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113화-적랑대 (5)
세상은 참으로 더럽다.
진실이란 것은 힘 있는 자의 주장에 따라 바뀐다.
아무리 억울해도 힘이 없으면 그 억울함은 진실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이건 이것 나름대로 좋네.’
모두가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진실 또한 힘이 있다면 얼마든지 확고부동한 진실로 바꿀 수 있다.
지금처럼.
“말해 보시죠. 변명할 말이 있다면 얼마든지 들어 드리겠습니다.”
날카롭기 그지없는 유예린의 시선이 정무회주를 향한다.
눈빛만으로 욕을 하는 것 같은 경멸에 찬 시선이었지만, 정무회주는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섬서유가(陝西妞家).
그들이 누군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도(正道)의 집행자다.
정파이면서 암행에 뛰어난 무공을 주력으로 하는 가문은 섬서유가가 유일하다.
더불어 그들이 그런 무공을 주력으로 삼게 된 계기는 더욱더 유명하고.
한번 가문을 잃은 천재가 복수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방식을 채택하면서 태어난 가문.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의를 위해서라면 정사(正邪)를 가리지 않는 독종.
어떤 의미로 당가(唐家)보다 더 위험시되는 가문이 바로 섬서유가다.
그런 가문의 소가주가 자신의 직속 부하의 증언을 근거로 압박하는 거다.
여기서 부정한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럴 수 있을 리가.
섬서유가는 멸악(滅惡)을 가훈으로 삼는 가문.
설령 그것이 같은 정파라 할지라도 검 끝을 향한다.
‘그 머저리들의 집안처럼 될 수 없어!’
절정급 무인에게 설천위를 죽이라는 의뢰를 넣었다가 멸문한 가문.
흉수의 흔적은 없다.
하지만, 흔적이 없는 게 그 증거다.
정파의 영역 안에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한 가문을 멸족시킬 수 있는 건 섬서유가 정도뿐이니까.
아무런 증거나 근거 없이 그들에게 대적하는 건 죽음을 부르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크게 좁혀진다.
잘못을 사죄하거나…….
‘아니! 그럴 순 없어!’
지금 이 자리에서 보고 있는 이들이 몇인가.
잘못을 인정해 버리면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문도 크게 휘청거릴 게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최소 십 년은 제대로 활동하기 힘들어진다.
그런 꼴은 될 수 없다.
결코.
그러니 남은 선택지는…….
“나, 난 모르네. 저들이 마음대로 저지른 짓이야!”
“회주!”
“아니……!”
꼬리 자르기.
책임을 회피하고, 도망치자.
자신이 유예린의 말을 부정할 근거도 없지만, 반대로 지금 이 말을 유예린이 부정할 근거도 없다.
그러니 이걸로…….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멍청한 놈이군.”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는 유예린의 말을 끊은 건 성무경이었다.
비웃음이 담겨 있는, 가소로운 것을 바라보는 눈동자.
그 시선은 자신의 부하, 아니 동료를 버리고 도망치려는 정무회주를 향하고 있었다.
“공적은 아랫사람에게, 책임은 자신이.”
뭐냐, 그 장성이나 할 것 같은 리더십 명언은.
……조금 멋있는데?
“위에 선 사람이라면 네 잘못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인데, 이곳에서는 그런 기본적인 것도 가르치지 않나?”
“……사파에서도 정도(正道)를 가르칠 줄은 몰랐네요.”
씁쓸함이 담긴 유예린의 목소리.
하지만 성무경은 무슨 소리냐는 듯 유예린을 바라봤다.
“정도? 그런 쓰잘데기 없는 개념이 아니다. 조직의 기본이다. 자신에게 이득이 있고 손해가 없어야 상급자의 명에 따르는 것에 불만이 없다.”
흑룡학관의 최고 가치는 결속.
그 근간은 당연히 조직 문화이며, 그 방식은 군대와 거의 흡사하다.
당연히 상명하복의 원칙이 기본이고…….
상명하복은 공포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
“설령 자진해서 왔다고 한들 그만한 대우와 이점을 주지 않으면서 책임만을 전가한다면 어떤 이들이 상급자를 따르지? 힘으로 눌러도 불만은 쌓이고 그 불만은 반드시 폭발한다.”
가무학의 앞에 선 성무경은 경멸이 가득한 눈으로 정무회주를 바라봤다.
