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123화 (123/624)

제123화

122화-흑원대 (4)

광기.

이 말은 무림에서 생각보다 쉽게 쓰이지 않는다.

말싸움을 하다가 사람이 죽고, 자존심을 내세우다가 목이 잘려 죽는 무림.

광기라는 말과 너무나도 가까울 것 같은 세상이지만, 역으로 그렇기에 광기라는 말은 함부로 쓸 수 없는 말이 됐다.

“……미친놈이군.”

창백한 안색.

몸이 멀쩡하지 않다는 증거다.

거기에다 사파의 한가운데 떨어진 정파인이라는 상황.

웬만한 호걸도 몸을 사릴 만한 환경이다.

그런데도 아주 당당하다.

죽음 따윈 고려하지 않는다는 듯, 거친 기세를 뿜어낸다.

거기에다.

‘……한가락 하는 놈인 건 확실하군.’

자신의 살기를 밀어내는 기세까지.

딱 봐도 몸이 약해진 게 보일 정도의 상태임을 고려하면, 멀쩡했을 땐 과연 어땠을지 절로 기대가 될 정도다.

하지만, 그렇기에 꺾어야 한다.

이 미친놈은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진짜 괴물이 될 테니까.

학관장의 요청에 억지로 와서 대충 해결하고 가려던 마음이 바뀐다.

“우리 흑원대의 놈이 독을 썼다고?”

학관 내부.

어느 정도의 억지는 얼마든지 무마될 수 있다.

대충 구색 정도만 갖추면 싸움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군.”

서서히 기세를 끌어올린다.

학관장보다 실력이 뒤처지긴 해도 자신은 진심을 다해 싸울 수 있다.

진짜 전투엔 무공보다 싸움 실력이 더 중요한 법.

비무 신청?

그딴 거 없다.

“네놈의 말이 사실이란 것을 몸으로 증명해 봐라.”

흑원대 소속의 조장, 건평은 망설임 없이 땅을 박찼다.

그와 거의 동시에 뽑힌 도(刀).

설천위나 소윤혜가 쓰는 것과 다른, 폭이 넓고 무게가 있는 형태의 도(刀)다.

속도가 아닌 힘과 무게를 중시하는 무기.

상대가 막지 못하게 벤다.

상대가 피하지 못하게 벤다.

이런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막아도 벤다.

상대가 피해도 벤다.

이것을 추구하는 강도(强刀).

거기에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목을 향해 날아오는 살수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사파의 도(刀)지.

물론, 그렇다고 당해 줄 마음은 없지만.

“흡!”

깡!

단숨에 주먹을 쳐올려 도를 위로 튕겨 낸 설천위는 그대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도를 휘두르는 상대방에게 주먹이 닿기 위해선 한 걸음의 거리로 좁힐 필요가 있으니까.

부드럽게 앞으로 나가는 몸.

[섬뢰풍영보(閃雷風影步)]의 이치가 담긴 움직임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림자라 부르기엔 아직 턱도 없지만 말이다.]

혀를 끌끌 차는 암영의적의 말을 무시하고 설천위는 단숨에 가까워진 상대를 바라봤다.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상대.

뭐 그렇겠지. 딱 봐도 안색이 창백한 상대가 이렇게 파고들면 놀랄 만하다.

물론 그 사정을 헤아려 줄 마음은 없지만.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왼팔을 내지르는 설천위.

화려한 초식도, 기이한 움직임도 없는 그저 단순한 정권 지르기.

‘이놈?!’

허나, 그 정권 지르기에 건평은 두 눈을 부릅떴다.

분명 검과 도를 주력으로 하는 무인이라고 들었는데?

두 가지 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조차 언어도단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 권법이라니?’

반사적으로 팔을 몸 앞으로 당겨 공격을 막아 낸 건평은 얼얼하게 올라오는 통증에 미간을 찡그렸다.

실전에서 다져진 감각이 아니었다면, 내공으로 팔을 보호하긴커녕 막는 것조차 버거웠을 공격.

내공 없이 막았다면 팔이 부러졌을 테고, 몸에 맞았다면 그대로 싸움이 끝났을 것이다.

그 정도로 날카로운 권격이었다.

어린놈이 도와 검을 주력으로 삼으면서 권법도 이 정도 실력이라고?

죽여야겠다는 의지를 한층 더 강하게 다진 건평은 그대로 도를 휘둘렀다.

한번 공격에 실패하면 방어로 돌아가는 것이 기본 원칙.

이유는 간단하다.

내지른 팔이나 무기를 다시 회수해야 하니까.

아무리 빠르고 변화무쌍한 공격이라고 해도 그 이치는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설천위가 팔을 몸 쪽으로 당기는 것을 확인한 건평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이제 자신이 공격할 차례다.

단숨에 목을 베겠다는 욕심은 버리자.

일단 확실히 팔 하나를 베고 시작하자.

