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116화-흑룡학관 (3)
“끄륵.”
“……죽었나?”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설천위의 모습에 청아는 고개를 저었다.
사흘 내내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빼면 오로지 달리기만 했다.
내공 없이.
일반인이고 무인이고 이 정도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강행군인데…….
‘……잘 버티네.’
어떻게 용케 숨이 붙어 있네.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숨을 헐떡이는 설천위.
반면, 설천위가 쉬는 동안 식사 준비며 여러 가지를 도맡아 하는 청아지만 그녀는 멀쩡했다.
실체가 있어서 지치긴 하지만 그건 무식하게 몸만 움직였을 때의 얘기.
영력을 이용해 몸을 강화해 달리니 그리 빠르지 않은 설천위를 따라다니는 게 오히려 여유로울 정도다.
그렇기에 더욱더 신기하다.
힘이란 건 이리도 편하고 달콤한데 이걸 참다니.
그냥 가는 길 편하게 가서 도착해서 수련하는 게 훨씬 좋다.
수련이 끝나면 상쾌하게 씻을 수도 있고.
먹을 것도 이렇게 제한적으로 먹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다른 녀석 중에 이럴 만한 사람은 없……. 아, 철백 걔는 하려나?’
설천위만큼이나 수련에 진심인 그 인간이라면 좋다고 따라 할지도 모르겠네.
물론, 걔는 맨몸으로 달려도 너무 빨라서 따라가는 내가 힘들겠지만.
잠깐 철백과 설천위를 비교한 청아는 다시금 설천위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재능도 없으면서.
뒷말은 삼킨 청아는 이제 어느 정도 호흡이 돌아오기 시작한 설천위를 바라봤다.
무(武)에 대한 재능은 진짜 처참하리만큼 없다.
내가 배워도 저것보단 잘할 거라는 자신감이 절로 생길 정도로.
명사라 불려도 이상할 게 없는 혼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도 저런 성장 속도라니.
노력하는 시간과 심력이 되레 아까울 정도다.
그렇다고 다른 쪽에 재능이 없나?
아니다.
술(術) 쪽은 재능이 있다 못해 흘러넘치는 수준이다.
그 흑관이라는 술법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말에 얼마나 경악했던가.
본격적으로 술법에 관해 배우기 시작하면 진짜 한 시대에 이름을 남길 거목이 될지도 모른다.
심지어 본인도 그쪽으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대체 왜?
대체 왜 무공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끌끌끌, 나도 궁금하긴 했지.]
그런 청아의 질문에 암영의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궁금하긴 하다.
왜 굳이 재능이 있는 분야를 버리고 재능이 없는 분야에서 발악을 하는지.
이만한 노력, 웬만한 의지론 불가능하거늘.
“……뭐.”
겨우 호흡을 가다듬자 혼들의 빤한 시선을 받은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이며 상체를 일으켰다.
오는 내내 흐른 땀과 먼지가 뒤엉켜 상거지 꼴이나 다름없는 몰골.
흐르는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한 설천위는 청아를 바라봤다.
“왜 무공에 집착하느냐고?”
“네. 재능이 없잖아요.”
아까 삼켰던 말을 자신도 모르게 뱉어 버린 청아.
순간 잘못 뱉었나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설천위의 모습에 작게 안도했다.
“재능이 없으니까.”
“네?”
“재능이 없으니까 이렇게 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야.
재능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재능이 있는 분야가 확실하게 있는데 왜 거기에 노력을 안 쏟고 여기에다 쏟느냐 이 말이잖아.
이해하지 못하는 청아가 미간을 찡그리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술법 쪽은 시간이 지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진짜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스탯과 스킬 포인트가 있으면 얼마든지 커버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무공은 아니거든.”
나이가 들어 몸이 굳어지면 무공의 성장은 더뎌진다.
설천위로 살기로 다짐한 이상, 최선을 다해야지.
그런 설천위의 대답에 답답해진 청아가 미간을 찡그렸다.
“아니, 그러니까 왜 굳이 무공을 하느냐고요. 안 해도 되잖아요?”
[음음, 맞는 말이다.]
암영의적까지 동의하는 상황.
그 모습에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누가 안 해도 된대?”
“예?”
“진짜배기들은 둘 중 하나만 할 줄 알면 못 이겨.”
슬쩍 고개를 돌린 설천위는 옆에서 가만히 자신들을 바라보던 천마를 보며 웃었다.
“그렇죠? 천마 할배.”
