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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119화 (119/624)

제119화

118화-흑룡학관 (5)

사람이란 참으로 나약한 생물이다.

기세 좋게 세웠던 의지는 고통이라는 벽 앞에 쉽게 꺾인다.

그렇기에 청아는 한심하단 눈빛으로 한껏 거리를 벌린 이들을 바라봤다.

“참으로 나약한 의지네요.”

“음……. 뭐 그렇다고 딱 단정 지을 순 없긴 해.”

청아의 냉소적인 비난에 어색하게 웃은 설천위는 일관되게 허리를 살짝 뒤로 뺀 녀석들을 바라봤다.

가랑이 사이를 움켜잡고 바닥을 구르는 놈들이 둘.

가랑이 사이를 지키기 위해 허리를 뺀 놈들이 넷.

그 수준도 이류의 끝자락에서 겨우 일류에 턱걸이하는 수준뿐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놈들이 시비나 걸려고 찾아온 거겠지.

“네, 네 녀석은 무인의 수치도 모른단 말이냐!”

“뭐가?”

“낭심을 공격하다니! 이 무슨……!”

“뭐라는 거야, 사파에 왔으니까 사파의 법도를 따라 주는 건데.”

낭심 치기, 눈 찌르기, 모래 뿌리기가 사파의 삼대신공 아닌가?

무림 초출의 정파 무인은 이 세 가지에 당하면 제 실력의 3할도 못 낸다.

덕분에 사파에서 아주 애용하는 수법이지.

정파에선 체면 때문에 주의해라 수준의 교육밖에 안 하지만.

원래 이런 건 맞대응 혹은 선수필승이 가장 좋은데, 체면 때문에 가장 좋은 방법을 안 알려 주고 있는 셈이다.

뭐, 혼들이 경고도 안 해 줄 정도면 이런 대응을 할 필요도 없겠지만…….

“……역시 나는 사파 체질인가?”

“손맛이 좋으셨나 보죠?”

“발맛이라고 해라.”

거길 손으로 치면 기부니가 찝찝하잖아.

먼지 정도야 뒤집어쓸 수 있지만, 그건 좀…….

한심한 사람을 보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 청아를 무시한 채 설천위는 한껏 경계 모드에 들어간 이들을 바라봤다.

“뭐 해? 길 안내 안 하고.”

“네놈……!”

“왜? 기어서 안내해 주고 싶어서 그래?”

너무나도 노골적인 그 협박에 항의를 위해 벌어졌던 입이 단숨에 닫혔다.

전에 왔던 정파 놈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

순간 자신이 기세에서 밀렸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가 욱하는 마음에 다시 소리치려는 그 순간.

“끄윽!”

바닥에 엎어져 열심히 자신의 허리를 두드리고 있는 동료들의 신음 소리가 그의 정신을 붙잡았다.

참으로 비참한 모습.

“……따라와라.”

……결코 겁먹어서 그런 건 아니고, 다친 동료를 빨리 챙겨 주기 위해서 물러나는 거다.

암, 그렇고말고.

* * *

“생각보다 더 크네.”

“흥, 규모만 큰 게 아니다.”

길 안내를 시작한 구덕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건지, 아니면 진짜 그냥 객기인 건지 아까부터 땍땍거리는 것이 꽤나 인상적이다.

그나저나.

“아직 표식이 없는 걸 봐선 일 학년인가?”

“……맞다.”

“……진짜로?”

그냥 해 본 말인데, 진짜 1학년이었어?

“노안이네요.”

“알고 있거든?!”

오, 발끈하는 걸 보니 진짜 일 학년인가 본데.

“청아야, 그럴 땐 이십 년 후쯤엔 얼굴과 나이가 일치할 얼굴이시네요, 라고 정중하게 돌려서 말하는 거다.”

“그게 더 나빠, 새끼야!”

구덕은 발끈해서 외친 후 씩씩거렸지만, 가뿐하게 무시한 설천위는 다시 흑룡학관의 내부를 구경했다.

무림학관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규모의 시설들.

확실히 무림 2대 학관이라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 곳이다.

거기에다.

“거, 슬슬 구경 그만하고 나오지?”

뒤처지지 않는 실력까지.

정확하게 한 방향을 보고 말하는 설천위의 모습에 구덕이 인상을 구기는 순간.

“……어떻게 알았지?”

“으헉?! 사영대(蛇影隊)?!”

뱀 그림자?

흑룡학관 애들은 왜 이렇게 동물을 좋아하냐.

그나저나 사영대라…….

‘들어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긴 한데,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난다는 게 문제다.

