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111화-적랑대 (3)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설천위를 바라보던 성무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지. 어딜 가든 주제 파악을 못 하는 놈들은 있는 법이니까.”
널브러진 사내를 보며 성무경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짧은 생을 살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배운 것이 있지.”
천천히 걸어 아직도 쓰러져 있는 이에게 다가가는 성무경.
성무경을 제외하곤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객잔의 정황상 그 걸음이 내는 소리는 너무도 크게 들려왔다.
설천위에게 집중됐던 시선이 다시금 그에게 향할 정도로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발소리.
심장을 조이는 긴장감이 퍼져 나간다.
“어? 어어?”
왜지?
성무경의 발걸음 끝에 있던 사내. 목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통증과 함께 눈을 뜬 사내는 기묘한 감각에 정신을 못 차렸다.
손발이 떨리고, 몸이 으슬으슬 춥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친다.
영문 모를 감각에 사내가 정신을 못 차리는 그 순간.
“죽이게?”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무형의 기운이 그를 감쌌다.
절로 고개가 숙어지는 그런 힘.
하지만, 조금 전처럼 고통스럽진 않았다.
“별로 좋은 선택지는 아닌 것 같은데?”
“약자에게 베푸는 강자의 호의는 항상 조건이 따라야 하지.”
설천위의 패기를 가르며 성무경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조건 없는 호의를 자신의 권리라고 받아들이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거든.”
담담하게 손을 뻗는 성무경.
그 손은 정확하게 사내의 어깨를 향하고 있었다.
이대로 어깨를 뜯어내 버릴 거다.
최초의 경고이니 이 정도는 해 줘야 맞겠지.
“내 부하를 조롱한 죄는 크다.”
담담하게 사내의 어깨를 붙잡는 성무경.
그가 내공을 끌어올려 어깨를 뜯어내려는 그 순간.
[크르르르르르르.]
“너무 나가지 말지?”
어디선가 들리는 짐승의 울음소리와 함께 성무경의 팔이 멈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멈춰졌다.
몸을 옥죄는 힘이 순간적으로 그의 움직임을 막은 것이다.
조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도적인 패기(覇氣).
그것이 찰나에 불과하다곤 하지만 자신의 움직임까지 막았다는 사실에 성무경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짐작은 했지만, 더 재미있군.”
“나도 지금 비슷한 심정이야.”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성무경을 보며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성무경.
사파의 네임드 중 하나로 잘생긴 외모와 카리스마로 인기 있는 빌런 중 하나다.
선택지에 따라 나중에 조력도 얻을 수 있는 진짜배기.
정파의 캐릭터로 게임을 시작하는 유저들이 품은 선악의 구분을 부숴 버리는 캐릭터 중 하나.
정파가 선이고, 사파는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얼마나 단순하고 어리석은 생각인지 알려 주는 캐릭터다.
그는 누구보다 사파답지만, 그렇다고 악(惡)이라고 부르긴 힘든 인간.
그렇기에 적당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부드럽게 넘어갔던 건데…….
아쉽게도 지금의 상황에선 그렇게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순 없을 것 같다.
“일단 거기까지 하자고. 설마 지금 우리랑 싸울 생각인 건 아니겠지?”
“우리가 싸움을 겁낼 거라고 생각하나?”
“아니. 하지만 임무 실패는 겁낼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깨를 으쓱이며 성무경이 아닌 그의 일행을 턱짓하는 설천위.
그 표정에 담긴 의도를 깨달은 성무경은 작게 미간을 찡그렸다.
이 자리에서 싸우면 자신은 무사해도 일행은 무사할 수 없다.
“적의 수준 파악이 가장 핵심 임무 아닌가? 여기서 부하들이 전부 몇 개월간 침상 신세를 지면 무조건 실패할 텐데?”
정곡을 찌르는 설천위의 지적에 성무경은 천천히 손을 뗐다.
“좋아. 여기선 집주인의 얼굴을 봐서 한발 물러나지.”
“그거 고맙군. 난 집주인이 아니긴 하지만.”
무림학관의 집주인은 엄밀히 말하면 팽후이고, 학생들 중에는 그나마 혜송이 가장 어울린다.
나름 학생회장이니까.
물론 이름만 올렸을 뿐 실질적인 업무는 부회장인 제갈소라는 제갈세가 출신의 무인이 전부 맡고 있지만.
뭐, 어찌 됐든 상황이 잘 해결됐으면 그걸로 된 거지.
