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110화-적랑대 (2)
“내 부하가 그만 실례를 했군. 내가 대신 사죄하지.”
포권과 함께 성무경은 그대로 설천위를 바라봤다.
시간상으로 1초 남짓할 법한 짧은 시간.
그 시간 동안, 성무경과 눈이 마주쳤던 설천위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됐어. 못 배워 먹은 놈이 짖는다고 화낼 정도로 수양이 얕진 않으니까.”
“뭐?”
발끈하는 가무학을 한 손을 들어 막은 성무경은 작게 웃었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신이 나서 뛰어나간 녀석이라 조금 들뜬 것 같네. 이해해 주니 고맙군.”
“그래, 신경 안 쓰니까 가 봐라.”
대충 손을 휘젓는 설천위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성무경은 그대로 몸을 돌려 아까부터 가만히 있던 일행 쪽으로 걸어갔다.
“가자. 무학.”
“예.”
설천위에게 발끈했던 것이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얌전히 돌아가는 가무학.
‘다음에 보자.’
하지만 슬쩍 고개를 돌려 노려보는 것이 꽤나 귀여웠다.
“재미있는 놈들이네.”
“천위.”
“왜?”
“흑룡학관의 사람과 아는 사인가?”
“아니, 처음 보는데?”
설천위의 대답에 잠시 미간을 찡그린 철백은 일행과 함께 점점 멀어지는 성무경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상한 친구군. 나나 너에게 관심을 가지다니.”
“뭐, 그렇긴 하지.”
철백과 설천위는 익힌 무공(?)의 특이함 때문에 겉으로 그 무력이 드러나지 않는다.
얼핏 보기에 강해 보이긴 하지만 내공을 품은 고수 특유의 기세가 없으니 헷갈리는 거다.
처음부터 설천위를 무시한 가무학처럼.
가무학의 눈썰미가 나쁜 게 아니다.
알지 못하면 그리 판단하는 게 당연한 거다.
그런데도 성무경은 당연하다는 듯이 설천위를 바라봤고, 철백을 경계했다.
“눈이 좋은 놈인가 보지.”
“눈만 좋은 건 아닌 것 같지만요.”
유예린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룡학관에서 보낸 대(隊)의 대주야. 절대 약할 리가 없지.”
“그…… 아까부터 궁금했는데요.”
조심스럽게 손을 든 주현운이 설천위를 바라봤다.
“대주라뇨? 학관의 학생 아닌가요?”
“흑룡학관은 2학년이 되면 대(隊)에 들어가게 되어 있어. 그리고 모든 수업과 활동이 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해 못 한 주현운의 표정에 설천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럴 만하다.
“끔찍하지. 조별 과제가 기본이라니…….”
“예?”
아, 이게 아닌가?
“큼, 흑룡학관이 가장 중시하는 정신이 뭐게?”
“정신이요?”
“무림학관은 올바른 의(義)와 성숙한 협(俠)을 가치로 하지.”
그것을 합쳐 의협(義俠)이고, 이 의협은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나저나 철백, 넌 그걸 용케 알고 있네.
나도 게임에서 설정으로 봤으니 알지 학관 다니면서는 들어 본 적이 없는 얘긴데.
“……그건 헛소리 아닌가요?”
뾰로통한 서하영의 대답에 설천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개소리지.”
의와 협을 숭상한다면 계(癸) 같은 등급을 만들 리가 없지.
학생을 내쫓았다는 오명이 듣기 싫어 학생이 스스로 나가도록 똥통에 처박아 주는 것이 계(癸)니까.
의협을 외치는 이들이 만들었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치졸한 방식이다.
그런데도 그런 제도가 왜 있는가.
실력.
전부 실력 때문이다.
실력 지상주의에서 계(癸)는 물론이고, 학생을 열 단계로 나누는 계급제는 상당히 뛰어난 효과를 보인다.
내부에서 서로 경쟁을 할 수 있고.
성취감을 줄 수도 있으며.
저렇게 되고 싶진 않다는 경각심 또한 안겨 줄 수 있다.
그런 치열한 경쟁을 통해 무엇을 만들어 내고 싶은가?
속도다.
초기 발전이 빠른 사파의 무공에도 밀리지 않는 성장을 원하는 것이다.
어른들의 알량한 자존심이 아이들에게 조급한 성장을 강요하는 것이다.
정면에서 보면 이토록 어리석은 행보가 없다.
없는데…….
“개소리는 맞지만, 사실 이게 필요한 거거든.”
아쉽게도 정파 무림엔 현실을 정면에서만 바라보는 외골수만 있는 건 아니다.
현실을 다각도로 볼 수 있는 똑똑한 이들도 존재한다.