[상당히 뛰어난 수준의 암살자구나.]

[보법도 상당하고.]

천마나 암영의적이 이렇게 칭찬할 정도라면 훗날 상당히 이름을 날릴 수 있는 인재라는 뜻.

그만한 인재가 소속되어 있는 조직이라면 게임에서 이름이 안 나왔을 리가 없는데…….

“대답.”

살짝 고민에 빠진 설천위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눈 이외의 부분을 전부 천으로 가린 상대가 대답을 재촉했다.

“아, 그냥 알았어.”

“그냥?”

뭐, 혼들이 알려 준 거긴 하지만.

“어, 그냥.”

“…….”

그냥이라는 말에 화가 난 걸까.

잠시 말없이 설천위를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모습을 감췄다.

마치 물감을 물에 푼 것처럼 사라지는 모습이 진짜 상당한 수준의 은신법을 익혔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흠, 하긴 학관 시절엔 흑룡학관 이야기가 안 나오니 그사이에 뭔가 변화가 있었을 수도 있겠네.’

소속 대(隊)는 잘 안 바뀐다 뿐이지 바뀌는 일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편견에 사로잡혀서 일을 그르치지 말자.

깔끔하게 방금 봤던 실력자에 대한 생각을 털어 낸 설천위는 이제야 당황한 감정을 추스르고 정신을 차린 구덕을 바라봤다.

“뭐 해? 안내해.”

“……알았다.”

일단 학관장한테 인사부터 해야지.

* * *

“재미있군.”

흑룡학관의 학관장을 맡고 있는 사추홍은 웃으며 보고를 들었다.

“낭심 차기라.”

사파에서도 잘 쓰지 않는 수법이다.

자존심 강한 어린 학생들을 모아 놓은 흑룡학관에선 더더욱 잘 안 쓰이는 방법이고.

물론 사추홍은 그딴 거 상관없이 이기는 놈이 장땡이란 주의라서 사용을 적극 권하고 있지만…….

“이번에 온 놈은 꽤 쓸 만한 놈인 건가?”

전에 왔던 셋은 너무 매가리가 없었다.

기세 좋게 바른말을 하면서 자존심만 지키려던 애송이들.

실력에 비해 자존심만 비대해진 머저리들.

단순 시비에 걸려 난투 끝에 중상을 입고 입원한 놈들.

뭐, 덕분에 무림학관의 전력을 깎아 냈으니 기분은 좋았지만.

“벌 받고 있는 놈들은?”

“기숙사에서 잘 먹고 잘 쉬고 있습니다.”

“적당히 풀어 줘.”

“예.”

시비 걸기 딱 좋은 소재니까.

피식 웃은 사추홍은 학관장실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곤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막 보고를 들었는데, 이렇게 빨리 학관장실까지 오다니.

행동력이 좋구먼?

부하에게 손짓해 그를 내보낸 사추홍은 기척이 도착하기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들어오게.”

문을 두드리기 전에 먼저 허락을 내리자 잠깐 주춤한 이가 문을 여는 게 느껴졌다.

‘저 녀석은 1학년이군.’

아직 대(隊)에 들어가지 못한 1학년.

경우에 따라선 졸업할 때까지도 아무런 대에 못 들어가는 이들도 있지만, 그건 그리 많은 경우의 수는 아니다.

무엇보다 느껴지는 기세가 1학년의 물렁한 그것이다.

그러니…….

“네가 설천위란 놈이구나.”

“네, 뭐 맞습니다.”

저 뒤에서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이는 놈이 그놈이란 소리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성큼성큼 들어오는 설천위를 보며 사추홍은 웃었다.

“대체 왜 한 놈만 보냈나 했더니…… 이거 기대 이상이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권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집무용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떡하니 엉덩이를 붙인 설천위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꿈틀.

“요즘 정파 놈들은 예의는 안 가르치나 보지?”

“예? 예의요?”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는 설천위.

그 모습에 이마의 혈관이 또다시 꿈틀거린 사추홍은 화를 누르며 그를 바라봤다.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자리에 앉는 꼬라지가…….”

“에이, 사파에서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다고요.”

손을 내저으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웃는 설천위.

그 모습에 사추홍의 눈이 기어코 불을 뿜었다.

“이 어린놈이……!”

솟구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치려는 사추홍.

그의 몸에서 흉흉한 기세가 거칠게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에이, 뭘 또 그렇게 화를 내고 그러신데?”

그런 사추홍의 기세를 담담하게 받아 내는, 아니 밀어내는 설천위.

의외로 학관장이란 자리는 무력이 중요하지 않다.

