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119화-흑원대 (1)
흑룡학관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원인은 무림학관에서 왔다는 설천위라는 녀석이 벌인 짓 때문이다.
“상당한 또라이 같던데?”
“소문의 반만 진실이라도 어디 한 군데 삐뚤어진 건 확실하지.”
설천위가 학관장과 대면했을 때, 구석에 얌전히 짱박혀 있던 구덕.
그는 설천위를 숙소로 안내해 준 뒤에 곧바로 술을 마시러 갔다.
도저히 속을 술로 채우지 않으면 버티질 못할 것 같아서.
피부에 스며든 것처럼 사라지지 않는 한기가 술이 들어가니 조금 가시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미친놈이 말이야!”
몸이 풀어지니 입 또한 가벼워졌다.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결코 발설하지 않았을 학관장의 추태.
물론 최소한의 이성이 남아 학관장이 자비를 베풀었다는 느낌으로 각색해 말하긴 했으나 그 자리에서 봤던 것만큼은 확실하게 전했다.
‘무림학관에서 온 놈이 첫날부터 학관장에게 시비를 걸었다.’
학관장이라 함은 이 흑룡학관의 정점이다.
경력과 인맥을 통해 사파의 후기지수들을 관리하는 자리.
심지어 가진바 실력도 부족하지 않은 고수인데, 그런 고수에게 정파의 무인이 교류를 위해 찾아와 첫날부터 시비를 걸다니.
제정신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미친 짓이다.
그렇게 흑룡학관이 무림학관에서 온 또라이의 등장에 온통 들끓고 있을 때.
“으어어어어!”
그 또라이는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젠 꽤나 오래 버티는구나.]
방 안에서 마보를 한 채 이를 악물던 설천위는 천마의 칭찬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 늘면 그게 사람인가요?”
[지금도 충분히 사람이 아닌 수준의 성장 속도다.]
[나쁜 의미로 말이지.]
나쁜 사람들.
그걸 또 팩트로 후벼 파네.
“그런데 왜 훈련장에 안 나가고 여기서 이러고 계세요?”
겨우 호흡을 고르며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힘쓰던 설천위는 청아의 질문에 그녀를 바라봤다.
침대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모습.
참으로 아름다운 자태와 어우러지니 뭐라 말하기 힘든 묘한 분위기가 풍겨 왔다.
“나가면 시비 걸릴 게 뻔하잖아.”
“예?”
그걸 원하던 거 아니었어?
청아의 무슨 소리냐는 표정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뭐 싸움에 미친놈이냐?”
“아니었어요?”
“……이 자식이?”
“헤헤, 농담.”
눈빛이 아닌 것 같은데?
어색한 미소와 함께 넘어가려는 청아를 살짝 노려본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다시 자세에 집중했다.
“씨앗은 뿌려 놨으니 싹이 날 때까진 기다려야지.”
“……학관장한테 시비를 건 게 씨를 뿌린 거예요?”
“어.”
조금 기다려야 하는 씨앗이지만.
슬슬 자세가 흐트러지기 시작한 것을 느낀 설천위는 천천히 다리를 폈다.
올바른 자세에서 해야만 효과가 있는 훈련이니 흐트러진 상태가 되면서까지 억지로 할 필욘 없다.
“너도 나가면 조심해. 시비 많이 걸릴 테니까.”
“흐음…….”
설천위의 경고에 잠시 고민하던 청아는 웃으며 설천위를 바라봤다.
“그러면 저도 맞상대해도 되나요?”
“맞상대?”
맞상대라…….
잠시 청아를 위아래로 살펴본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한 수준에서 해.”
* * *
“흐흥~ 흐흥~.”
흑룡학관의 숙소로 가는 길.
흥겹게 울려 퍼지는 콧노래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원래 같으면 바로 돌아갔을 시선의 상당수가 길게 그곳에 머물렀다.
이유는 당연히…….
“이렇게 아름다운 소저가 무슨 일로 여길 돌아다니고 있나 물어봐도 되겠소?”
저런 조잡한 작업이 바로 이루어질 정도로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다.
귀여우면서도 이목구비의 선이 뚜렷해 미인이라는 느낌이 절로 드는 얼굴.
비단처럼 흐르는 윤기 나는 검은 머리.
품이 넓은 옷을 입고 있어도 태가 사는 몸매.
“저 말인가요?”
“그렇소. 이리도 아름다운 소저를 오늘 처음 봤다는 것이 신기해 이리 성급하게 다가왔소이다.”
느끼한 미소와 함께 접근하는 사내.
