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121화-흑원대 (3)
“독이라니…….”
“무림학관과 교류한다더니 술자리에 불러 놓고 독을 먹인 건가?”
“쯧쯧, 아무리 사파라지만 인간이 아니구먼, 인간이.”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경멸의 목소리.
흘러가는 분위기를 감지한 사추홍은 최대한 얼굴을 폈다.
당황하면 삼류고.
화를 내면 이류고.
웃으면 일류다.
그리고 초일류는 그 무엇도 하지 않는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일순 정신이 흐트러지긴 했지만, 지나간 일에 연연할 때가 아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담담하게 포권을 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대소웅을 보며 사추홍은 나지막이 말하고 고개를 저었다.
“네놈이 복수에 미쳐 앞뒤 분간을 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 뻔히 보이는구나.”
가장 먼저, 인정해선 안 된다.
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여론이 들썩이긴 하겠지만, 인정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발뺌할 수 있다.
발뺌할 수 있다면 들썩이는 여론 따윈 얼마든지 다잡을 수 있다.
“무림학관의 학생들을 공격했다고 근신 처분을 받은 것에 앙심을 품은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작게 고개를 젓는 사추홍의 눈동자는 빠르게 주변인들을 훑었다.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이들과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이들.
여기서 중요한 건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이다.
저들을 설득하면 자신이 자리를 떠난 뒤에 그들이 알아서 자신들의 추측으로 여론을 조성할 터.
“허나, 조직의 규율을 멋대로 어긴 것은 네 잘못이다. 저번 일은 맹을 위한 일이라 여겨 봐주었지만, 이번에는 엄히 벌하겠다.”
나지막한 경고.
그 눈동자는 객잔 여기저기에 앉아 있는 흑룡학관의 학생들을 빠르게 훑었다.
단순히 대소웅만을 향한 경고가 아니라는 듯이.
순간, 학생들은 소름 끼치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던 그때.
“그런 말씀 말고, 빨리 공자님을 의원에게 데려가게 해 주세요!”
다급한 청아의 외침에 사추홍은 그녀와 그녀의 품에 안긴 설천위를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서.
‘무슨 수작질이냐.’
의심스럽다.
학관에 온 첫날부터 자신에게 시비를 건 놈이다.
머릿속 어딘가가 한 군데 망가졌다고 해도 그렇게 시비를 거는 데는 적어도 한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사파를 불신하고 싫어할 것.
이리 오만한 놈이 친근하게 접근하는 녀석들의 꾐에 속아 술을 마시다가 독을 먹었다고 보기엔 너무도 의심스럽다.
사파에서 굴러온 세월이 수십 년.
사소한 흠은 언제나 작은 마음속 가시가 되어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지금 당장에라도 뽑아 버리고 싶지만…….
“의약당으로 옮기도록.”
“예!”
지금은 그 가시를 뽑을 수 없다.
조금 따끔거리고 신경에 거슬려도 해야 할 일을 마친 후 뒷정리할 때 뽑아야 한다.
일단, 지금은 참자.
그렇게 생각한 사추홍의 지시에 몇몇 학생들이 설천위에게 다가가는 순간.
“비…… 켜라.”
힘겨운 목소리와 함께 설천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파리해진 안색에 독기가 가득 서린 눈빛.
억울함을 얼굴 전체로 표현하는 듯한 그 모습에 지켜보던 이들이 탄식했다.
정파의 협객이 찾아와 저리 뒤통수를 맞았으니 얼마나 억울할까.
그들이 설천위의 상황에 감정 이입하는 사이, 설천위는 자신을 향해 오던 이들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내 발로 간다.”
조금 떨리는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설천위는 자신에게 다가오던 이들을 쓱 훑어보고는 힘겹게 걸음을 떼었다.
그 옆에서 청아가 그를 부축해 줬지만 연약하기 그지없는 청아의 도움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 같은 위태로운 발걸음.
그 위태로움 속에서 설천위는 독기를 품은 눈동자로 사추홍을 노려봤다.
“네 명을 들은 이들의 손길은 받지 않는다.”
다가오던 학생들이 절로 뒷걸음질을 칠 정도로 흉포한 기세.
그 위압감에 놀란 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뜬 사이, 위태로운 걸음을 옮기며 설천위는 흑룡학관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대단하군.”
“소름이 끼칠 정도의 기세야.”
“누구라고 했지? 남궁세가의 기재가 뛰어나다고 듣긴 했지만 남궁세가의 인물 같아 보이진 않는데.”
“쯧쯧, 그렇게 소식이 느려서야. 호남설가의 설천위 아닌가? 그 애물단지라고 하던.”