건평의 도가 공기를 우악스럽게 가르며 설천위의 팔을 향해 떨어진다.

위에서 아래로.

무게까지 이용해 단숨에 잘라 버리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

그런데…….

‘……왜?’

안 막지?

아무런 반응이 없는 설천위의 움직임에 오히려 건평이 의아해하던 바로 그 순간.

[상식이란 건 의외로 쉽게 깨지는 법이지.]

건평은 듣지 못하는 한 노인의 나지막한 웃음과 함께 설천위의 주먹이 건평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동귀어진.

팔을 내주고 이쪽을 치겠다는 의지의 표현.

그 행동이 말하는 것은 하나다.

‘쫄리냐? 쫄리면 뒈지시든가.’

조롱함과 동시에 실전에서도 잘 쓰지 않는 미친 도박.

상대가 겁먹지 않으면, 자신이 오히려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는 목숨을 건 도박이다.

‘이놈……!’

순간 상황 파악이 끝난 건평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고민했다.

막아? 아니면 공격?

까득.

“노오오옴!!”

나를, 흑원대를 우습게 보는 것이냐!!

오냐! 받아 주마!

방어를 버린 건평은 그대로 도를 내리찍었다.

그 끝에 도달했을 때 둘 다 큰 중상을 입을 수밖에 없는 구도.

그 상황을 인지한 학생 몇몇이 놀라서 창백한 안색으로 바라볼 정도로 무식한 싸움에 누군가가 웃음을 터트렸다.

“꺄하하하!”

재미있네!

그리고 그녀의 웃음이 그들의 귀에 닿기도 전에 무식한 자존심 대결의 결과가 정해졌다.

“끄륵.”

치밀어 오르는 피를 꾸역꾸역 삼키는 건평.

하지만 그럼에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를 전부 삼킬 순 없었다.

심각한 내상.

물론, 괜찮다.

이쪽은 상대의 팔을 벴으니까.

그래.

벴어야 했다.

분명 저놈의 팔이 땅에 떨어져야 했는데…….

[크르르르르르.]

어디선가 들리는 짐승의 울음소리와 함께 설천위의 어깨 위에서 멈춘 자신의 도를 보며 건평은 놀라서 두 눈을 부릅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패룡지기(覇龍之氣)]

패융이 직접 몸을 움직여 막아 낸 도를 한 손으로 슬쩍 밀어내며 설천위는 자세를 바로 했다.

이쪽의 주먹은 건평의 가슴을 강타해 내장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폐에 직접적인 손상이 갔고, 심장도 마구 요동치고 있을 거다.

[침투경만 배웠어도 바로 숨을 끊어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천마의 평에 설천위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못 배운 건 어쩔 수 없지.

그냥 권력을 내뿜는 발경도 아직 미숙하니까.

침투경 같은 섬세함의 극치를 달리는 기술을 배우려면 한세월은 걸릴 거다.

그나저나.

“너 진짜로 좋네.”

……이 미친눈나가 여긴 왜 있는 걸까?

지금 시기면 한창 부하들을 찾고 다닐 때 아닌가?

“쿨럭.”

결국, 참지 못하고 피를 토해 내는 건평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설천위에게 다가온 백유는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너, 정말로 정파 사람이야?”

“……그렇다만?”

“그런데 왜 그런 방법을 써?”

“손속이 잔인하다고 말하는 거라면…….”

“아니. 그거 말고, 그거.”

웃으며 고개를 젓고 얼굴을 가리키는 백유.

그 손끝은 창백한 설천위의 얼굴을 가리키고 있었다.

[창안술(蒼顔術)이잖아?]

웃으며 전음을 보내는 백유.

그녀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단숨에 한 상대를 노려봤다.

[뭐, 왜?]

모를 거라며, 이 양반아.

사라진 사파의 비전 중 하나라며.

옛날 사파의 거두가 남겨 둔 것을 훔쳐서 익힌 거라며.

익히기도 쉽고 누구도 쉽게 눈치챌 수 없으니 최고라며.

설천위가 그대로 얼굴을 구기자 백유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맞나 보네?”

“응?”

“그냥 찍은 거거든.”

[쯧쯧, 보기 좋게 낚였구나.]

[뭐야, 창안술이라고 그런 거야? 이 자식이 날 못 믿은 거냐? 그냥 발뺌을 했어야지! 못 알아본다니까!]

혀를 차는 천마와 상황 파악이 끝나 화를 내는 암영의적.

급격하게 시끄러워지기 시작한 암영의적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설천위는 백유를 바라봤다.

“그래서, 무슨 용무냐?”

얘는 성무경처럼 마냥 친하게 지내기엔 부담이 많이 가는 인물이다.

플레이어블 캐릭터인데, 오죽하면 별명이 미친눈나이겠는가.