그런 사내를 보며 청아는 빙긋 웃었다.
“어머, 칭찬이 너무 과하세요.”
“과하다니! 나는 자고로 거짓을 입에 담지 않는 사람이오!”
호탕하게 외치며 가슴을 두드리는 사내.
그 눈빛에 담긴 욕망을 읽어 낸 청아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이번에 무림학관에서 온 설천위 주인님의 수행원입니다.”
“……설천위?”
순간 딱딱하게 굳는 얼굴.
잠시 고민하듯 청아를 바라보던 사내는 살짝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는 청아.
그리고…….
“그건 좀 거슬리는 이야긴데?”
껄렁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
남녀가 섞인 그 무리는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며 청아에게 다가갔다.
“그 싸가지 없는 녀석한테 이렇게 예쁜 종이 따라다니는 줄은 몰랐는데?”
낄낄거리며 접근하는 사내.
그런 사내가 청아를 향해 다가갔지만, 어느 누구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목덜미에 새겨진 검은 원숭이 문양이 그가 어떤 대에 소속해 있는지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미친 원숭이 놈들이 또 발작하는군.’
‘발정난 놈들.’
어제부턴가 갑자기 근신이 풀려 활동을 시작한 흑원대의 대원들을 보던 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젊은 소저가 희롱당하는 모습을 보는 건 썩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나설 생각은 없…….
“후후후, 예쁘다고 칭찬하시니 고맙네요.”
“응?”
뭔가 반응이 이상한데?
청아에게 다가가 그 얼굴을 만지기 위해 손을 뻗던 흑원대의 대원마저 멈칫하게 만드는 반응.
아니, 그전에…….
‘싸가지 없다는 말은 그냥 넘긴 건가?’
‘보통 수행원이면 가문 사람인데, 화내야 하는 거 아닌가?’
전에 왔던 놈들은 화를 냈던 것 같은데?
대놓고 토해 내진 못해도 나름 화가 나 부들댔던 것 같은데…….
“주인님이 참 사람을 막 굴리시는 분이라니까요?”
“어, 어어.”
“온갖 잡일에 가끔 수련도 도와 달라고 하시고, 진짜…….”
갑자기 하소연을 시작하는 청아.
그 모습에 당황한 대원이 멍청하게 버벅대는 순간.
“멍청한 놈.”
누군가가 그 대원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거의 내팽개쳐지듯 뒤로 물러난 대원.
그를 지나친 사내는 성큼성큼 걸어 청아의 코앞에 섰다.
청아보다 족히 머리 두 개 이상은 커 보이는 위압적인 덩치.
커다란 그늘처럼 청아를 내려다보며 사내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러면 네년을 데려가면 그놈은 알아서 따라온다는 소리군?”
“네?”
“덤으로 좋은 일도 하고.”
“좋은 일이요?”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는 청아.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입술을 핥은 사내는 거칠게 청아의 팔을 잡아챘다.
“잠!”
“크하하하! 따라와라!”
힘을 쓰지 못하는 청아를 그대로 끌고 가는 사내.
그 모습에 미간을 찡그린 사람들은 이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갔다.
그리고.
‘아, 알려 줘야 해!’
맨 처음 청아에게 작업을 걸었던 사내는 입술을 깨물고 몸을 돌렸다.
아무리 이곳이 사파라지만, 최소한의 도리는 있는 법.
이건 아니다.
그렇게 굳은 결심을 한 사내는 설천위가 머물고 있는 곳을 찾기 위해 달렸다.
* * *
“흐음, 그래서 찾아왔다고?”
“지금 이렇게 여유롭게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방 안에서 느긋하게 수련하던 설천위는 갑자기 찾아와 청아가 위험하다고 외치는 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파 주제에 양심은 있네. 서현덕.”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덕목…….”
‘……내가 이름을 알려 줬던가?’
순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오싹함에 입을 다문 서현덕.
그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설천위를 응시했지만, 설천위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육도의 주인공 캐릭터들의 대부분은 정파에 있지만, 사파에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사파에 하나, 정사지간에 둘.
이렇게 있다.
정파엔 다섯이나 있지만.
눈앞의 서현덕은 사파로 플레이할 때 필수로 영입해야 하는 인물 중 하나다.
뭐 특출 난 재능이 있나?
아니다.
없다.
거의 모든 스탯이 하급에서 시작하며 재능도 썩 뛰어난 부분이라고 할 게 없다.
그런데 왜 반드시 영입해야 하는가?
얘는 배신을 안 한다.
정파에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사파에서는 뭐만 하면 밥 먹듯이 일어나는 배신을 얘는 절대로 안 한다.
