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112화-적랑대 (4)
“들었나? 적랑댄가 뭔가 하는 놈들이 왔다고?”
“아, 그 흑룡학관 놈들?”
학관장에게 보고하기 위해 학관장실로 향하는 길.
개학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인데도 불구하고 들리는 이야기는 적랑대에 관한 화제뿐이다.
어제 막 도착했으니 이야깃거리도 별로 없을 텐데, 뭐로 이렇게 떠들어 대는 건지…….
“정무회에서 비무회에 초청했다던데?”
“정무회? 그놈들이?”
정무회.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설천위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 다시 걸었다.
뭐, 중요한 거면 기억나겠지.
“소란스럽네요.”
“학관이 시작된 이래로 몇 없었던 교환학생이니까.”
같은 무림맹 휘하의 학관으로 수령원이 있지만, 이쪽은 분야가 완전히 다르니 교환학생을 희망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
무림의 다른 기타 학관들은 말이 학관이지 규모가 무림학관과는 비교가 불허해서 급이 안 맞아 교환학생으로서의 이점이 없고.
교환학생을 할 만한 곳이라곤 흑룡학관뿐인데, 관계가 관계다 보니 진짜 가끔 있을까 말까 한 행사가 바로 교환학생 제도다.
그런 행사가 지금 자신이 다니는 와중에 이루어졌으니 흥미가 동할 수밖에.
소란스러운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그런데, 웬일로 저희를 부르시는 걸까요?”
“뭐, 궁금하신가 보지.”
지금쯤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
수령원의 학생들로도 불가능했을 임무를 무림학관의 학생이 처리했으니 학관장에게 문의가 안 들어갔을 리 없다.
당연히 궁금할 터.
“오? 왔나?”
학관장실의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반응이 나오는 걸 보니 맞는 것 같다.
평소엔 기척을 느끼고도 문을 두드리기까지 기다리던 양반이.
헛웃음을 삼키며 문을 여니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 반겨 줬다.
“왔어?”
“누님?”
남궁선 누님까지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학관장의 손짓에 따라 의자에 앉은 설천위는 웃으며 상석에 앉은 팽후를 바라봤다.
“아직 제대로 쉬지도 못했을 텐데, 이렇게 불러내서 미안하군.”
“아뇨. 괜찮습니다. 어차피 수련이나 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솔직히 덕분에 쉬어서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이거 끝나면 가서 보충 수련을 하긴 하겠지만.
원래 인간은 눈앞에 닥친 편안함에 만족하는 생물이니까.
“그거 안 되겠구먼. 내가 수련을 방해하다니.”
“괜찮습니다. 이 일이 끝나면 가서 마저 수련할 겁니다.”
“그런가? 그거 참 기특하군.”
아니, 유예린 양? 그걸 왜 당신이 대신 대답하죠?
그리고 나랑 수련한 적이 없는데, 이거 끝나고 수련할 거란 건 어떻게 아시는 건가요?
응?
살짝 해선 안 되는 생각이 머릿속에 차오르려는 순간, 팽후의 목소리가 생각의 흐름을 끊었다.
“무림맹에서 연락이 왔네. 이번 임무로 세운 공적을 치하해야 하니 무림맹으로 와 달라고 하더군.”
“예?”
순간 나도 모르게 반문해 버렸다.
무림맹?
거기에서 왜?
“이번에 너희들이 처리한 악귀들이 만귀단이나 백화단이 직접 움직여야 할 정도라고 하더구나.”
“피해가 더 커지지 않은 건 순전히 너희의 덕이니 칭찬하겠다는 거지. 뭐, 그보단 자신들의 판단 실수를 덮기 위해서겠지만.”
“어허.”
남궁선의 노골적인 이죽거림에 팽후가 그녀를 말렸다.
창천단주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니까.
“왜요? 이 아이들 정도면 슬슬 알아도 될 것 같은데.”
“아직 배우고 정진하는 데에만 몰두해도 시간이 부족한 시기거늘 쓸데없는 잡념을 집어넣지 말게.”
아뇨. 그렇게 눈앞에서 대놓고 말하면 이미 충분히 잡념이 들어갔는데요.
가늘게 변하는 설천위의 눈빛에 팽후가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커흠, 그나저나 이번 일로 나름 성취를 얻었는지 모르겠군.”
“나름대로 많은 걸 얻긴 했습니다. 무학과는 큰 관련이 없지만요.”
“역시 그렇군.”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팽후.
표정엔 흡족함이 가득했다.
그 모습에 설천위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학관의 학관장이면서도 설천위가 영적인 능력으로 성장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지 않는다.
