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125화-오다 주웠다 (3)
전투는 빠르게 난전으로 치달았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설천위가 사용한 [영각(靈覺)]은 유지 시간이 짧기 때문에 설천위는 애초에 단기 결전으로 끌고 가려 했다는 점.
최대한 빠르게 끝내고자 하니 억지로 빈틈을 만들고자 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전투가 난잡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으아아아아~!”
꽃을 안고 달리고 있는 청아 때문이었다.
은신한 채로 용케 꽃을 캐낸 청아.
그 손에는 흙이랑 뒤엉킨 잔뿌리를 가진 꽃이 들려 있었다.
흙을 통째로 들어내 뽑아낸 탓이다.
그렇게 뽑아 든 꽃을 들고 이리저리 도망을 다니는 청아.
그녀가 도망친 빈자리를 때리는 건 거대 지네의 꼬리였다.
설천위의 몸에서 흘러나온 존재감에 뒤늦게 청아의 만행을 깨달은 지네는 그야말로 폭주하고 있었다.
덕분에 설천위는 한층 더 여유로워졌고…….
“흐읍.”
키이이잉.
그 도가 기어코 지네의 관절 사이로 파고들어 상처를 내는 데 성공했다.
“아우, 도망치자니까요!”
그리고 그 모습에 다급하게 외치는 청아.
아니, 지금 까딱하면 죽을 판인데 왜 굳이 싸워요!
“도망치면, 너부터 따라갈, 거라고!”
지네의 공격을 피해 내며 힘겹게 입을 연 설천위.
한 번 공격이 성공하긴 했지만, 아직 한참 멀었다.
멀쩡하게 따라올 테고, 그러면 꽃을 쥔 청아부터 공격할 게 뻔했다.
청아는 직접 전투에선 그 실력이 너무 낮다.
아마 제대로 맞는 순간, 골로 가겠지.
“여기서 죽인다!”
“……알았어요!”
설천위의 말뜻을 이해한 청아는 결국 한숨과 함께 달렸다.
설천위의 근처로.
언뜻 지네가 한 방향만을 공격할 수 있게 해 주는 악수(惡手)로 보이는 그 움직임에 이번엔 지네가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단숨에 쓸어버리겠다는 듯 거세게 요동치는 몸체.
마치 거대한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파도치는 지네의 몸체에 설천위는 도를 든 채 숨을 들이쉬었다.
혼들은 힘들다고 했다.
부족하고, 될까 말까 한 상대.
하지만.
진짜 안 될 상대였으면 말렸겠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제안했겠지.
그러니 믿는다.
“후우…….”
내 도(刀)는 저놈을 벨 수 있다고.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준 스승들을 믿는다.
뱉어 내는 숨과 함께 설천위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리고 그런 설천위를 향해 휘둘러지는 꼬리.
목표는 사실 설천위라기보다는 그의 뒤에 서 있는 청아를 노리는 듯했다.
그 과정에서 설천위도 함께 분쇄해 버리겠다는 듯이 거칠게 공기를 가르는 꼬리.
극한의 집중력으로 설천위는 차분하게 그 꼬리를 지켜봤다.
그냥 꼬리 하나가 휘둘러지는 것이 아니다.
그 뒤를 따르는 수십 개의 체절들.
비틀리고 뒤엉킨 체절들은 수많은 변화를 만들어 낸다.
그야말로 일대를 모조리 쓸어버리는 강격.
그렇기에.
벤다.
한 번.
가장 빠르게 다가온 꼬리의 체절 하나를 깊게 베어 낸다.
동시에 순식간에 빠져나온 도가 다른 체절과 체절 사이를 베어 낸다.
베고 또 벤다.
신속(神速).
패기의 힘과 영각의 힘을 전부 끌어올려 도달한, 진짜 영역.
참수(斬首)란 단순히 목을 한 번에 베어 내는 것만이 아니다.
한 번에 베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그다음으론 빠르게 벨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죽음의 직전에 겪는 마지막 고통을 줄여 주기 위해서.
그 도(刀)는 빨라질 필요가 있었다.
“오우!”
엄청난 속도로 도를 휘두르는 설천위의 모습에 가만히 몸을 움츠리고 있던 청아조차 감탄하며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봤다.
베고 또 벤다.
피하거나 막는 동작이 필요해지기 전에 먼저 벤다.
최선의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 참격의 벽을 뚫지 못한 지네가 과격한 울음소리와 함께 몸을 비틀었다.
그와 함께 기괴하게 교차하는 몸.
하지만 결국 그 줄기는 하나다.
긴 몸을 이용해 여러 번의 공격을 하고 있으나, 그 맥은 결국 하나.
얼마든지 읽어 낼 수 있고.
읽어 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벨 수 있다.
[많이 늘었구나.]
[전투 자체는 참 괜찮게 한단 말이지.]