“하지만.”
빠각!
“끄아아아악!”
뼈가 부러지는 소리.
그 순간 검이 검집에서 나오는 소리가 객잔 곳곳에서 울려 퍼졌지만 검이 완전히 뽑히는 일은 없었다.
설천위의 패기를 밀어낸 살기가 객잔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상참작은 가능해도 무죄는 불가능하다.”
기어코 사내의 팔 하나를 부러트린 성무경은 날카롭게 빛나는 눈동자로 설천위를 바라봤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물린다.
강자라면 그만한 힘을 보여 줘야 한다.
사파의 논리는 너무나도 노골적이지만, 그것이 틀렸다고 정면에서 반박할 수 없다는 사실이 참 서글프다.
너무나도 정직한 빛을 품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성무경의 시선을 마주하면서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 정도야 상관없지.”
뼈가 부러진 정도라면 술 취해서 난동을 부린 값치고는 싸네.
술 취해서 정상적인 상황 파악이 안 된다고 잘못이 용서되는 건 아니다.
왜 술을 성인이 되어서야 마실 수 있게 하는데? 술 취해서 하는 헛짓거리도 책임을 지라고 성인이 된 후 마시라고 하는 거지.
더 이상 뭐라 할 생각이 없기에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그대로 패기를 거둬들였다.
“끝났나요?”
“……유 매, 요즘 뭔가 부드러워지지 않았어?”
“이 정도 상황에서 걱정해야 할 정도로 약하시지 않으니까요.”
정말 깔끔한 젓가락질로 고기를 전부 집어먹은 유예린 덕에 휑하게 비어 버린 접시를 바라본 설천위는 입맛을 다셨다.
맛있었는데.
여기 있는 일행은 전부 무인이다 보니 체구가 작은 편인 여자들도 먹는 식사량은 상당하단 말이지.
식대가 장난이 아니야.
고기를 추가로 더 시켜야 하나.
그런 고민을 설천위가 시작하는 순간.
“……끝인가?”
“어? 뭐야, 아직도 폼 잡고 있었어?”
저쪽에서 들려온 성무경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뭐 하고 있어?’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끝났잖아? 가서 밥이나 먹어.”
“……정말로 이걸로 끝이라는 거냐? 저기 저놈들은 달려들 생각이 가득한 것 같은데?”
성무경의 말에 고개를 돌린 설천위는 사내의 일행으로 보이는 녀석들을 바라봤다.
자신들의 잘못도 모르고 상대의 행동이 불러온 결과에 분통을 터트리는 머저리 같은 놈들.
“난 신경 안 쓰니까 알아서 해라. 싸움은 혈기 넘치는 어린 무인들의 기본 소양이니까.”
“소협, 저희도 어린데요?”
“우리는 혈기가 안 넘치잖아. 그렇게 싸우고 왔는데, 한동안은 잠잠하겠지.”
“나는 넘친다만?”
“너는 몸뚱이가 단단해서 혈기가 못 빠져나오니까 괜찮아.”
동료들과 시답잖은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점소이를 부르는 설천위.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성무경은 헛웃음을 짓곤 몸을 돌렸다.
“놈! 어딜 가느냐!”
그리고 그런 성무경을 불러 세우는 이들.
팔이 부러진 이의 동료로 보이는 녀석들이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흉흉한 기세를 내뿜자, 성무경은 살짝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
“다 듣지 않았나? 끝났다.”
“끝나긴 뭐가 끝나! 아직 안 끝났어!”
“이해를 못 하는 머저리들이군.”
가볍게 고개를 저은 성무경은 살짝 몸을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커헉!”
“저 녀석의 개입이 사라진 지금, 너희들은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거다.”
압도적인 살기가 그들을 짓눌렀다.
혈관이 튀어나오고 호흡이 멎는다.
고작해야 몇 초.
일반인이라도 쉽게 호흡을 참을 수 있는 아주 짧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압도적인 살기에 노출됐던 이들은 작은 경련과 함께 쓰러졌다.
격(格)의 차이.
고작 한 호흡으로 사내들을 제압하고 자리로 돌아가는 성무경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건 진짜…….
“이야, 괴물이네.”
“으허?! 깜짝이야!”
“뭐야? 왜 그렇게 놀라?”
“제가 할 말인데요? 누님?”
