.”
어느새 분노와 살의 속에서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은 차분백은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감탄했다.
단단하다.
단순히 힘이 강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거듭된 단련으로 단단해진 몸.
셀 수 없는 수련으로 체득된 안정된 자세.
긴 시간을 들여서 쌓아 올린 든든한 내공.
이 세 가지가 어우러져야 이런 느낌이 온다.
무기가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결코 쉽게 밀어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직감.
이런 녀석과 싸우는 것은 언제나 득보다 실이 많았다.
순간 앞으로 다가올 손해를 직감한 차분백은 금세 이성이 돌아왔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도끼를 물릴 수가 없었다.
여기서 도끼를 물리면 사회적으로 그가 입을 손해가 너무 막심하다.
‘짓밟는다.’
싸움에서 손해를 봐도 사회에선 손해를 보면 안 된다.
그건 곧 돈과 명예의 손상으로 이어지니까.
조금 무리하더라도 이번에 확실하게 꺾자.
그리 생각한 차분백이 한껏 내공을 끌어올리며 도끼를 뒤로 당기는 그 순간.
“참 안일해.”
“뭐라?”
싱겁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는 설천위.
그 모습에 눈을 치켜뜨면서도 차분백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자고로 무인의 입과 몸은 다르게 움직여야 하는 법.
입과 눈으론 왼쪽을 말하고 보아도 몸은 오른쪽을 향해야 하는 것이 기본…….
허초의 기본과 함께 공격을 펼치려던 그 순간.
“안일하다니까.”
작은 타박과 함께 설천위의 검이 움직였다.
‘……검?’
분명 도를 들고 있었을 텐데?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차분백은 깨달았다.
조금 전, 자신의 도끼와 부딪힌 도를 쥐고 있던 것이…….
“한 손이었다고?”
한 손뿐이었음을.
“힘에 자신 있다고 너무 먼 곳만 바라보는 거 아니야?”
어느새 차분백의 어깨에 거의 도달한 검을 망설임 없이 찔러 넣는 설천위.
인간의 피와 살을 가르는 일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것이 여타 정파의 샌님들과는 전혀 달랐다.
이대로 가면 완전히 당한다.
그 사실을 깨달은 차분백은 망설임 없이 몸을 굴렸다.
도끼를 휘두르던 힘을 이용해 아래를 공격하는 척하면서 땅을 구른다.
너무도 깔끔하고 신속한 동작에 무슨 초식처럼 보이긴 했지만 결국…….
“어디서 당나귀가 구르네?”
나려타곤(懶驢打滾).
게으른 당나귀가 세차게 바닥을 구르는 것처럼 땅을 굴러 다급하게 공격을 피하는 것을 조롱하는 무림의 초식명.
그 안에 담긴 조롱의 의미는 생각보다 더 크다.
체면과 격을 중시하는 정파 무림은 말할 것도 없고, 이름값을 중요시하는 사파에서도 나려타곤은 약함의 증거로 여긴다.
약하니까 땅바닥이나 구르는 거다.
그런 의식이 깔려 있는 곳이 바로 사파.
그렇기에…….
까득.
전장에서의 버릇대로 본능적으로 몸을 굴렸던 차분백은 이를 악물었다.
진짜로 서로를 죽고 죽이는 전장에선 아무도 신경 쓰지 않기에 자연스럽게 몸에 익었던 수법이 이렇게…….
분노와 모멸감으로 몸을 떠는 차분백을 보며 설천위는 왼손에 쥔 검을 바라봤다.
옛날에 현태중이 왼손으로도 [소적검(消跡劍)]을 펼쳤던 것이 떠올라 찔러 본 건데…….
‘생각보다 좋네.’
물론 자주 써먹을 수 있는 수법은 아니지만.
딱 빈틈 찌르기용?
쌍수 무기를 쓰기엔 재능이 너무 부족하다.
쌍수 무기는 배우기 더럽게 힘든 무공이라 딱히 배울 생각도 안 들고.
빠르게 검을 집어넣은 설천위는 이를 빠득빠득 갈며 일어서는 차분백을 보며 히죽 웃었다.
“아저씨, 더 하게?”
“네놈……. 예의라곤 터럭만큼도 없는 놈이구나.”
“뭐래, 먼저 무기 들고 시비 건 건 당신인데.”
날붙이를 들고 덤비는 놈에게 돌려줄 건 날붙이밖에 없어, 이 양반아.
그나저나.
“아주 좋네.”
자신도 모르게 감탄 서린 목소리로 중얼거린 설천위는 도를 쥔 오른손을 내려봤다.
손에서 팔로.
시선이 옮겨 가면서 그 상태를 확인한다.
아직도 힘이 넘치는 육체.
이게 무인의 평균.
이게……!
“정상적인 몸뚱이……!”
---------
무골(武骨)(下中)
신체를 다루는 것에 능숙해져 그 효율이 증가한다.
---------
그리 길지도 않은 설명.
등급도 고작해야 下中이다.
심지어 비성장형 스킬이라 一成이나 一星이라는 표시도 없다.