이 시대에 흔한 굳어 버린 사고방식을 벗어던진 사람.
아이들을 보면서 변한 것인지.
변했기에 아이들을 관리하기로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능성을 올바르게 인정해 준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 사람은 학관장으로서의 자격이 있다.
‘뭐, 게임에서도 꽤 인기가 많았지.’
현실에서 찾기 힘든 교장님, 뭐 이런 식의 밈으로.
주인공 캐릭터가 갈등의 국면을 맞이했을 때,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하고 다른 것의 차이는 존중해 주는 면모를 보인다.
틀린 것과 다른 것의 차이를 아는 참된 어른.
“그럼, 일단…….”
순간, 거기까지 말하고 말을 멈추는 팽후.
그 직후에 남궁선의 고개가 돌아가고, 유예린의 고개 또한 돌아갔다.
[소란스럽구나.]
그리고 천마의 목소리.
여기까지 오니 설천위도 알 수밖에 없었다.
기척은 이제야 느꼈지만, 저 밖에서 뭔가 소란스러운 일이 있다는 것을.
“하, 학관장님! 흑룡학관의 학생이 학생들을 마구 베고 있습니다!”
* * *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다. 너는 배운 대로 했을 뿐이니.”
연무장.
정무회와 가무학의 싸움이 벌어진 이곳은 이미 바닥에 피가 끈적하게 흐르고 있었다.
소란이 일자 즉시 달려온 적랑대의 대주, 성무경은 가무학을 뒤로 보낸 채 자신들을 둘러싼 학생들을 바라봤다.
“내 부하를 벌하고 싶다면, 나를 넘어서라.”
“뭐라?! 네놈이 정녕 도를 넘는구나! 이곳이 네놈들이 마음껏 칼을 휘두르던 사파의 소굴인 줄 아느냐!”
누군가의 격분 어린 외침에 다른 이들도 동조하며 더욱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 연무장.
이미 주변을 가득 메운 학생의 수가 오십을 넘기고 있었다.
가무학에게 베인 이들 중 상처가 심한 이들은 약제당으로 넘어간 상황.
미리 몸을 빼 큰 상처를 입지 않은 정무회의 수뇌부들은 한쪽에서 입꼬리를 비틀고 있었다.
“더러운 사파 놈! 이곳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 주겠노라!”
“오오!”
누군가의 외침에 다시 시끄러워지는 연무장.
그야말로 폭주하기 시작한 이들은 하나같이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맞는 말이오! 내가 없는 사이에 이런 끔찍한 일을 벌이다니!”
“오! 정무회주!”
호기롭게 검을 뽑아 들어 앞으로 나서는 이의 모습에 사람들이 환호했다.
자리를 비웠다고 하는 정무회주.
그는 무(戊) 등급의 고수.
절정이라는, 후기지수로 따지면 말도 안 되는 경지에 오른 고수다.
그런 강자가 등장해서 분노를 표하고 있으니 분위기가 더욱 뜨거워질 수밖에.
그리고.
‘저놈이군.’
자신을 바라보는 같잖은 눈빛에 성무경은 이 상황의 원흉이 누군지 파악했다.
저놈이 저지른 짓이다.
속내야 뻔하지.
적랑대와 싸워 이겨서 자신의 명성을 높이겠다.
뭐 그런 의도일 거다.
그냥 하면 조금 불안하니까 사람들을 잔뜩 모아서 압박도 좀 하고.
이대로 상황이 흘러가면 설령 지더라도 큰 상처 없이 마무리할 수 있을 테니 문제도 없고.
흑룡학관의 대표로 온 자신들에게 진다고 한들 명성에 큰 손해도 없을 테고.
참으로 머리가 잘 굴러가는 놈이다.
이걸 하루 만에 실행하다니.
‘나도 안일했군.’
정파라는 허울에 마음이 풀어진 건가.
정보 수집을 위해 부하들을 따로 움직이게 한 것이 잘못이었나.
가무학만 비무회라는 곳에 갔기에 불안한 마음에 찾아왔으니 그래도 최악을 고르진 않아서 다행이다.
‘그 녀석 때문에 쓸데없는 기대를 한 걸지도 모르겠군.’
사파에선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것들이 정파라고 배운다.
실제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 가르침이 옳다고 알려 주고 있었다.
문제는 어제 본 녀석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는 것 정도?
‘상관없지.’
쓸데없는 잡념을 털어 낸 성무경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뭐가 됐든, 상관없는 이야기다.
자신이 해야 할 것은 오로지 하나.
나를 지키고, 동료를 지킨다.
