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118화 (118/624)

제118화

117화-흑룡학관 (4)

“……이상하군.”

이상함을 느끼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곳에 진법이 설치되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연가의 무인, 백덕은 묘하게 비슷한 풍경이 나열되는 상황에 얼굴을 구겼다.

진법에 걸리다니.

그렇다면 아까 멀쩡히 뛰어가던 그놈은 대체…….

일순 머릿속이 복잡해진 백덕은 이내 잡생각을 털어 버리고 외쳤다.

“전원 한곳으로 모인다!”

“예!”

진법이란 결국 환상.

감각을 속이고 거짓된 인식을 심어 주는 것.

눈과 감각의 착각에 속지 않고 동료들과 붙어 있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

위에서 지켜보고 있을 이들이 진법을 해체하는 걸 기다리기만 하면 문제는 없…….

“왠지 사람이 적지 않나?”

누군가의 의문과 함께 백덕은 재빨리 부하들의 수를 헤아렸다.

‘……적다.’

한 명이 부족하다.

대체 언제?

진법의 환각에 휘말려 낙오한 건가?

뭐가 됐든 상황이 썩 좋지 않다는 건 확실하다.

당황해서 검이라도 휘둘렀다가 아군끼리 공격하는 일이 생기면 그대로 전력 손실로 이어지니까.

일단, 남은 이들만이라도 잘 추슬러서…….

“이문?”

한 부하의 목소리에 백덕은 반사적으로 부하의 숫자를 헤아렸다.

또 줄었다.

대체 언제?

아니.

“전원 정지! 섣불리 공격하지 마라!”

이 진법에 서로를 보지 못하게 된 거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백덕은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만약 서로 보지 못하게 된 것뿐이라면, 섣부른 공격은 큰 피해로 돌아온다.

일단 여기서는 방어에 집중해서 전력 보전을…….

“으아아악!”

“무슨 일이냐!”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비명에 백덕의 안색이 변했다.

단순히 진법에 걸린 게 아니란 말인가?

이 진법엔 갇힌 사람을 공격하는 기능 따위는 없을 터.

그만한 진법을 만들 시간과 인력의 여유는 없었다.

부하들도 단순한 환각일 뿐이란 걸 전부 알고 있는 상황인데, 이런 비명이라니.

그 순간,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한 백덕은 오히려 부하들과 거리를 벌렸다.

“거리를 벌리고 무기를 들어라! 습격에 대비하라!”

이렇게 된 이상, 각자 생존에 몰입하는 게 전력 보전에 도움이 된다.

조금만 더 있으면 혈교의 놈들이 진법을 해체할 터.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어느새 주변에 부하가 하나도 보이지 않고 홀로 남은 상황이 된 백덕은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흐음, 생각보다 더 싱거운데.”

“무슨?!”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검을 휘두른 백덕.

하지만 검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허공에 막혔다.

동시에 묘하게 코끝을 자극하는 비릿한 냄새.

‘……혈향?’

피 냄새다.

일이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백덕은 재빨리 땅을 박찼다.

어찌 됐든 일단 거리를 벌려서 상황 파악을…….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을 공격한다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인지는 몰랐는데.”

낮아지는 시야.

그리고 다리에서 올라오는 강렬한 통증.

그제야 고개를 내려 다리를 살핀 백덕의 눈에 보인 것을 정강이 아래로 사라진 다리였다.

“끄아아아악!”

현실을 두 눈으로 마주하자마자 참을 수 없게 된 격렬한 통증에 비명을 내지르는 백덕.

그리고 그 순간, 진법이 해체됐다.

“오, 타이밍 죽이는데?”

백덕의 앞에서 도에 묻은 피를 닦으며 웃는 소년, 설천위가 고개를 돌렸다.

“네놈…….”

생문에서 설천위가 하는 모든 행동을 똑똑히 봤던 혈교의 술사, 제문은 마른침을 삼켰다.

주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을 망설임 없이 베어 버리는 냉정한 손속.

과연 별종이어도 설가의 혈통인가.

“어린놈의 손속이 잔인하기 그지없구나.”

“사파 놈들에게 듣고 싶은 소린 아닌데 그거. 그나저나…….”

자신을 경계하는 이들을 가만히 관찰하던 설천위는 슬쩍 미간을 찡그렸다.

“너희 혈교냐?”

“우리는…….”

“아, 됐어. 뭐 혈교가 아니라 천교 뭐 그딴 소리 할 거면 조용히 해라.”

“…….”

침묵.

설천위가 말한 것을 그대로 말하려고 했던 제문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아, 아니 이게 아니지.

“오만하구나!”

호통과 함께 품에서 부적을 꺼내는 제문.