놀란 설천위의 반응에 재미있다는 듯이 킥킥댄 여인, 남궁선은 체구가 작은 소윤혜의 옆에 자리를 잡고 젓가락을 움직였다.
“음, 그때 학관장님이 나 같은 녀석은 없을 거라고 했지만, 저건 조금 위험하네.”
“누님 정도는 아니잖아요.”
“어, 아니지.”
남궁선은 학생 때 화경에 오른 진짜 괴물이다.
초절정의 끝자락, 그딴 게 아니라 진짜로 화경에 오른 괴물.
그러니 그 정도 수준은 아니겠지만…….
“거의 끝자락? 잘하면 몇 년 안에 올라갈 수도 있겠는데?”
남궁선의 평가에 일행들은 고개를 돌려 성무경을 바라봤다.
그리고 어느새 남궁선의 존재를 느끼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성무경과 설천위의 눈이 마주쳤지만…….
‘뭐.’
가볍게 눈을 부라려 준 설천위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남궁선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시선에 남궁선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래 봤자 학생이니까 잘하면 될 거야…… 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말해 줄 수가 없다.
왜냐고?
“흑룡학관은 교육 방법이 미쳐서 말이야. 아마 실전 감각도 뛰어나겠지?”
이번 친선전, 결코 쉽진 않을 거다.
* * *
“음, 확실히 강해 보이더군.”
“그렇죠?”
흑룡학관의 교환학생이 들어온 날 저녁.
술을 들고 찾아온 남궁선을 맞이한 팽후는 자연스럽게 술잔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관장을 하면서 술을 멀리하긴 했지만 남궁선이 찾아오기 시작한 후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느낌이다.
“아까 맞이하면서 봤지만, 상당하더군.”
“부대주인 학생은 흑룡학관에 남아 있다고 하니 그쪽도 어느 정도인지 기대되네요.”
“허허, 참 복잡한 마음이구먼.”
어린 후학이 뛰어나다는 건 축하할 일이지만, 그 상대가 상대다 보니 마냥 축하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나저나, 그 녀석들의 상태는 어떻던가?”
“천위 녀석들이요?”
“그래. 나는 아직 내 눈으로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더군.”
“흐음.”
팽후의 질문에 잠시 턱을 쓸던 남궁선은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잘 모르겠단 말이죠.”
“응?”
“분명 강해진 것 같긴 한데, 뭔가 뚜렷하지 않다고 해야 하나.”
“흐음.”
뚜렷하지 않다.
그 말에 팽후는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남궁선이 읽어 낼 수 없는 변화라면 한 가지.
주술 혹은 술법이라 부르는 영역에서의 변화다.
“기대되는군.”
“그렇긴 한데요. 정말 이대로 둘 거예요?”
“뭔가 문제 있나?”
“걔, 눈빛이 보통이 아닌 것이 머리도 잘 굴러가게 생겼던데요?”
이대로 학관 내부에 받아들이면 상당한 정보가 빠져나갈 거다.
그런 남궁선의 걱정에 팽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손해는 감수해야겠지.”
경각심을 일깨워 줄 필요가 있다.
자신의 성장보다 타인의 도태를 바라고 있는 어린 녀석들의 정신을 짜릿하게 해 줄 변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번 흑룡학관과의 교류를 받아들인 거다.
“어떤 식으로 일이 터질지 벌써 기대되는군.”
흑룡학관의 학생들이 적응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한 일주일 정도면 충분하겠지?
팽후는 학생들이 맞이할 새로운 변화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렸지만.
그 변화는 그의 바람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찾아왔다.
* * *
“놈! 더럽기 그지없구나!”
“하?”
“비무에서 독이라니!”
본격적인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학생들끼리 친목 겸 성장을 위해 가지는 비무회.
그곳에 초대받은 흑룡학관의 무인, 가무학은 버럭버럭 화를 내는 상대를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독? 내가?”
“놈! 어디서 시치미를 떼는 것이냐!”
시작부터 수비적으로 나오길래 몇 번 방어 위를 두들겼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창백해진 안색으로 쓰러진 상대.
그것을 보고 독을 썼다며 달려드는 주변 놈들.
그 모습에 가무학은 허탈한 웃음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뒤쪽에서 일전에 객잔에서 벌벌 떨던 놈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 식이란 말이지?
가무학의 입꼬리가 비틀리고.
“내 말은 믿지 않을 테니 이 칼로 증명하지.”
가무학의 검이 본격적으로 피를 뿌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