“아, 그 낙제생? 하지만…….”
“최근 일 년 사이에 마치 사람이 변한 것처럼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더군. 잠룡이었던 게지.”
설천위가 나가자마자 시끄러워지는 객잔의 분위기에 사추홍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 새끼들이 지금 내가 아직도 여기에 버젓이 있는데, 저리 입을 놀려?
순간 치밀어 오른 화에 목 끝까지 고함이 차올랐지만, 간신히 삼켜 내는 데 성공했다.
지금 이들을 다그치는 건 하책이니까.
“……이곳에 있는 전원, 나를 따라오도록.”
일단 정확한 상황 파악과 뒷수습 처리가 먼저다.
객잔을 나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설천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추홍은 이를 악물었다.
멍청한 놈이 독을 쓰다니.
그것도 이렇게 대놓고.
자신을 물 먹이려는 의도가 아니라고 하면 그게 더 말이 안 될 정도로 멍청한 행동이다.
그가 품은 분노의 화살이 멍청하게 서 있는 대소웅에게로 향하려던 그 순간.
‘음?’
방금 좀 멀쩡하게 걸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다시 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잠시 설천위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사추홍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별것도 아닌 착각에 정신 팔릴 틈이 없다.
“……네놈들은 엄한 벌을 받게 될 것이야.”
* * *
“사기꾼.”
“뭐가.”
“연기를 정말 잘하시던데요.”
“연기 아니었는데?”
진짜 독에 당한 거였잖아.
자식들, 나름 사파라고 독도 가지고 있고.
잘 썼다.
원래 그냥 적당히 아픈 척하려고 했는데 진짜 리얼한 연기가 가능해서 사추홍도 깔끔하게 속였잖아.
사추홍 정도 되는 무인을 속이는 연기는 불가능했을 텐데, 덕분에 일이 잘 풀렸다.
“벌써 해독은 끝난 거예요?”
“어. 멀쩡해.”
의원조차 믿을 수 없다고 말하며 방으로 돌아온 설천위는 깔끔하게 회복된 몸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대충 내공으로 처리했고, 그 과정에서 내상을 입었다고 말하면 되겠지.
“진짜 왜 이러시는 거예요?”
“다 생각이 있어.”
이 정도 구색은 갖춰 놨으니 한두 가지 정도는 무난하게 챙겨서 갈 수 있겠네.
최대한 많이 챙기고 싶지만, 그것도 욕심이니까.
너무 뺏어도 그 녀석이 성장하지 못할 테고.
그나저나.
“그래서, 뭐 하고 있어요?”
[별거 아니다. 그 흑원대란 놈들을 아주 작살을 내고 있더구나.]
“쯧쯧, 불쌍한 아이들인데.”
괴의 능력으로 강제로 정신을 비틀었으니 최소 일 년 정도는 거의 백치로 살아야 할 거다.
그 뒤에도 정상적인 사고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괴의 주장으론 대충 그쯤이면 회복할 것 같다고 했으니까 맞겠지.
“……진짜 쟤 말은 어떻게 알아듣는 거예요?”
“그냥 감으로 때려 맞추는 거지.”
“말도 안 돼.”
뭐가 말이 안 돼, 눈동자로 열심히 말하는구먼.
알아듣기 좀 힘들 뿐이지 아예 못 알아들을 정돈 아니지.
뭐, 그냥 연결되어 있어서 알 수 있는 걸 수도 있고.
청랑의 감정도 대충 알 것 같으니까.
[왕!]
“어이구, 또 나왔어?”
최근 혼의 형태로 설천위의 안에 가만히 기다리던 시간이 많았기에 갑자기 튀어나온 청랑을 설천위는 반갑게 맞아 줬다.
얼굴에 달라붙어 핥아 대긴 하지만 영체인 만큼 끈적거리는 것도 없으니 볼 정도는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다.
실제 개였다면 씻으러 가기 힘든 지금 같은 상황에선 못 하게 했겠지.
혓바닥을 내민 채 헉헉거리는 청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설천위는 청아를 바라봤다.
“그래서, 괴가 안 건드린 애들 상태는?”
“제 매료는 이제 안 통하겠지만…… 얼추 회복은 시켜 놨어요.”
“그 정도면 됐어.”
너무 빨아 먹었더만.
조사하면 단박에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살짝 청아를 째려본 설천위는 다시 청랑의 귀여움에 집중했다.
얘는 어떻게 보면 볼수록 귀엽냐.
어떻게 해서든 권속으로 받아들인 전대 백화단주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이제 뭘 할 거냐?]
“예? 뭐가요?”