그 모습에 그를 보좌하기 위해 함께 온 이들이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하지만, 그들의 목표가 된 설천위는 구긴 미간을 펴지 못한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매에 자수가 없으니 혈사련이 아닌 건 확실하다.

그리고.

‘이놈들은 연가가 맞는데…….’

처음 죽였던 놈을 다른 혼들이 심문해 알아낸 정보론 이놈들은 연가의 무인이다.

연가라 함은 연수화의 가문.

그 가문이 손을 잡았던 건 혈교가 아니라 혈사련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설천위가 미간을 찡그리고 고민하는 그 순간.

“가랏! 혈쇄부(血鎖符)!”

제문의 외침과 함께 그가 던진 부적이 설천위를 향해 쇄도한다.

부적을 던지는 솜씨가 참으로 일품이지만…….

“이건 무인한테나 쓰는 거잖아.”

영력을 담아 손을 휘둘러 가볍게 분쇄해 버린 설천위는 그 뒤를 따라 달려오던 혈교의 무인들을 바라봤다.

너무나도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부적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무인들.

“묶어 놓고 패는 것만 하니까 이리도 조잡하지.”

그들을 비웃으며 설천위는 도를 휘둘렀다.

참수(斬首)의 묘리가 담긴, 베는 것에 특화된 도격.

앞서 달리던 무인 둘의 목을 단숨에 베어 버린 설천위는 그대로 땅을 박차 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벤다.

일류 수준의 적들이지만, 패룡의 힘을 제대로 끌어올린 지금의 상태로 일류 고수 정도야 손쉽다.

당황하는 이들 사이로 설천위가 지나쳐 가고.

“끄윽?!”

어딘가가 잘려 나가거나 목이 베인 이들은 짧은 단말마와 함께 쓰러졌다.

“이, 이 괴물 놈이……!”

자신의 술법을 가볍게 파훼하고 부하들마저 단숨에 정리하는 무공 실력.

괴물이다.

이놈은 오만한 게 아니라, 그만한 실력이 있었던 거다.

그 사실을 깨달은 제문은 어떻게든 이 장소를 벗어나고자 했다.

벗어나서 이놈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든 교에 전해야…….

“넌 좀 쓸 만해 보이네.”

“컥!”

술사이기에 딱히 별다른 무력을 지니지 못한 제문을 간단하게 제압해 그 목을 틀어쥔 설천위는 주위를 둘러봤다.

별다른 전력도 없어 보이고, 이게 끝인 것 같네.

“……진법이 그렇게 믿을 만한 건가?”

[네 녀석이 아니었다면 아마 며칠을 방황하다가 고사했을 거다.]

[아무런 지식이 없다면 위험하지.]

[괜히 학관에서 진법에 관한 수업을 하는 게 아니다.]

혼들의 대답에 체감은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하니 일단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손에 잡힌 제문을 바라봤다.

“……흠.”

뭐, 산 채로 심문해 봤자 의미 없겠지?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제문의 목을 꺾었다.

동시에 빠져나가는 그의 혼을 강제로 붙잡은 설천위는 생각보다 많이 붙잡은 혼의 숫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생각보다 충분하네.

생각만 했던 건데, 이참에 해 봐야겠어.

피가 흐르지 않은 마른땅을 찾은 설천위는 그대로 거기에 자리를 잡고 운기를 시작했다.

내공을 쌓으려는 건 아니다.

[괴물 같은 놈…….]

설천위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챈 천마가 혀를 찼다.

이놈도 수라의 길을 가는구나.

* * *

“……당했다고?”

“정기 연락이 완전히 끊겼으니 확실한 것 같습니다.”

“쯧.”

연가의 가주실.

부하의 보고에 미간을 찡그린 연주택은 책상을 손으로 두드렸다.

쓸모없는 놈들.

설천위, 그 거슬리는 놈을 정리하고 싶다기에 손을 보탰던 것인데.

이렇게 손해만 볼 줄이야.

“역시 그 광신도 놈들은 믿는 게 아닌가.”

“사교에 빠진 이들이니 믿어서 좋을 게 없지 않겠습니까?”

“쯧, 그놈들이 협력만 했어도 혈교 놈들에게까지 손을 벌리진 않았을 텐데.”

연수화를 놓친 뒤,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며 찾아온 혈사련의 종자들은 연주택이 가문을 점령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무력.

가문 내에 있을 반동분자들을 제압하고 그들을 제거할 수 있는 무력을 제공해 준 덕에 손쉽게 가문을 장악할 수 있었다.

덕분에 실무자들이 빠져 여러모로 업무가 힘들어지긴 했지만, 뭐 상세한 것들은 아랫놈들이 하고 있으니 괜찮다.

자신은 큰 흐름만 정해 주면 되니까.