어느새 청아를 향한 공격조차 사라진 시점이 오자, 혼들은 다 같이 청아의 곁에 붙어 고개를 끄덕이며 싸움을 구경했다.
“아니, 언제부터 도(刀)를 저렇게 잘 썼데요?”
그리고 그들과 함께 멍하니 설천위의 전투를 지켜보던 청아는 가장 먼저 떠오른 의문을 던졌다.
아니, 재능이 없다, 없다 하면서 어떻게 저렇게 잘 싸우지?
기만질인가?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는 청아의 질문에 소백진은 피식 웃었다.
[도를 잘 쓰긴 누가 잘 써? 더럽게 못 쓰고 있구먼.]
“예?”
[잘 썼다면 아예 토막을 내 버렸겠지.]
상당히 깊게 베어 내서 지네의 움직임에 큰 타격을 주고 있긴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설천위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지네의 몸을 절단한 적이 없었다.
물론 점점 그 베어 내는 정도가 깊어지곤 있지만, 그건 도(刀)를 다루는 실력이 늘었다기보다는 지네의 몸이 가진 성질에 익숙해진 덕이다.
[쯧쯧, 참수를 제대로 익혔다면 이 난리를 피울 필요도 없었겠지.]
달려드는 지네의 몸을 전부 베어 내고,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지네의 머리를 갈라 버리면 끝날 일이니까.
[허허허, 그래도 보기 좋은 구경이니 괜찮지 않은가?]
[뭐, 보기 좋은 칼춤인 건 맞지.]
아, 당신들이 보기엔 저건 칼춤이구나.
제대로 된 무(武)가 아니구나.
살짝 설천위가 불쌍해진 청아가 고개를 젓는 순간.
“뒈져어어어!”
어느새, 설천위가 승기를 잡고 있었다.
몸 이곳저곳이 베여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지네의 머리를 공략하기 시작한 설천위.
더듬이를 베고.
독을 내뿜는 주둥이를 베고.
끝내 그 사이를 파고들어 머리를 갈라낸다.
하지만.
설천위는 멈추지 않았다.
지네가 어떤 생물인가.
강인한 생명력의 대표 주자 아닌가.
“뒈져어어어!”
고함과 함께 이젠 별거 아닌 꿈틀거림밖에 남지 않은 지네의 몸을 마구 토막 내기 시작한 설천위.
몸에 흐르던 기의 흐름이 급격하게 약해져 설천위의 도는 이번엔 손쉽게 그 체절 사이를 갈라내고 있었다.
“저기 그만하는 게…….”
아니, 아무리 미물이고 우릴 공격한 놈이지만, 이건 좀…….
먹을 것도 아닌데, 이렇게 훼손하는 건…….
양심에 가책을 느낀 청아가 설천위를 말리려던 그 순간.
“내단!!”
“아!”
확인 사살이 아니었구나.
해체구나.
이 영약에 미친 인간아.
[껄껄껄, 원래 재능 없는 놈들이 먹을 거에 더욱 집착하는 법이지.]
[좋은 거 먹으면 제가 강해지는 줄 알고. 쯧쯧.]
아니, 그러니까.
영약으로 쌓은 힘이 도움이 돼 봤자 얼마나…….
[뭐, 그래도 저놈은 재능이 없으니 저거라도 먹어야 하지 않겠나?]
[맞지, 맞지. 어휴, 내공도 제대로 못 쌓는 놈. 빨리 환골탈태라도 한 번 겪어야 좀 쓸 만해질 텐데.]
아니, 그 정도야?
이거 진짜 평가가 너무 박한 거 아니야?
환골탈태가 뭐냐.
무공이 경지에 올라 육체가 무공에 걸맞게 새롭게 재구성되는 거잖아.
그걸 겪어야 겨우 쓸 만해질 정도라니…….
이젠 이해하는 것조차 힘든 혼들의 대화에 결국 청아는 이해하길 포기했다.
뭐.
“……한입 주려나.”
맛있어 보이는데.
그 주인에 그 권속이다.
* * *
“으아! 찾았다!”
한참을 지네의 사체를 뒤져 결국 검은 결정 같은 것을 찾아낸 설천위는 그제야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미친 지네.
겁나게 기네.
머리를 갈랐는데도 안 나와서 식겁했잖아.
왜 내단이 머리보다 꼬리에 가깝게 있는 거냐.
불만이 머릿속에서 피어올랐지만, 이내 사그라들었다.
“히히히.”
오백 년 묵은 지네의 내단.
이 지네의 몸뚱이만 해도 훌륭한 약재로 비싸게 팔릴 텐데, 내단?
이건 못 참지.
생각지도 못한 수익이다.
무엇보다.
“이 정도면 그건 안 건드려도 되겠는데?”
애초에 백유가 먹어야 할 것들이니 안 건들면 좋지.
“주인님, 여기요.”
“오, 흙은 다 털었네?”
“넵. 일단 혹시 몰라서 물엔 안 헹궜어요.”