[그 학관장 놈을 그렇게까지 도발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
별로 통하지도 않는 독을 억지로 내공을 억눌러 가면서까지 몸으로 받아 낸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답답하다는 듯 묻는 암영의적의 질문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딱히 없는데요?”
[……뭐?]
“아니, 사추홍 그 인간이 직접 거기까지 올 줄은 몰랐어요.”
왜 왔데? 그렇게 할 짓이 없나.
학관장이란 놈이 빈둥거리기나 하고 말이야.
개탄스럽구먼.
혀를 쯧쯧 찬 설천위는 청랑을 들어 올리며 암영의적을 바라봤다.
“제가 머리가 좋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천재는 아니라서요. 모든 상황을 예측하진 못해요.”
[그럼?]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거죠.”
[그래서 독을 먹고 그 판을 벌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옙.”
뭐, 사추홍은 너무 큰 물고기라 잘못하면 배가 뒤집힐 수도 있겠지만 배야 뒤집히면 다시 뒤집으면 되는 거고.
“뭐, 미끼를 잔뜩 뿌려 놨으니 뭐라도 걸리지 않겠어요?”
배에 싣지도 못할 정도로 큰 물고기만 아니면 된다.
* * *
“……그래서 학관장이 대노했다고?”
“예.”
“미친놈이군.”
설령 실제로 독에 당했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선 학관장의 체면을 봐서라도 그의 말에 따르는 게 맞다.
정사의 관계를 떠나 무림의 선배에게 감히 할 수 없는 무례를 범했다.
하지만.
“흑원대 그놈들이 독을 쓸 놈들은 아닌데?”
물론 사파이니만큼 독 정도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자신들의 무력에 과한 자신감을 드러내던 놈들이다.
어떻게 해서든 힘으로 짓밟으려고 했을 텐데?
의아함으로 인해 여인의 고민이 더욱 깊어지려던 순간.
“맹의 흑원대가 움직였다고 합니다.”
잠시 생각하던 여인이 반쯤 기대고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화려한 실내에 걸맞은 묘한 분위기로 누워 있던 여인이 표정을 바꿔 몸을 벌떡 일으킬 정도의 이야기.
흑원대가 움직였다.
“맹에서 직접 온다고?”
“자신들의 대원이 그럴 리가 없다며 직접 온다고 합니다.”
“학관장이군.”
그냥 잘라 내고 말 놈들인데, 흑원대가 움직였다는 건 하나다.
“진짜로 짓밟으려나 본데?”
일이 상당히 재미있게 흘러가고 있다.
* * *
“들었나?”
“뭐 말인가?”
“맹의 흑원대가 왔다더군.”
“그 괴물들이?”
“아, 그렇고말고! 이번에 온 정파의 그 설천위인가 뭔가 하는 놈을 짓밟기 위해 직접 왔다더군!”
사추홍이 의도적으로 흘린 흑원대의 방문 소식에 흑룡학관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둘 이상 모이면 온통 그 화제로 떠들썩해진 상황.
“흐음…….”
나뭇가지 위에 누워 그 소식을 들은 여인은 입에 물고 있던 당과를 와작 씹었다.
“재미있네?”
한번 구경이나 하러 가 볼까?
어떤 놈이 그런 짓을 했는지 진짜 궁금하네.
슬쩍 몸을 일으킨 여인은 가볍게 나무를 박차 달렸다.
그 기척은 희미했지만 속도는 뛰어난 경신술.
사람들이 모인 곳을 찾아 달리던 여인은 이내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을 발견하곤 또 다른 나무 위로 올라갔다.
“네놈이 설천윈가 하는 놈이냐?”
거한.
그 말이 딱 어울리는 사내는 끈적한 살기를 온몸에 휘감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파의 마두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모습.
거기에다 상당한 수준의 기세를 느끼고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절정의 끝자락.
아마도 조장급일 거다.
흑원대는 규모에 비해 질이 높은 부대 중 하나니까.
거기에다 지금 학관에 있는 멍청한 놈과는 다른 진짜 실전에서 살아남은 미친 원숭이.
지금 상대하면 승률이 5할을 넘기기가 힘들 것 같은데…….
여인의 표정이 묘해지는 그 순간.
“어, 맞는데. 왜 부르냐, 원숭아.”
살짝 창백한 안색의 사내가 뿜어내는 기세에 여인은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순간 놀라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을 정도로.
피부가 저릿저릿한 기세.
씨익.
“찾았다.”
여인은 비틀린 미소와 함께 웃었다.
여인의 이름은 백유.
육도(六道)에서 플레이 가능한 유일한 사파의 인물.
유저들이 부르는 별명은…….
‘미친눈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