유저가 마음잡고 악 성향 쪽으로 방향을 틀어도 뒤통수를 치는 배신은 절대 안 한다.
옆에서 계속 직언을 할 뿐이지.
그 직언을 계속 무시하면 자살한다.
신뢰의 아이콘.
그야말로 믿고 쓸 수 있는 부하.
아직 대에 속할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진짜 이럴 줄은 몰랐네.
그나저나.
“그래서, 청아가 위험하니 구하러 가자는 거 아니야.”
“그렇소! 물론 있다가 그놈들이 당신을 부르기 위해 오긴 하겠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은 상태일 거요!”
답답하다는 듯이 외치는 서현덕.
참, 사파에 있기엔 아까운 인물이네.
서현덕의 반응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필요 없어.”
“예?”
“굳이 구하러 갈 필요 없다고.”
아까부터 영력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진짜 양아치 같은 능력이네.’
발동은 내 영력으로 하는데, 왜 빨아들이는 건 자기 입으로 들어가는 거야?
살짝 억울해져 미간을 찡그린 설천위는 이내 잡념을 털어 내곤 서현덕을 바라봤다.
“내 수행원이야. 그런 허접한 놈들한테는 안 당하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하지만…….”
무공의 흔적 같은 건 없었는데?
미간을 찡그린 서현덕이 망설임에 입을 우물거리자, 설천위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해 주니 고맙군. 그런데 진짜로 괜찮아. 그나저나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이야기나 좀 하자고.”
“이야기?”
“학관 내부 사정에 대해 궁금한 게 좀 있어서 말이야.”
“……그건 말할 수 없소.”
오, 역시 신뢰의 아이콘!
학관을 배신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거부하는구나.
하지만 아쉽게도 너에겐 명분이 부족하단다.
“교류를 위해 온 거야. 기본적인 정보 교환 정도는 이루어져야지.”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라면 알려 드리겠소.”
“좋아.”
고개를 끄덕이는 서현덕의 모습에 설천위는 곧바로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설천위가 이 흑룡학관에 온 목적은 한둘이 아니다.
흑룡학관 놈들의 수준도 파악해야 하고, 영약도 훔쳐야 하고, 자라나는 새싹 놈들도 짓밟아야 한다.
할 게 많은데 시간은 한 학기 정도의 시간도 없으니 정보는 최대한 많이 알아낼수록 좋다.
게임으로 봤던 것과 실제로 겪는 것은 디테일의 차이가 크니까.
그렇게 서현덕에게 여러 정보를 듣던 그 순간.
“설가 놈!! 네 수행원은 우리가 붙잡고 있다!”
허접하기 그지없는 대사와 함께 어떤 놈이 설천위의 방문을 박찼다.
액면가로는 서른이 넘어 보이는 사내의 모습에 잠시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놈은?”
“…….”
그러나 그런 설천위의 모습보다 그 앞에 있던 서현덕의 모습에 더 눈을 부릅뜨는 사내.
“내가 부른 거니까 헛생각은 그만하고, 수행원이라면 청아?”
“……뭐 좋다. 일이 끝난 다음에 처리해도 되는 문제니까. 그리고 이름 따윈 모른다.”
지금 즐기고 있는 녀석들은 이제 알게 됐을지도 모르지만.
짬이 낮은 사내는 선배들의 재촉에 설천위를 부르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쫓겨났다.
짜증 나서 연초도 좀 피우고 그러고 오니 늦긴 했지만.
“따라와라!”
하지만 뭐 인질이 있는 이상, 주도권은 이쪽에 있는 법.
거침없이 뒤돌아서서 걸어가는 사내의 모습에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향한 곳은 창고처럼 보이는 건물이었다.
살짝 일진들의 아지트 같은 느낌이네.
짧은 감상과 함께 사내를 따라 창고 안으로 들어가는 설천위.
그리고.
“이, 이게 무슨?”
“어머, 오셨어요?”
당황하는 사내의 등 너머에서 빙긋 미소 짓는 청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웃으며 서 있는 청아.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피골이 상접한 인간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삐쩍 마른 그 모습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안 죽였지?”
“네. 대신 한 반년은 정양해야 할 걸요?”
아주 알차게 빨아먹었구나?
철백이 당했다면 어떤 꼴이 됐을까.
잠시 상상하던 설천위는 이내 몸을 돌렸다.
여기에 있는 조무래기들과는 다른 진짜의 기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짙은 수염과 가슴 털을 가진 거한이 얼굴을 구긴 채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