“무력을 쓰는 우리들에게 폭발은 곧 붕괴를 의미하지.”
……그 얘기, 어떤 나라의 국방부에도 꼭 해 주고 싶은데?
거긴 강제로 불러 놓고 저러잖아.
뭐, 그 인간들도 다 알겠지만.
[진국이구나.]
흡족하게 웃는 천마의 목소리.
[훌륭하군.]
거기에 현태중의 인정까지.
이야, 정마의 인정을 모두 받는구나! 성무경이!
뭐, 이런 인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그게 무슨…….”
성무경의 힐난에 이제 당황한 건 정무회주였다.
지금 이대로 분위기가 흘러가면 오히려 사죄했을 때보다 더 인상이 나빠질 게 뻔하다.
그걸 모를 정도로 멍청한 녀석은 아니니까.
어느새 살짝 방관자 입장이 된 설천위는 흥미로운 얼굴로 상황을 지켜봤다.
거짓과 날조에 거짓과 날조로 승부하는 유예린.
물론 유예린의 거짓과 날조는 진실이긴 하지만, 행동 자체는 거짓말이니까.
그리고 정무회주가 그러했듯, 힘이 있는 자가 하는 거짓과 날조는 진실이 된다.
거기에 사파 주제에 완전히 정론을 내놓는 성무경.
도의적으로도, 실무적으로도 성무경의 말이 옳다.
즉.
“내, 내가…….”
정무회주는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이야, 이게 이렇게 돌아가네?
아주 재미있어.
그러니 좀 더 부추겨 보자.
“그런데, 너희 쪽에선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냐?”
“무슨 뜻이지?”
“거짓과 날조로 상대를 음해하려다가 걸리면 어떻게 하냐고.”
“우리는 기본적으로 속은 놈이 잘못이긴 하지만, 속이지 못했다면…….”
아, 속은 놈이 잘못이구나.
여윽시 사파.
“속이는 데 실패했다면, 그 죄를 물어 팔을 잘라 버리지.”
성무경의 눈이 살기로 번뜩인다.
당장 분위기만 조성되면 직접 팔을 베어 버릴 기세다.
음, 아무리 그래도 저쪽에서 이미 반쯤 포기한 상태인데 팔까지 베어 버리는 건 좀…….
나는 좋지만, 아무래도 여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그래도 사파의 사람이 와서 팔을 베어 버렸다고 하면 분위기가 안 좋아질 테니까.
진실과 상관없이.
스스로를 옳다고 생각하는 정파의 인종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니까.
그러니 여기선 여론을 생각해서 슬슬 중재를 해야…….
“아미타불…….”
응?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혜송 스님!”
정무회주의 격한 반응.
그리고 반짝이는 태양, 아니 머리.
갑자기 등장한 중의 반짝이는 머리에 잠시 미간을 찡그렸던 설천위는 이내 그 정체를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혜송.
나름대로 강하고 참 듬직한 친구.
물론.
‘……저 미친놈이 아직은 제정신인 것 같긴 한데.’
전에 입관 시험 때 봤을 때도 멀쩡해 보였으니 걱정은 안 하고 있지만, 저쪽은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영 감이 안 잡힌단 말이지.
그나저나.
“평소 면벽 수련에 힘쓰시는 스님께서 여기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허허, 학관의 외부 사람과 마찰이 생겼으니 학생회장인 제가 안 올 수가 있겠습니까?”
아!
얘 학생회장이지.
워낙 일을 안 해서 까먹고 있었네.
뭐, 그래도 마침 잘됐네.
얘가 나중엔 미쳐 버릴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진짜 훌륭한 소림의 중이다.
아무리 신흥삼가가 떠오르고 있고 사파와의 전쟁이 장기화돼 개판인 무림이라지만, 소림의 명성만큼은 여전하다.
얘가 중재하면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겠…….
“나,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
“……저 똥멍청이가?”
갑자기 발작하는 정무회주.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소리치는 모습에 모두가 미간을 찡그렸다.
심지어 혜송조차도.
부동심을 그렇게 강조하는 소림의 후기지수가 미간을 찡그릴 정도면 어지간히도 꼴 보기가 싫은…….
“혜송 스님! 저희 가문이 그럴 가문이 아니라는 것은 아시지 않습니까!”
자신이 아니라 가문의 이름을 들먹인다.