게임에서 봤다면, 코웃음과 함께 기억에서 금세 지워 버렸을 스킬.
진짜…….
[음, 이제 좀 쓸 만해졌나……?]
[에이, 너무 과찬 아닌가? 그래도 뭐 동네 농부 수준의 무재(武才)는 되는 것 같긴 한데…….]
암영의적의 눈치 없는 헛소리는 한 귀로 듣고 흘렸다.
뭐가 됐든, 나는 지금 내 성장을 체감하고 있으니까.
사실, 내공이나 패기로 강화한 육체는 여타 무인들에게 스펙상 그렇게 크게 밀리는 수준은 아니었다.
힘 싸움에 들어가도 속절없이 밀린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자세를 유지하는 감각.
힘을 쥐어짜는 방식 등등.
육체를 다루는 기본적인 능력 자체가 너무 부실했다.
내면세계에서 목숨을 걸고 체득한 실전 경험으로 부족한 능력을 메우기는 했지만, 움직임을 밀리미터 단위로 통제하는 고수들 사이에 들어오니 자신의 한계가 너무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한계라는 벽 하나가 허물어졌다.
독기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육체의 재구성.
환골탈태 같은 거창한 것은 아니었지만, 육체에서 무언가가 확실하게 변했다.
그 무언가가 신경 세포인지, 근육의 질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좋아.”
스탯창에 변화는 없지만 몸으로 그 변화가 너무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혼원패공이 혼들을 흡수하면서 얻는 부가적인 스탯이 스탯창에 표시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겠지.
뭐, 됐다.
“이놈이…….”
이렇게 나오자마자 그 상태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게 해 줄 딜 미터기가 준비되어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일부러 느긋하게, 최대한 여유를 보이며 도발했다.
아직 시험해 볼 게 남았으니까.
이걸 참으면 사파가, 아니 무인이 아니지.
경계하는 듯하다가도 이내 그 화를 참지 못한 차분백이 도끼를 들어 올린다.
“씹어 먹어 주마.”
이젠 분노보다도 더 큰 살의로 번뜩이는 눈동자.
그의 몸에서 줄기줄기 흘러나오는 살기에 몇몇 학생들은 이미 멀찌감치 떨어진 지 오래다.
초절정 무인의 전투.
자칫 잘못하다가 휘말리게 되면 그대로 저승행이니까.
그렇게 얼떨결에 어느 정도 공간을 확보하면서 시작된 전투.
선공은 당연히 차분백이었다.
무림의 선배로서 3수를 양보하는 미덕 따윈 저기 똥개에게 던져 준 지 오래다.
하물며 지금처럼 화가 솟구친 상태라면 더욱.
“죽어라아아!!”
망설임 없이 머리를 향해 내리꽂는 도끼.
그 도끼를 향해 도를 쳐올리는 설천위.
두 쇠가 또다시 맞부딪히며 강렬한 충격이 공간을 휩쓴다.
하지만, 이번엔 한 번이 아니었다.
당연히 막힐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짧게 도끼를 회수한 차분백이 연이어 공격을 이어 나갔다.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퍼부어지는 연격(聯擊).
그 연격을 숨 돌릴 틈도 없이 받아 내는 설천위.
그 아슬아슬한 방어에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무리 무림학관의 기대주라고 해도 상대가 흑원대주이고 저렇게 화가 나서 전력으로 덤비는데 상대가 될 리가…….
까득.
전투의 폭음 속 어디선가 들린 이 가는 소리에 서현덕은 고개를 돌렸다.
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래?
그리고 그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서현덕은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싸움을 지켜보는 사추홍을 발견하곤 식겁해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면 지금 당장에라도 호통을 칠 것 같은 얼굴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저리 화가 났지?’
일단 흑원대주가 이길 것 같은 상황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서현덕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전투에 집중했다.
자신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사추홍이 보고 있을 거…….
“노오오옴!”
그야말로 폭풍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기세로 도끼를 휘두르던 차분백이 고함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서현덕은 자신이 보지 못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저거 완전 미친놈이네.”
설천위는 차분백의 공격을 받으면서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긴 했어도 결코 뒤로 물러난 적이 없는 거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생각보다 더할 만한데?”
히죽 웃는 입꼬리.
물론 상대하던 차분백은 알았다.
저놈도 그리 멀쩡하진 않다는 것을.
무리해 가며 자신의 공격을 받아 내서 꽤나 힘이 빠진 상태다.
그런데도 억지로 버텨 내며 자신을 비웃는다.
감히.
이런 어린놈이 감히……!
“죽여 주마!!”
기어코 선을 넘은 차분백의 도끼가 일렁이는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부기(斧氣). 쓰는 무기에 따라 이름이 바뀌는 외부로 발현되는 기(氣).
그 살상력은 있고 없음의 차이가 확실하게 드러날 정도로 뛰어나다.
학생을 향해 그것을 쓰는 것은 확실히 도를 넘어선 행위다.
그리 판단한 사추홍이 끼어들려던 그 순간.
[크르르르르르르.]
설천위의 도가 묵빛으로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