설령 임무에 실패해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자리에서 모두를 살려서 데리고 나간다.
성무경의 눈빛에 살기가 깃드는 그 순간.
“그만.”
언젠가 한 번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이번에도 묵직한 중압감과 함께.
몸을 짓누르는 힘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비틀린다.
“왔군.”
인파를 가르며 나타나는 한 남자.
잘생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남자, 설천위.
도착한 직후 여러모로 조사해 보고 있지만, 알면 알수록 놀랍다.
밑바닥에서 거의 정상의 근처까지.
1년 남짓한 시간 만에 올라선 괴물.
심지어 그 주변의 동료들마저 하나같이 그와 같은 위치까지 올라섰다.
그때 봤던 그 녀석들이겠지.
그 능력에 흥미가 동하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만…….
“이게 무슨 소란인지 궁금한데, 설명해 줄 사람?”
주변 모두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지만, 그 눈동자는 정확하게 성무경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 지금은 흥미를 채울 때가 아니지.
“저놈들이 내 부하를 데려다가 시비를 걸고 자신들이 지자 떼거리로 몰려들었다. 그뿐이다.”
“뭐라?! 저놈이 비무에서 살수를 쓰지 않았느냐!”
“내가 쓰지도 않은 독을 썼다고 거짓 연기를 해서 나에게 시비를 건 건 저놈들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지지 않겠다는 듯 소리치는 가무학.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설천위는 고개를 돌렸다.
“정무회주?”
“……뭐냐.”
“네 부하들이 실수를 저질렀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지?”
“잘못을 지적하자면 부하가 아니다. 동료지. 그리고 설마 네놈은 우리의 말보다 저 사파 무리들의 거짓부렁을 믿는 것이냐?”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는 정무회주.
그리고 그에 찬동하는 주변 사람들.
[껄껄껄! 정파 무림의 앞날이 참으로 밝구나!]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내가 이래서 정파 놈들을 싫어해요!]
[……쯧.]
격렬한 혼들의 반응에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적랑대가 무림학관의 내부로 들어왔다.
성무경은 믿을 만한 인간이긴 해도 정보 수집을 안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암영의적을 붙였다.
오늘 아침에 네 사람이 갈라진 건 의외였지만, 암영의적은 일단 가장 사고 칠 위험이 높아 보이는 가무학을 따라갔고 현장을 전부 지켜봤다.
암영의적이 설천위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으니…….
‘짜증 나는군.’
저 뺀질거리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놈이 개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소리다.
그럼 이 사태를 어찌해야 할까.
조금 멀리서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을 팽후를 떠올린 설천위는 더욱 깊게 미간을 찡그렸다.
일이 잘못 흘러가면 그 인간이 다 뒤집어 버릴 수도 있는데.
이쪽이 본 것을 알려 줄 수도 없으니 팽후는 둘 다 내쫓아 버리는 선택을 할 거다.
그러면?
성무경은 그냥 제대로 된 적이 되는 거지.
후에 사파의 사패(四覇) 중 하나가 될, 성무경과 제대로 척을 지게 된다는 소리다.
그것만은 절대 피하고 싶은데…….
“정말, 구역질이 나는군요.”
고민을 이어 가던 설천위는 갑작스러운 유예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응?
진짜 혐오감이 가득한 목소리.
아, 그러고 보니 이젠 유예린도 들었구나.
암영의적의 증언을.
불쾌감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정무회주를 바라보던 유예린이 돌연 말했다.
“나오세요.”
그리고 그 순간, 허공에서 사람이 떨어졌다.
그런데 그녀를 보는 성무경의 표정이 묘했다.
그 묘한 표정에 이상함을 느낀 것도 잠시, 이내 유예린의 말과 함께 부하의 입이 열렸다.
“본 것을 말해 주세요.”
“비무가 시작되고, 가무학이라는 학생은 방어만 했음에도 상대가 독에 당했다며 쓰러졌습니다.”
허공에선 나타난 여인의 증언에 연무장 내부의 공기가 차게 식기 시작한다.
“그리고 독을 썼다며 그 자리에 있던 이들 전부가 막무가내로 가무학이란 자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정무회주를 향한다.
딱딱하게 굳은 시선.
그 안에 담긴 불신에 정무회주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응? 이상하다? 나는 저 아해를 본 적이 없는데?]
응?
잠깐, 그럼…….
……저거 다 구라야?
당황한 설천위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유예린의 날카로운 시선이 정무회주를 향했다.
이곳은 정파다.
아무리 상대가 적이라도 최소한의 선이라는 것이 있는 법.
“그렇다고 하는군요. 정무회주, 어디 해명해 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