적당한 수준의 인망과 적당한 수준의 무공 실력만 있으면 충분하다.

중요한 건 교육 실력.

사추홍은 사천맹의 교관으로 일하며 그 경력과 실력을 인정받아 흑룡학관의 학관장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 경지는 초절정의 끝자락.

웬만한 학생 정도야 눈빛만으로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그렇게 눈 크게 뜨고 계시면 안구건조증 생겨요.”

설천위에겐 통할 리 없었다.

아마 싸우면 질 확률이 높지만…….

“왜요? 검이라도 뽑으시게요?”

“이, 이놈이……!”

설천위를 맞이할 때의 여유를 전부 잃어버린 사추홍이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설천위는 웃으며 계속 도발했다.

“학생한테 매를 드는 것도 아니고 검을 들면 꽤나 쪽팔리실 텐데, 감당하실 수 있겠어요?”

흑룡학관의 초절정급 학생들은 사추홍이 가진 영향력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천맹에 들어갔을 때 사추홍과 척을 진 상태면 삶이 고달파지는 수준을 넘어서서 오래 발붙이고 있을 수 없는 수준이니까.

그런데, 그런 협박 따윈 설천위에게 안 통한다.

왜? 설천위는 사천맹에 취직 따위 안 하니까!

“거, 나이도 있으신 것 같은데 좀 화를 누그러트리시는 게 건강에 좋을 것 같은데요?”

어른에 대한 공경?

그딴 게 있을 리가?

무림학관에서 나온 녀석들이 전부 각개격파를 당했다.

그것도 1대 다수의 싸움에서 일방적으로 처맞아 병상 신세를 졌지.

그게 무림학관도 아니고 흑룡학관에서 벌어진 일이다.

학관장이 모를 리 없었고, 그가 묵인하지 않았다면 벌어졌을 리가 없다.

이곳은 완전한 군대 사회니까.

애들끼리 싸움에 끼어들어 뒤에서 집단 린치나 가하라고 종용하는 놈을 설천위는 어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별로 할 말 없으신 것 같은데, 슬슬 돌아가서 쉬어도 될까요? 보다시피 오는데 고생을 좀 해서.”

“이 망둥이 같은 놈이……!”

먼지를 툭툭 털며 말하는 설천위의 모습에 결국 폭발한 사추홍이 의자에서 일어나 검을 뽑으려는 그 순간.

[크르르르르르르.]

“에헤이, 감당 가능하시겠어?”

짐승의 그것으로 변한 설천위의 두 눈이 사추홍의 움직임을 막았다.

학관장실 전체로 퍼져 나가는, 낮은 짐승의 울음소리와 공간 전체를 짓누르는 기묘한 압박감.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느낌에 사추홍은 그제야 자신이 잊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저년은 언제부터?’

설천위를 따라온, 시녀 복장의 여자.

분명 들어올 때 봤던 것 같은데, 아예 의식을 못 하고 있었다.

마치 인간이 아닌 귀신과 같은 존재감.

사파인으로 살아온 한 가지 감각이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자존심?

그게 뭔가.

자고로 최고는 살아남는 것과 돈을 벌고 그걸 쓰는 거다.

“……네놈, 전에 왔던 녀석들이 쓰던 곳을 내어주마. 그곳에서 지내도록.”

“예이, 알겠습니다요.”

자신이 기세를 거두자 마찬가지로 거짓말처럼 말끔하게 사라진 설천위의 기세에 사추홍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괴물 놈이군.’

딱 봤을 땐 그 실력이 뛰어나 보이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실력을 감추는 데 일가견이 있는 듯하다.

무림학관의 그 꼰대가 실력이 되는데 승급을 안 시키진 않았을 테니 아직 병(丙) 등급에 오를 정도는 아니라고 보는 게 맞겠지.

망설임 없이 학관장실을 나서는 설천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추홍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왜 저리 강하게 나오는지 그 의도야 뻔하다.

전에 왔던 놈들이 얕잡아 보였다가 그냥 두들겨 맞고 나갔으니 아예 초반부터 기선 제압을 하겠다는 의도겠지.

그만한 실력도 있어 보이고.

“역시 어린놈이군.”

어려도 너무 어리다.

어른의 무서움은 미소 뒤에 숨긴 비수거늘.

“처백.”

“예.”

“흑원대(黑猿隊) 놈들을 부르도록.”

원래라면 그냥 적당히 만나게 할 생각이었지만…….

네놈이 건드린 벌집이다.

네놈이 감당하도록.

입꼬리를 비튼 사추홍이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처백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일반인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희끄무레한 것이 처백의 뒤를 따라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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