여하튼, 설천위 놈이 흑룡학관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놈에게 복수하기 위해 준비했지만 예상외로 혈사련 놈들이 발을 빼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혈교와 손을 잡았건만…….

그것조차 실패하다니.

뭐, 애초에 별 쓸모없는 놈들을 내줬으니 그놈들이 죽었다고 한들 큰 손해는 아니지만.

“기분이 나쁘군.”

“흑룡학관에 연락해서 손을 쓰시겠습니까?”

“됐다.”

괜히 꼬투리라도 잡히면 제 배를 채우기 위해 달려들 놈들이 천지인데, 그렇게까지 복수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한번 시도했는데 안 됐으니 일단 참고 넘어가는 수밖에.

오히려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혈사련이다.

“그놈들이나 잘 감시하도록.”

“예.”

이쪽의 치부를 잘 알고 있는 놈들이다.

배신하면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하는 건 필수.

연주택의 지시에 고개를 숙인 부하는 그대로 가주실을 나섰다.

그렇게 가주실을 나온 부하는 곧바로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와 가문 내에서 외진 창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창고 앞.

그곳에 도착한 부하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발로 문을 두 번 두드렸다.

그리고 소매에서 슬쩍 꺼낸 종이 쪼가리를 문틈 사이로 던지자 작은 금 조각이 튀어나왔다.

그 금 조각을 낚아채고 희희낙락하며 멀어지는 부하.

낡은 창고 안, 갈라진 벽 틈새로 들어오는 희미한 태양 빛에 의지한 채 종이의 내용을 읽은 사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

‘연가도 완전히 끝났군.’

가주의 심복이 가주의 지시 내용을 그대로 팔아먹다니.

입꼬리를 올린 사내는 필요한 내용을 정리해 새 종이에 옮겨 담아 작은 나무통에 넣었다.

그나저나.

‘설천위라…….’

기대가 되는군.

너는 또 어떤 정보를 만들어 낼까?

* * *

“후욱, 후욱.”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설천위는 달렸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저기 시비를 걸어 뒀으니 습격이 밥 먹듯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심심하네요.”

[무림은 자고로 조용한 것이 좋은 것이니라.]

“그것도 그렇긴 하죠.”

천마의 허허로운 웃음에 고개를 끄덕인 청아는 여전히 죽어라 달리고 있는 설천위를 바라봤다.

습격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면서도 어찌 저리 기력을 쥐어짜는지.

보통 사람이라면 만약에 대비해 힘을 남겨 두려고 무리한 수련은 피할 텐데.

아니, 그걸 핑계로 수련 자체를 안 할 텐데 말이다.

“그런데 거의 다 온 거 아닌가요?”

“허억 허억, 그렇지? 거의, 도착했지?”

혈교 놈들의 습격 이후 이렇다 할 만한 습격이 없었다.

연가 놈들도 움직였는데, 혈사련 놈들이 가만히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뭐, 그놈들도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이 무림의 음지에 있는 세력들은 의외로 지들끼리도 많이 싸운다.

다른 조직이랑 전쟁이라도 벌이고 있나 보지.

이미 놓친 혈성지록 때문에 괜히 싸움을 벌일 필요는 없으니까.

뭐, 그 진짜 가치를 알면 그렇게 가만 있진 않겠지만.

나름 생각을 정리하며 고통을 참고 달리던 설천위는 이내 묘한 느낌에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뭔가 자신을 노리는 존재가 있는 느낌?

그런 느낌에 어느새 달리는 걸 멈추고 천천히 걷기 시작한 설천위는 고개를 들어 암영의적을 바라봤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혼들이 먼저 알려 줬을 테니까.

그리고.

[이제 꽤나 감각이 늘었구나.]

그런 설천위의 시선에 만족스럽게 웃은 암영의적이 턱짓으로 조금 멀리 떨어진 가도 위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너를 마중 나온 것 같다.]

가도 위.

나는 시비를 걸기 위해 왔소, 라고 몸에 써 놓은 것 같은 놈들이 설천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먹잇감으로 보는 그 눈빛에 피식 웃은 설천위는 성큼성큼 걸어 그들의 앞에 섰다.

“흑룡학관이 대우가 좋네?”

시비를 걸러 이렇게 마중까지 나오고.

“웬 샌님 하나가 온다고 해서 선배로서 친절을 베풀고자 온 것이지. 그런데 이거 샌님이 아니라 웬 거지가 왔군?”

설천위의 비웃음에 마찬가지로 비웃음으로 답한 사내.

그가 다리를 넓게 벌리고 웃었다.

“일단 이 사이로 기어가아아아악……!”

비명으로 시작해 무음의 울부짖음으로 변하는 목소리.

사내의 가랑이에 정확하게 발차기를 갈긴 설천위가 웃으며 그 뒤에 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다음 개소리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