얼핏 보기엔 명분조차 없는 이 과격한 방식이 꼭 필요한 방법이란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왜?
흑룡학관은 엄격한 곳이니까.
무림학관이 정파라는 최후의 선을 넘지 못해 차마 하지 못하는 진짜 치열한 경쟁을 교육의 도구로 쓰는 이들.
시험을 치를 때 살인조차 허용하는 진짜 경쟁.
그런데 아직 미숙한 이들에게 그런 경쟁만을 강요하는 것은 정신의 붕괴를 부른다.
수많은 실패작을 만들어 내겠지.
그래서 흑룡학관이 선택한 것이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만드는 대(隊)다.
“살인조차 허용하는 시험과 수업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들.”
“그게 대(隊)라는 건가요?”
“그래.”
그리고 그 방식은 사파가 아직까지 남쪽에서 굳건히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 주고 있다.
학생 때부터 함께 성장해 위로 올라선 이들은 사천맹에 들어가서도 그 대(隊)를 그대로 유지한다.
대(隊) 자체가 단(團)에 들어가는 일은 많지만, 그 대(隊)가 해체되는 일은 거의 없다.
“대충 이해됐지?”
“음, 네. 그런데, 그래서 흑룡학관이 가장 중시하는 정신이 뭔가요?”
“아, 그거? 별거 아니야.”
진짜 별거 아니다.
“결속.”
* * *
“어땠지?”
“생각보다 더 강한 것 같던데요? 은검(隱劍).”
“그녀가 강한 건 당연한 소리지. 다른 이들 말이다.”
“잘 모르겠어요. 여자 둘을 제외하면 별거 없는 것 같던데요?”
“제가 보기에도 그랬어요.”
가무학의 의견에 동조하는 다른 대원을 보며 성무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이 보기엔 그런가.”
“대주가 보기엔 뭔가 다른가요?”
“너희는 아직도 사람의 눈을 보지 않는구나. 내가 누군가를 판단할 땐 누누이 눈을 보라고 일렀는데도.”
“죄송합니다. 사실 전 눈을 봐도 아직 잘 모르겠는뎁쇼.”
“쯧.”
능청맞게 웃는 가무학의 모습에 가볍게 혀를 찬 성무경은 다른 대원들을 바라봤다.
대놓고 동조하지 않지만 가무학의 의견에 동감하는 표정들이다.
“눈에는 마음의 빛이 깃든다. 심지가 단단한지 독한지 유약한지 판단할 수 있지.”
“하지만, 마음이 단단하다고 해서 강한 건 아니잖아요?”
“너희들에게 그런 부분을 보라고 하진 않는다.”
그런 섬세한 판단은 자신도 자신 없으니까.
“자신감.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봐라.”
“예?”
“그에 맞는 실력이 있다면 마땅히 경계해야 하고, 설령 그만한 실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경계하는 것엔 돈이 들지 않지.”
제 정신력이 드는데요.
차마 성무경의 말에 반박하지 못한 가무학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반박했다간 잘못하면 대련이란 명목의 폭력이 행사될 게 뻔하니까.
무엇보다.
“또 뭔가 보셨나 보네요?”
“아마 그 녀석들은 친선전에 나올 거다.”
“예?”
은검을 제외하면 절정이나 일류 수준이었던 것 같은데?
성무경의 안목을 익히 알고 있음에도 절로 의문이 드는 판단에 가무학이 놀라자 성무경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림학관에 머무는 동안, 그 녀석들을 예의 주시하도록.”
* * *
“그나저나, 공자는 가끔 이상한 것을 참 상세하게도 알고 계시네요.”
“응?”
무림학관으로 돌아가기 직전.
나름 유명한 음식점을 찾은 일행은 학관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그러고 보니 설 소협은 이상한 부분에서 상세히 알고 있죠?”
“뭐, 전엔 기억이 안 나니 뭐니 하셨던 것 같은데.”
“크흠.”
아니 뭐, 또 이야기가 그리로 흘러.
“흐음……. 참 신기해요. 그렇죠?”
“벼, 별로?”
“흐음?”
유예린의 눈빛이 참으로 묘한 것이…….
슬슬 축축해지려는 등줄기를 식히기 위해 설천위는 급하게 화제를 바꿨다.
“그 녀석들 무슨 일로 왔을까?”
“그러게요. 친선전까지는 시간이 꽤 많이 남아 있지 않나요?”
현운이 나이스!
즉시 호응해 주는 주현운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설천위.
그 모습에 유예린은 아쉬움이 담긴 눈으로 바라봤지만, 이내 바뀐 화제에 집중했다.
굳이 지금 캐물을 필욘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친선전에 앞서서 교류회 같은 걸 하러 온 것 아닐까요?”