몇 개나 되는 메인 스토리를 정하는 선택지 앞에서 이 백유는 진짜 미친 선택지밖에 안 나온다.

일반 상식으로 가능한 선택지는 몇 개 없는 수준?

그런데 미치겠는 건 그런 일반적인 상식선에서만 선택지를 고르면 약해진다.

도저히 주인공이라고 할 수 없는 수준으로.

무림에서 쉽게 쓸 수 없는 광기(狂氣)라는 단어가 그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진짜배기 광녀(狂女).

그런데…….

“일단 우리, 친구부터 시작할까?”

뭔가 미워할 수 없는 묘한 매력과 포용력을 가진 누님 같은 캐릭터.

웃으며 어깨에 팔을 두르는 그녀의 모습에 설천위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이 광기의 상징 같은 인물의 심사를 굳이 거스를 필요는 없으니까.

일단 따르자.

……절대 부드러운 느낌이 좋아서가 아니다.

[……짐승. 돌아가면 마님한테 다 이를 거예요.]

청아의 협박.

하지만 내가 떳떳한데 그런 협박이 통할 것 같으냐?

“살짝 거리를 두지. 약혼자가 있는 몸이라.”

……몸은 솔직하네.

너무 잘 통하는데?

[껄껄껄, 벌써부터 공처가 기질이 보이는구나.]

[아주 꽉 잡혀 사는구먼.]

혼들의 웃음을 필사적으로 외면하며 설천위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백유를 바라봤다.

“너, 생각보다 더 좋은 녀석이구나?”

“응?”

“후후후, 마음에 들어.”

“예?”

뭐가.

뭐가 마음에 들어.

너, 그 대사 지금 나한테 칠 대사가 아닌…….

“너, 나랑 같이할래?”

“싫습니다. 전 정파라서요. 동료로는 안 들어갑니다.”

단박의 거절.

본능적으로 선을 그으려다 보니 존댓말까지 튀어나왔다.

내가 미쳤다고 사파로 와?

절대 사절이다.

“흐응? 뭐야, 어떻게 알았어?”

“뭐가?”

“보통 이렇게 물으면 네 나이 때는 엉큼한 상상부터 하는데 말이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팔짱을 낀 백유는 이번엔 정말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일단 친해지는 것부터 시작할까?”

이 미친 여자가?

“일단 저 사람부터 의원한테…….”

“괜찮아, 괜찮아! 져서 굼벵이처럼 기는 놈은 스스로 기어가는 게 사파의 상식이니까!”

그딴 상식 필요 없다니까.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상식도 아닌 것 같은데.

순간, 백유의 눈동자에 서린 싸늘함을 발견한 설천위는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이 백유가 왜 미친눈나라고 불리는지.

자신의 사람 외엔 냉혹하고 싸늘한 사람.

행동의 기준은 오직 하나.

자신과 자신의 품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 도움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

아군에겐 그야말로 듬직한 누나로.

적군에겐 그야말로 미친 여자로.

“일단 밥부터 먹자.”

“……알았어.”

일단 적이 되면 안 되니까 따라가 준다.

……예상외의 복병이긴 한데 뭐, 생각해 보면 친해져서 나쁠 건 없는 사람이니까.

결국 포기한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이곤 백유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소식은 흑룡학관 내부에 빠르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 * *

“……그년이?”

“예. 왠지 모르겠지만 설천위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애물단지 같은 년이…….”

미간을 찡그린 사추홍은 백유를 떠올렸다.

통제되지 않는 작은 괴물.

그 무공의 수준은 절정의 끝자락.

학생들 중에서는 정말로 강한 편에 속하며, 머지않아 초절정에 오를 거라는 평이 지배적인 녀석.

그런데 대단한 점은 그게 아니었다.

광기에 가까운 기괴한 판단력.

그리고 그 판단을 실행으로 옮기는 놀라운 실천력.

추측되는 무공의 수치를 교관들이 확신하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상황 대처 능력.

성장하면 분명 괴물이 될 종자.

2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에도 들어가지 않고 홀로 지내는 범.

그런 녀석이 설천위란 놈에게 붙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한 사추홍은 이내 또 다른 문제를 떠올리곤 얼굴을 구겼다.

‘……그 괴물 놈.’

흑원대의 조장을 그렇게 쉽게 처리하다니. 게다가 내상까지 입은 상태에서.

너무 손쉽게 처리해서 흑원대의 조장이 약해 보일 정도의 싸움이었다.

쪽팔려서 어디에다가 하소연도 못 할 정도로.

“……예정대로 수업에 참가시키도록. 단, 시험과 수업 진행에 관해선 교관들에게 일임한다고 전해.”

“예.”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안 된다면, 느리고 불확실한 방법으로 여러 번 찌르는 수밖에.

부하를 내보내고 홀로 학관장실에 남은 사추홍의 눈빛이 어둠을 바라보며 더욱 깊어졌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