[…….]
침묵.
그 침묵에 설천위는 오히려 웃었다.
육도에서 이름은 자주 나오지만 실질적인 등장은 거의 없었던 마교(魔敎).
몇 대 천마인진 모르겠지만, 그 조직의 최고 수장이 정파의 학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냄새가 안 날 수가 없다.
물론 짐작만 하는 거지만…….
‘얼추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역천(逆天)에 도전했기에 마교 아니겠어?
천마의 침묵에 더 이상 캐물을 생각이 없었던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이곤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정찰도 안 하고 여기서 뭐 해요?”
[아, 맞다. 낌새가 이상하다.]
아니, 이 양반이? 그런 소식을 가져왔으면 얘기부터 해야지, 왜 거기서 고개나 끄덕이고 있던 거야?
회복으로 얼추 회복된 몸을 일으키며 설천위는 이리저리 몸을 풀었다.
혼자, 그것도 마차나 말도 없이 뛰어가기로 정했을 때 당연히 방해가 들어올 건 예상했다.
뭐, 마차나 말을 타고 갔어도 방해는 들어왔겠지.
사파 영역에 들어가면 노릴 만한 놈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그런데도 이렇게 당당하게 가는 이유는 딱 하나다.
‘슬슬 싸워야 해.’
무림학관에서의 성장? 좋다.
육체는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고, 나름 배울 거 배우면서 잘 크고 있다.
아직 본격적인 임무를 받지 못해 성장이 더디긴 하지만, 이 정도면 나름 만족할 만한 성장이다.
하지만.
‘부족해.’
경험치가 너무 부족하다.
시스템적인 경험치도, 실제적인 경험치도.
너무 부족하다.
심상 세계에서 죽어 가면서 대련하고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죽어 가면서 하는 대련이다.
죽지 않기 위한 싸움 경험이 필요하다.
죽지 않고 살아남는 전투 경험이 필요하다.
높은 정신력 덕에 사람을 죽여도 큰 지장이 없을 정도라 오히려 살인을 멀리했지만…….
‘피할 수 없는 거 차라리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가자.’
어차피 적이 될 놈들이라면 그 숫자라도 줄이는 게 이득이겠지.
덤으로 경험치도 챙기고.
이러다 살인에 너무 무감각해지거나 빠지는 게 아닐까 걱정도 되지만…….
정신력 스탯을 믿고 달려 보는 수밖에.
거기에.
“슬슬 올려야지.”
아직도 中中에 머물러 있는 영력.
이것도 슬슬 올릴 때가 됐다.
상급까지는 한참 멀었겠지만, 그 위 단계는 코앞까지 다가온 느낌이다.
조금만 더 하면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
“그래서 무슨 낌새가 이상한데요?”
[음, 인기척이 희미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네가 가는 진행 방향 쪽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상한 기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미간을 찡그린 설천위가 고민에 빠진 순간, 천마가 입을 열었다.
[혹 진법 같은 것 아니냐?]
[진법? 음, 그것도 일리가 있구먼요.]
천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암영의적.
그 대답에 설천위는 살짝 턱을 쓸었다.
그리고.
“너, 진법 좀 알아?”
“조금 알죠. 근데 인간들이 쓰는 진법은 잘 몰라요.”
“씁, 그렇지?”
사람을 현혹하는 악귀의 진법이라고 해 봤자 본능의 영역에서 만들어진 술법 같은 거다.
본인도 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쓰는데 오죽하랴.
그나마 괴의 영역 속을 돌아다니며 사람을 꾀었던 청아라 기대했던 건데 너무 과한 기대였나 보다.
“그럼 일단 우회해야 하나?”
아무리 자신 있게 나왔다고 해도 적의 함정에 무식하게 들어갈 순 없는 거다.
어떤 함정에도 당하지 않을 자신감이 있다면 모를까, 그럴 실력도 안 되고.
우회를 말하는 설천위의 의견에 암영의적을 비롯한 대부분의 이들이 동의를 표하는 순간.
[도전해 보는 건 어떠냐?]
“도전이요? 목숨 걸고?”
[진법이라면 최소한 네가 죽을 일은 없을 게다.]
“흠.”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걸 어떻게 장담해?
천마의 말이라면 대체로 바로 믿는 편이지만, 이번 일만큼은 쉽게 믿을 수 없어 설천위가 고민하는 순간.
“그건 저도 동의하네요.”
“응? 왜?”
“진법도 엄밀히 말하면 술법의 영역이니까요.”