“뭐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긴 하지?”
교류회.
뭐, 정파 내부에서 행해지면 적당히 논검(論劍)이나 하고 술이나 마시는 하하호호 즐거운 행사겠지만…….
“싸움이나 안 나면 다행일 텐데요.”
“수업을 같이 듣는 정도가 아닐까요? 적당히 비무 정도만 하고.”
“비무도 안 할 것 같은데요? 친선전 전에 전력을 노출시키기 싫은 건 양쪽 다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소윤혜의 말에 일행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네.
그나저나.
“쟤들은 왜 또 여기에 있을까.”
바로 학관으로 들어갈 것이지.
여기가 맛집인지는 어떻게 알고 왔데.
객잔 구석에 아까 봤던 적랑대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호오? 이게 누구신가? 그 유명한 적랑대 아닌가?”
너무나도 상투적인 말투로 시비를 거는 녀석도 옆에 있었다.
상대가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 표정 전체에서 여실히 느껴질 정도로 노골적인 시비.
어떻게 알아봤나 했더니 팔에 차고 있는 완장 때문이었다.
적랑대는 하나같이 천을 팔에 감아 놨는데, 그 천에 붉은 늑대가 수놓아져 있었다.
‘게임에서 봤을 땐 나름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사파의 무인들은 대부분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의 표식을 차고 다닌다.
팔이나 허리, 어깨, 머리 등등.
어디든 잘 보이는 곳에 걸어 자신의 소속을 공개적으로 알린다.
이유야 여러 가지 있지만 뭐, 대체로 경고다.
나는 이런 조직에 속해 있으니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물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역으로 시비를 걸게 되는 신호가 됐지만.
“아무래도 저들이 오는 건 꽤 유명한 이야기였나 본데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시비를 거는 걸 보면 그래 보이네.”
물론, 제정신은 아닌 것 같지만.
얼굴이 한껏 붉은 것이 상당히 취한 것 같다.
하긴, 그게 아니라면 흑룡학관의 대표로 오는 자들에게 저 실력으로 시비를 걸 리 없지.
일류?
술에 취해 움직임이 틀어지다 보니 이류로 보이기도 하고.
뭐가 됐든, 무림학관 내에서도 약한 축에 속하는 녀석이다.
그런데 이런 시비라.
“느긋하게 술을 마시는 걸 보니 내가 배알이 꼴리는군! 어떤가, 내가 주는 술이라도 받겠는가?”
저 새끼, 많이 취했네.
대체 무슨 흐름이냐.
히끅히끅 딸꾹질을 하면서 접근한 놈은 이상한 헛소리를 하고는 술잔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적랑대 네 명 중 유일한 여자에게 기분 나쁜 미소를 던졌다.
이곳엔 무림학관과 정파의 무인들이 가득하니 별 해코지는 당하지 않을 거란 자신감에서 나온 무모한 행동.
“소저는 미인이니 내가 친히 한 잔…….”
“저 수치도 모르는 것이…….”
단순히 시비를 넘어서는 모습에 기어코 철백이 일어선 순간.
“아쉽지만 오늘은 술을 먹는 날이 아니네.”
사내의 손을 가로막은 성무경이 날카롭게 빛나는 눈동자로 사내를 바라봤다.
“그러니 자네가 먹게나.”
성무경의 손가락이 가볍게 술잔을 친다.
“커헉!”
단숨에 날아간 술잔이 사내의 목울대를 가격한 것으로도 모자라 힘이 남았는지 사내의 몸이 미세하게 튀어 올랐다.
목이 부러져 죽었을지도 모르는 살수.
“놈! 어디서 살수를 쓰느냐!”
“더러운 사파 놈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사내의 일행인 듯 거침없이 일어나 검을 뽑는 이들을 보며 철백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러다 얘 흑화하겠네.
너희, 얘 사파로 가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냐.
“시비를 걸고 싶으면 목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지. 그것이 무림의 법도 아닌가?”
“오냐! 네 목을 우리가……!”
사파든 정파든 상관없는 무림의 법도.
담담한 성무경의 대답에 사내의 일행이 기어코 달려들려는 순간.
“그만!”
강렬한 중압감이 객잔 전체에 드리워졌다.
일류에서 이류 수준인 이들은 순간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강력한 중압감.
내공을 끌어올려 겨우 자유를 되찾은 이들은 자연히 목소리가 나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보는 내가 부끄러우니 그만해라. 아니면, 얘랑 싸우든가.”
한껏 흥분해서 서 있는 철백을 가리킨 설천위는 웃으며 성무경을 바라봤다.
“미안한데, 이해 좀 해 줘. 어딜 가든 모자란 놈들은 있는 법이잖아?”
설천위를 바라보는 성무경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