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115화-흑룡학관 (2)
시험해 보겠다.
그 한 마디에 설천위는 본능적으로 반걸음 앞으로 나섰다.
절묘하게 유예린의 앞을 가린 설천위의 모습에 성큼성큼 다가오던 황보중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기본은 되어 있는 놈이구나.”
그리고 공간이 뒤틀린다.
아니, 그렇게 느꼈다.
근육과 내장이 뒤틀린 것 같은 기세가 전신을 짓눌렀으니까.
그렇기에 설천위는 즉각 반응했다.
[크르르르르르.]
내면에 숨어 있던 패융이 모습을 드러내고, 패령안에서 패기가 안광이 되어 번뜩인다.
전신에서 아지랑이처럼 흘러넘치는 패기가 기세를 밀어내고 여유를 만들어 낸다.
그렇기에, 볼 수 있었던 광경.
기수식(起手式).
초식의 시작이 되는 동작.
허리를 살짝 돌리고, 등부터 근육을 조여 팔을 뒤로 당긴다.
과하지 않게 당겨진 팔은 가슴 근처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밀어낸다.
가르고 지나가는 게 아니다.
공기의 저항 자체를 그냥 그대로 밀어내고 나아간다.
힘.
오로지 그것.
마치 공간을 포탄으로 발사하는 화포처럼 주먹이 안면을 향해 날아온다.
그 말도 안 되는 공격에 설천위는 반응했다.
마찬가지로 주먹을 뻗어 상대의 주먹에 맞선다.
패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려 강화한 주먹이 황보중의 주먹과 맞닿는 그 순간.
“쯧.”
가볍게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황보중이 주먹을 거뒀다.
“확실히 낫군.”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찡그린 황보중은 몸을 돌려 팽후를 바라봤다.
“얘 혼자만 보낼 건가?”
“최대한 이 친구의 생각을 존중할 걸세.”
팽후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지 잠시 미간을 찡그리던 황보중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엔 안 들지만, 이게 정답이라는 것을 알고 이내 수긍한 것이다.
“……제가 판단하기에 앞서서 상황 설명이 먼저 필요한 것 같은데요?”
천천히 패기를 가라앉힌 설천위는 살짝 불만이 담긴 눈으로 팽후를 바라봤다.
이 무식한 놈들, 시험이랍시고 주먹부터 휘두르기냐.
멈출 자신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해도 당하는 입장에선 오금이 저린다고.
“음, 그러고 보니 네 의사를 안 물어봤구나.”
설천위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인 팽후는 아직도 서 있는 이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모두가 자리에 앉고, 간단하게 차를 내어준 팽후는 굳이 시간을 끌지 않고 곧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먼저 흑룡학관에 갔던 이들이 돌아왔네.”
“네?”
“아직 돌아올 시기가 아닌 거로 아는데요.”
흑룡학관에서 온 이들은 일단 한 학기를 보내는 것을 예정으로 삼고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학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돌아오다니.
유예린의 대답에 팽후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원래라면 돌아올 시기가 아니지. 그런데, 어쩔 수 없었다.”
“크게 다친 거군요.”
눈치가 빠른 유예린의 대답에 팽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비가 붙었고, 싸움이 벌어졌다.”
“더러운 사파 놈들, 한 개 대가 한 사람을 공격했다더군.”
과연.
상황 파악이 끝난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이쪽에서 보낸 숫자는 셋.
뛰어난 이들로 보냈겠지만, 흑룡학관도 뛰어난 이들이 모인 곳.
다수가 핍박해 버리면 답이 없다.
실력에 큰 격차가 없는 이상, 머릿수를 극복하긴 정말로 어려우니까.
“그런데, 이 상황에서 저희를 부른 이유가 무엇인가요?”
설천위가 고개를 끄덕이던 사이, 유예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궁금증.
하긴, 궁금하긴 하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을 부른 이유가.
담담하면서도 날카롭게 자신을 바라보는 유예린의 시선에 팽후는 쓰게 웃었다.
“저쪽에서 한 번 더 기회를 준다고 하더군.”
“기회요?”
“제대로 된 학생을 보내지 않아 교환학생의 취지가 어긋났으니 제대로 된 학생을 다시 보내라더군.”
이쪽 학생을 걸레짝으로 만들어 놓고 너희들이 모자란 놈들을 보내서 그런 거니까 새로 보내라?