역시 똘똘해.
흡족한 미소와 함께 청아의 머리를 다독인 설천위는 그녀가 내민 꽃을 보며 웃었다.
무려 셋.
하나만 얻어도 다행이겠다 싶었는데, 무려 세 송이나 있다.
거기에 거대 지네의 내단까지.
이게 무슨 뜻인가?
“하나는 선물로 줘도 되겠는데?”
과하면 탈이 난다고.
이 정도면 아예 백유한테 하나 주고 호감을 얻는 것도 괜찮을지도?
흠, 그럴 거면 아예 남은 것들도 찾는 게 나으려나?
하나 정도는 잘 보관해서 유예린한테 먹이는 것도…….
“헛!”
“왜요?”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왜 걔를?
아니, 애초에 보관도 힘들 텐데 왜 굳이…….
가볍게 고개를 털어 잡념을 떨쳐 낸 설천위는 내단과 꽃을 보며 웃었다.
일단…….
“먹어 볼까?”
“예? 독이 있는지 어떻게 알고요?”
“에이, 없어.”
그때 백유는 상처 입은 몸으로 잘만 먹었는데, 뭐.
음기에 침식까지 당한 몸으로도 먹고 살아남았는데, 내가 아무리 재능이 없어도 멀쩡한 몸으로 소화를 못 시키겠어?
당당하게 한 송이 집어서 입에 넣으려는 설천위.
그 모습에 천마가 혀를 찼다.
[여전히 이상한 데서 참 멍청한 놈이구나.]
“예?”
[그 약초가 독이 없어지는 시기는 열매를 맺은 이후이지, 꽃으로 피어 있을 때는 독이 있느니라.]
……어?
그러고 보니 게임에서 백유가 먹을 땐 꽃이 아니라 열매였던 것 같기도 하고?
[지금 네 몸으로 먹었다간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느니라.]
“……그 정도예요?”
[암. 약초의 독성을 무시하지 말거라.]
아니, 무시할 수 없는 독성이 있는 거면 약초가 아니라 독초 아니야?
[다만, 이번에는 천운인지 네 녀석이 딱 알맞은 것을 가지고 있구나.]
“알맞은 거요?”
설천위의 시선이 슬쩍 자신의 손 위로 향했다.
지네의 내단.
[그 풀을 먹고 수백 년을 살아온 놈이니 그 약초의 독에 대한 내성이 아마 있을 테지.]
“꽃을 그냥 놔둔 걸 봐선 열매가 맺히길 기다린 것 아닐까요?”
[그렇다고 해도 수백 년이나 먹으면 내성이 생기는 법이다.]
아하.
설득력이 있구먼.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이내 내단을 들었다.
기묘하게 반질거리는 검은 구슬.
이걸 먹으면 저 약초의 독성을 중화시킬 수 있다는 거지?
그럼 바로…….
[하지만 그 지네의 독성이 문제구나.]
“예?”
[아까 보지 않았느냐? 그 지네도 독을 가지고 있던 것을.]
아니, 그건 봤는데요.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요.
[쯧쯧, 괜히 영단 제조법이 문파의 최고 기밀이겠느냐? 아무거나 주워 먹었다간 골로 가니 그걸 정제하는 기술이 중요한 것이니라.]
“아, 옙.”
맞는 말이긴 하네.
그나저나.
“그래서, 방법이 있으니까 이렇게 말을 질질 끄는 거죠?”
참 있는 척하길 좋아하는 양반이라니까.
[험험, 뭐, 보통이라면 없겠지만 너는 있어 보이는구나.]
설천위의 눈빛에 담긴 속내를 읽어 낸 천마는 멋쩍은 웃음과 함께 대가리가 갈라진 지네의 사체를 가리켰다.
[약초의 독성엔 적응할 수 없지만, 지네의 독성엔 적응할 수 있지 않겠느냐?]
“……예?”
[그 몸과 독주머니까지 있으니 먹으면서 내성을 기르면…….]
“저는 가지고 온 육포를 먹겠습니다!”
먼저 선수를 치는 청아.
한껏 일그러진 표정으로 지네의 사체를 바라보는 설천위.
[한 일주일만 먹으면 되지 않겠느냐?]
빙긋 웃는 천마의 얼굴을 보며 설천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불부터 피워 볼게요.”
[어허, 화식이라니? 저런 건 자고로 생식으로 먹어야 하느니라.]
마지막 퇴로가 막혔다.
엄하게 부정하는 천마와 떨리는 동공으로 그와 지네 사이를 오가는 설천위의 눈동자.
[뭐 하느냐, 어서 먹지 않고?]
……왜 영초를 지키는 영물이 지네였던 거지?
차라리 뱀이 낫겠다…….
떨리는 손으로 지네의 사체를 손에 쥐는 설천위.
그 모습에 결국 고개를 돌리는 청아.
이윽고, 설천위의 식사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