영력이 없는 이들도 쓸 수 있게 자연지기를 이용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 시작은 당연히 영력을 이용한 술법을 변형시킨 것이고…….
“진짜 고등한 진법이 아니면 강제로라도 뚫고 나올 수 있을 걸요?”
[나도 비슷한 생각이다.]
청아와 천마, 둘 다 이렇게까지 말하니 설천위는 조금 더 깊이 고민했다.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확신할 정도라면…….
“좋아. 한번 부딪혀 보자.”
한 번쯤 들이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 * *
진법.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겪어 볼 일도 없고, 겪는다고 해도 그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은 무림의 불가사의 중 하나.
그 종류는 사물의 배치를 통한 착시를 이용하는 것에서 자연지기 혹은 영력을 이용해 환각을 보여 주는 것까지 실로 다양하다.
사용하는 사람과 방법에 따라 천차만별의 효과를 내는 진법.
그 진법을 깊게 연구한 이들은 무림에 크게 세 세력이 있다.
황실, 제갈세가, 혈교.
황실은 군대의 운용을 위해 병진을 연구하다 보니 진법에도 손을 뻗게 된 경우이고.
제갈세가는 애초에 그쪽으로 가세를 일으켰기에 깊게 연구한 경우다.
마지막으로 혈교는 살아남기 위해 진법을 연구한 이들이다.
애초에 술법에도 일가견이 있는 이들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은신처를 숨기기 위해 진법을 활용하게 되었고, 그쪽으로 크게 발전을 이루었다.
무림 전체로 뿔뿔이 흩어진 지금도 그 명맥이 이어지는 건 물론이고,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그렇기에.
“반드시 잡는다.”
사내는 자신했다.
이 진법에 걸리면 설천위 놈도 어쩔 수 없을 거라고.
까득.
“그 애송이 놈이…….”
교를 우롱하고 교인들의 스승인 혈사자를 죽이기까지 했다.
그 이후로 다른 이들과 함께 다니기에 도저히 건드릴 수가 없었다.
뿔뿔이 흩어진 교의 전력으로 그놈을 죽이기 위해선 다른 일들을 상당히 많이 포기해야만 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사파의 영역으로 이렇게 당당하게 걸어 들어온다고?
그 어린놈이 제 성장에 취해 오만해진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어른으로서 그 오만함의 대가를 치르게 해 줄 수밖에.
목숨으로 말이다.
사내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은 그 순간.
“옵니다.”
부하의 보고에 사내는 기감을 열었다.
과연, 부하의 보고대로 진법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놈이 보인다.
여태까지 들은 대로 수련이랍시고 무식하게 달리고 있는 모습.
내공도 안 쓰고 있는 것 같으니 그 몸은 지치다 못해 만신창이일 터.
‘진법에 걸려 헤매다 아사하게 해 주마.’
입꼬리를 비튼 사내가 비웃음을 가득 머금은 순간, 설천위가 진법 안으로 진입했다.
생문에 있는 자신들은 설천위를 훤히 볼 수 있지만, 설천위는 제자리를 뱅뱅 돌 터.
그렇게 한참을 뛰다가 이상함을 느낄 때쯤에는 이미 진법에 생기를 잃어 초췌해진…….
“응?”
“뭐요? 얘기가 다르지 않소.”
설천위를 잡기 위한 준비를 위해 끌어들였던 연가의 인물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들의 말대로라면 설천위는 분명히 제자리를 돌고 있어야 했는데…….
“진법을 잘못 펼친 것 아니요? 어찌 저리 곧게 갈 수 있단 말이오?”
멀쩡한 산을 달려도 저렇게 일직선으론 못 달리겠다.
미친 듯이 달리는 설천위의 모습에 얼굴을 일그러트린 연가의 무인이 결국 검을 뽑았다.
“일이 끝나면 반드시 이번 실책을 따질 것이오!”
“잠깐 기다리……!”
사내가 만류하기도 전에 생문을 벗어나 진법으로 뛰어드는 연가의 무인과 그 부하들.
사천맹의 지낭이라는 연가의 이름이 아무리 빛이 바래고 있다지만 이 무슨 무식한…….
사내가 당황함을 숨기기에도 부족한 짧은 시간.
진법에 들어간 연가의 무인들이 같은 자리를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씨익.
‘저, 저놈이?!’
갑자기 멈춰선 설천위가 정확하게 이쪽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강렬한 빛을 머금은 두 눈동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