“이런 개…….”
화가 솟구치는지 벌게지는 얼굴을 한 황보중이 겨우 욕지거리를 삼켰다.
그의 필사적인 인내를 지켜보며 한숨을 내쉰 팽후는 설천위를 바라봤다.
“나는 네가 갔으면 좋겠다.”
“……음.”
갑작스러운 권유에 설천위는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
바로 받아들이기 부담스러운 제안이라서 망설이는 건 아니다.
“아까 말씀하셨던, 가는 인원에 대한 건데요.”
“음, 네가 원하는 대로 최대한 지원을…….”
“저 혼자 가게 해 주세요.”
“응?”
“안 돼요.”
팽후의 의문과 유예린의 단호한 거절.
아니, 거기서 왜 네가 거절하냐.
“저 혼자 가도 된다면, 가겠다는 겁니다.”
“……신중하게 생각하거라. 분명 네 자유 의지를 존중하긴 하겠으나 섣불리 결정지을 일이 아니다.”
한 번 더 묻는 팽후.
선택을 존중 하나 근거 없는 오만은 선택이 아니다.
그리 말하는 것 같은 눈동자에 설천위는 담담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혼자 갈 게 아니라면 가는 의미가 없다.
그러니까 여기선 말꼬리를 잡아 볼까.
고개를 돌려 황보중을 바라본 설천위는 그에게 물었다.
“황보척, 걔가 모자란 녀석인가요?”
“네놈…….”
황보중의 눈이 분노로 제대로 타오르기 전에 설천위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전 아니라고 봐요.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최소한의 기개는 있는 친구일 테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흑룡학관에 자원해서 가는 일 따위 할 리가 없다.
“…….”
“이번에 흑룡학관으로 간 친구들은 셋. 그런데 제가 가면서 또 몇 명이나 데리고 간다면 그들의 말이 맞는다는 걸 인정하는 꼴밖에 안 됩니다.”
설천위의 말에 그 의도를 깨달은 팽후와 황보중의 눈빛이 변했다.
그 눈빛에 성공을 직감한 설천위는 속으로 작게 웃었다.
“그 친구들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이쪽에서도 인원을 맞춰야죠.”
“그래서 혼자인가?”
“네, 흑룡학관에선 네 명이 왔으니까요.”
이쪽에선 세 명이 갔고.
뭐, 지원자가 별로 없어서 셋이서 간 거겠지만.
여하튼.
명분은 이쪽에 있다!
“그러니, 저 혼자 가겠습니다.”
“……위험하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제가 갈 필요도 없겠지요.”
담담하게 말하는 설천위.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팽후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대로 해라.”
“감사합니다.”
팽후의 허락에 포권과 함께 고개를 숙이는 설천위.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황보중.
“마음에 들었다.”
입꼬리를 올린 황보중은 작은 패 하나를 그에게 던졌다.
“졸업하면 패력단으로 와라. 바로 대주 자리를 주지.”
“그건 좀 고민해 보겠습니다. 패력단은 너무 거칠어서요.”
“흐하하하! 그래, 얼마든지 고민해 보도록.”
호탕하게 웃은 황보중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 옆에 앉아 있던 황보택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다.”
“뭐가?”
“그, 저번 학기에 내가 했던…….”
“아, 됐어. 그런 사소한 걸 누가 신경 쓴다고.”
내가 나이가 몇인데 어린놈이 시비 건 걸 가슴에 품고 있겠냐.
사과하는 황보택을 향해 대충 손을 내저은 설천위는 그를 보냈다.
왠지 호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건 찝찝했지만, 뭐 독기에 차서 바라보는 것보단 훨 낫지.
“그럼 자세한 사항이 정해지는 대로 바로 연락을 주마.”
“예. 알겠습니다.”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알려 줄 테니 가서 쉬어라.”
“예, 그럼.”
포권과 함께 학관장실을 나온 설천위는 담담하게 걸었다.
아니, 걸으려고 했다.
“……왜?”
아까부터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던 유예린이 다 말해 보라는 듯이 그를 바라봤다.
“뭘 노리시는 거예요? 흑룡학관에 영약이라도 숨겨 놓으셨어요?”
“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공자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혼자 가겠다고 할 리가 없잖아요.”
유예린, 너란 여자.
참 눈치가 빠르구나.
어쩜 이렇게 정확하게 짚어 내는…….