그리고 그 말을 단숨에 끊어 내도 모자랄 혜송이 고민하는 순간, 설천위는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정무회주.
검을 주력으로 쓰기에 상상도 안 해 봤는데, 설마…….
“소림의 속가인 저희에게 사파의 간악한 놈들이 술수를 부린 겁니다!”
“……아미타불.”
여기서 소림을 끌어들인다고?
그리고 그 순간, 유예린도 미간을 찡그렸다.
정무회주의 집안으론 섬서유가의 증언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소림이라면 다르다.
그들은 증거를 요구할 수 있는 힘과 권력이 있다.
[상황이 점점 더 복잡해지는구나.]
천마의 말대로, 정무회주의 가문을 몰랐던 건지 잊고 있었던 건지 모를 사람들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소림의 이름을 생각하면, 정무회주의 주장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반응.
그런 반응이 사람들 사이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기껏 시원하게 해결될까 했더니 이 무슨…….’
짜증이 확 솟구치는 그 순간.
[그렇다면, 증거를 보이면 될 일 아니더냐.]
천마의 한마디에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아니, 증거는 무슨 증거?
[독 말이다.]
독? 독이 무슨 증거가…….
“아.”
“왜 그러시죠?”
“뭐 하나 생각난 게 있어서. 유 매, 부탁 좀 하나 들어줄래?”
설천위의 부탁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유예린은 한 걸음 물러나 전음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설천위는 아직도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혜송과 그를 향해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정무회주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네 말은 비무에서 독을 쓴 저 적랑대 대원이 잘못했다는 거 아니야.”
“마, 맞다!”
“그래서 싸움이 붙었으니 너희들은 잘못이 없다는 거고.”
“맞다.”
“그럼 그 독에 당한 녀석은 어디에 있냐?”
“흥! 당연히 약제당에서 쉬고 있다!”
“그래, 당연히 독에 당했는지 안 당했는지 검사는 했지?”
“헛소리를! 할 필요도 없었다! 실제로 그는 중독 증세를 보이며 쓰러졌다고 하니까!”
어느새 기세가 등등해져서 당당하게 외치는 정무회주를 보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여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정무회주는 주변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성무경을 간악한 사파의 종자로 몰고, 우리들이 사파의 계략에 놀아났다고 조롱한다.
그 모습을 혜송조차 어찌 못하고 가만히 바라보던 그 순간.
“공자, 데려왔어요.”
허공에서 떨어진 여인이 쓰러져 있는 남자를 바닥에 내려놨다.
“택진!”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설천위는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얘가 맞겠지? 독에 당했다고 한 사람이.”
“맞다. 갑자기 창백해져서 쓰러지더니 독에 당했다고 난리를 피우더군.”
가무학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쓰러진 택진이란 자에게서 손을 떼고 주위를 둘러봤다.
“이자가 독에 당하지 않았다면, 모두 연기라는 소리가 되지.”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
“뭐, 기다려 봐. 당 소저?”
설천위의 부름에 한쪽에서 구경하던 당화유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다가왔다.
“독이 있는지 없는지 검사하면 돼?”
“네, 부탁할게요.”
“좋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도구를 꺼내는 당화유.
침을 이곳저곳 찌르고 몇 군데를 촉진하는 당화유의 손길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그 순간.
“독은 없네. 하나도.”
“그, 그게 무슨?!”
당황하는 정무회주.
독은 당연히 진짜로 썼을 테니까.
당황할 만하지.
그런데 말이야.
[독기 흡수(毒氣吸收)]
짜잔, 독이 없어졌습니다.
“확실해, 없어.”
“그, 그럴 리가……!”
당화유의 확신에 정무회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반박했지만, 당화유는 확실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어. 당가의 이름을 걸고.”
무림에서 독하기로 소문난 두 가문의 보증.
심지어, 증거와 증인까지 저쪽에 있는 상황.
“아미타불……. 소림에서는 이번 사안에 관해서 엄히 문책할 것입니다, 시주.”
혜송의 눈빛이 날카로워지고, 지켜보던 이들의 표정이 일변했다.
꼬리 자르기?
그딴 게 가능한 상황은 진즉에 지났다.
흔들리는 정무회주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느꼈다.
날조와 선동이 최고야! 늘 짜릿해!
아니, 이게 아니지.
“자, 책임을 져야지?”
할 건 하고 넘어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