“크흠, 에, 에이, 아니 내가 흑룡학관에서 볼일이 뭐가 있다고?”
“흐음……. 분명 이유가 있는데…….”
한껏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유예린은 결국 훈련장에 도착해서야 그 시선을 거뒀다.
애초에 캐물을 생각도 없었던 것 같지만.
요즘 들어 슬슬 비밀 같은 게 생기면 말해 달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단 말이지.
억지로 물어보진 않지만.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긴 한데…….
[진짜 혼자 갈 거냐?]
[위험할 거다.]
숙소.
홀로 침대에 누워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리던 설천위는 혼들의 조언에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봤자 학관인데 뭔 일 있겠어요?”
[그런 방심이 큰 화를 불러오는 법이다.]
[암, 그렇고말고. 나 때는 말이야…….]
한번 물꼬가 트이니 또 자신들의 과거를 들먹이며 주절주절 떠드는 혼들을 보며 설천위는 피식 웃었다.
뭐, 나도 믿는 게 있으니 이러는 거긴 하지.
혼자 가야 하는 이유가 꼭 영약 때문만은 아니니까.
* * *
“천위, 조심해라.”
“오냐, 걱정 말고.”
“조심하세요.”
“오키.”
다음 날 아침, 설천위는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학관을 나섰다.
어제 소식을 듣고 소란스러웠던 것과는 다른 담담한 배웅.
그 안에 담긴 신뢰에 그들을 바라보던 팽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파의 미래가 어둡지 않구나.
그렇게 자신을 향하는 시선들을 뒤로한 채 설천위는 걸었다.
“그런데 길은 아시나요?”
“대충?”
설천위의 수행원을 겸해 따라온 청아는 설천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아, 말도 못 타서 걸어가야 하는데 길을 대충 아신다고요? 이번 학기 안에 도착은 할 수 있겠어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청아의 모습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말 못 타면 어때? 오히려 좋지.”
“대체 뭐가 좋아요?”
[훌륭한 마음가짐이로다.]
[음음, 기본이 되어 있어.]
의문을 표하는 청아와 반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혼들.
검과 도를 등에 멘 짐 속에 넣은 설천이는 걸으면서 가볍게 몸을 풀었다.
“뛰어야지.”
“예?”
“최근에 일이 바빠서 제대로 수련을 못 했잖아?”
이 몸뚱이의 재능이란 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다.
노력을 멈추면 독 안에 차오르던 물이 확확 줄어든단 말이지.
그러니까 가득 채우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구멍으로 새어 나가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의 물을 때려 박는 것.
어떻게?
이렇게.
[뛰어라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
“이 미친 주인아!!”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하는 설천위와 그의 뒤에서 채찍을 휘두르는 천마.
그 모습에 화들짝 놀란 청아가 재빨리 그 뒤를 쫓았…….
“생각보다 느리네?”
“하악, 하악!”
“생각보다 빨리 지치고.”
눈이 슬쩍 가늘어진다.
이 사람…….
“진짜 엄청 비리비리하네요?”
“천성이야…….”
이를 악물고 달리는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지만, 솔직히 말해서 느렸다.
체력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고.
내공이나 패기 같은 힘의 도움을 받지 않는 설천위의 몸은 이토록 허접했다.
고작해야 이류 정도?
초절정의 고수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육체라곤 상상도 하기 힘든 조잡함.
하지만.
“끄아아아아!”
[좋구나!]
여기서 흑룡학관까지의 거리는 서울에서 부산보다 멀다.
그러니까 그 거리를 미친 듯이 달려서 가면 조금은 나아지겠지.
내공은 한 점도 안 쓰니 쉴 때마다 회복을 사용하면 얼마든지 달릴 수 있다.
“가즈아아아아아아아!!”
인적이 드문 가도에 들어서자 본격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달리는 설천위의 모습에 청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갈 건데, 다른 사람이랑 갈 순 없잖아?
“영약 가즈아아아아아!”
……다른 목적이 확실하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 * *
“목표물이 학관에서 나왔습니다.”
“일행은?”
“웬 여자 하나뿐입니다.”
“유예린인가?”
“아닙니다.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학관에서 심부름을 하던 몸종 같습니다.”
“멍청한 놈.”
부하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인 사내는 천천히 일어섰다.
“오만함의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사내의 두 눈동자가 혈광으로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