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109화-적랑대 (1)
“참, 한결같은 녀석이야.”
무림맹 지부에서 보내온 보고서를 받아 든 팽후는 웃으며 그것을 내려놨다.
“나갔다 하면 사건에 휘말리니, 이 정도면 저주받은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군.”
“그 정도예요?”
팽후의 말에 반대편에 앉아 있던 남궁선이 고개를 갸웃했다.
방학 기간, 자주 학관에 들르기 시작한 남궁선은 쉬는 시간엔 꼭 이렇게 학관장실을 찾았다.
이유는 맛있는 과자와 말 상대가 여기에 있어서.
“운명인가 싶을 정도지.”
첫 외부 시험에선 같이 간 조장이 공적을 가로챘다.
그다음 나간 산적 토벌에선 자신을 추살하러 온 이를 만나 죽을 뻔한 데다 목적인 산채에는 의문의 고수까지 있었다.
아마 유예린이 따라가지 않았다면 전멸했겠지.
그리고 또 외부 시험을 나가서 사파의 영역으로 갔다가 진짜 죽을 만큼 고생하고 남궁 가주의 손에 구해진다.
남궁천이 같이 간 덕에 벌어진 기적.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또 의문의 조직에게 공격당해 홀로 도주.
“……역신이 들었나?”
“그렇지? 옆에서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니까.”
“뭐, 그만한 일을 겪고도 살아남은 걸 보면 확실히 싹수는 보이네요.”
와작.
과자를 깨물어 먹으며 남궁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의 동생인 남궁천이 그런 일을 겪었다고 해도 목숨이 위험해질 만한 일들이었다.
그 기이한 능력을 쓰지 않으면 설천위가 얼마나 약한지 아는 남궁선의 입장에선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다.
본인에게 들은 적은 없지만, 아마 술법의 일종일 터.
거의 대부분의 술법은 시간제한이 있으니 한정된 시간만을 활용해 살아남았다는 소리다.
참 대단한데…….
“그래서, 돌아오고 있대요?”
“음, 해결하고 돌아오는 중이라고 하는데…….”
혹시 모르지.
또 무슨 일에 휘말릴지.
* * *
“그래서, 이렇게 경계하는 거예요?”
“어.”
“……저번에는 이유가 있었다면서요?”
“원한이란 건 말이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쌓이는 거야.”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설천위를 보며 서하영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 과한 걱정 아니에요?”
“아니. 우리가 어떤 놈들이 하던 일을 그대로 뒤집어엎어 버렸는데, 당연히 걱정해야지.”
딱 봐도 최소 몇 년은 준비해서 실행했을 계획인데, 그걸 뒤집어엎었다?
뒤통수 안 맞기 힘들다.
“주인님을 생각하면 안 올 것 같은데요.”
“어? 왜?”
“정신 차리니 그곳에 있긴 했지만, 가끔 모습을 드러내던 인간들은 하나같이 전부 술사였어요.”
술사가 무인을 향해 덤빈다?
거의 자살이나 다름없는 짓거리다.
술사도 물리력을 행사할 순 있지만, 효율이 크게 떨어진다.
그런데 이곳에는 초절정 고수가 하나.
절정 고수도 가득하다.
술사 몇으로 뚫어 낼 수 있는 무력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주력인 술법조차 설천위보다 강하다는 보장이 없는데 공격해 올 리가 없다.
“과한 걱정이에요.”
“흠.”
일리가 있어.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공격이기에 기습이라 부르는 거지!”
즉, 헛다리를 짚었다고 할지라도 예상하고 대비하면 기습 따윈 없다!
이번에도 일에 휘말려 학관에 늦게 도착한다?
절대 싫다.
노숙은 기본일 것이고, 끝없는 전투가 이어질 텐데 그런 개고생은 사양이다.
아무리 성장이 중요해도 사람이 쉴 땐 쉬어야지.
무엇보다 학관에 돌아가면 남궁선이라는 훌륭한 선생님이 정기적으로 과외를 해 준다.
이런 데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
애초에 목표했던 일행의 영안 개안은 성공했으니 더 이상 미련을 가질 필요도 없다.
실전이 확실히 성장 속도를 빠르게 하지만, 하드코어 모드에서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최대한 안전하게! 최대한 빠르게 귀가할 거야!”
[쯧쯧, 연인을 노숙시키기 싫은 게 아니고?]
천마의 혀 차는 소리는 가볍게 무시했다.
그냥 노숙하기 싫은 것뿐이니까.
아마도.
* * *
“틈이 보이질 않습니다.”
“……빌어먹을 놈.”
부하의 보고에 남자는 오랜만에 욕설을 내뱉었다.
악귀들을 정리하고 하룻밤을 쉰 녀석들은 그대로 산을 내려갔다.
게다가 내려가자마자 바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 도사들을 데리고 가장 가까운 무림맹 지부로 가서 후도를 넘긴 뒤에야 헤어졌다.
헤어진 도사들을 공격하는 건 화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동.
그렇기에 남자는 결국 설천위를 계속 미행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설천위가 데려간 삼귀(三鬼)가 둘이다.
하나라도 회수하거나 아니면 둘 다 제거할 필요가 있다.
‘설천위이란 놈의 아래에서 성장하면…… 큰 방해가 된다.’
설천위 본인은 무력이 강하니 제거할 수 없겠지만, 악귀 정도라면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대체 왜 저리 경계를 하는 거냐.’
설천위를 중심으로 생전의 경지가 상당히 높아 보이는 혼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다.
술법으로 먼 거리를 유지하지 않았다면 관찰은커녕 추적도 힘들었으리라.
“……최대한 관찰하다가 도저히 안 될 것 같으면 포기한다.”
“예.”
부하들을 보내고, 나무 위에 선 남자는 저 멀리 걸어가는 설천위 일행을 보며 혀를 찼다.
괴물 같은 놈.
하지만, 알게 됐으니 됐다.
알고 있다면, 방법은 어떻게 해서든 모색할 수 있을 테니까.
* * *
“……진짜 아무 일도 없었네.”
무림학관을 지척에 둔 길 위.
설천위는 아무런 방해도 없이 도달한 현 상황에 찝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분명, 뭔가 있는데.
무언가가 우리를 노리는 것 같은데, 왜 아무 일도 없지?
“공자.”
“응?”
“이제 슬슬 도착할 때가 됐으니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진짜 아무 일도 없었다.
너무 아무 일도 없어서 경계하는 설천위를 두고 놀고 있는 자신들이 미안해질 정도.
뭐라도 있었으면 설천위의 노력이 보답을 받았을 테니 이렇게 미안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유예린의 말에 격하게 공감을 표하는 서하영을 보며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원래 막판에 방심하면 뒤통수 맞고 가는 거야.”
그게 세상의 이치요, 진리지.
어떻게 아냐고?
겪어 봤으니까!
남궁천, 그 녀석이랑 돌아오는 길에 겪어 봤으니까!
“철귀, 그 미친놈도 무림학관 앞에서 대놓고 납치를 했는데, 악귀들을 모아서 그 짓거리를 하는 놈들이 철귀만큼 안 미쳐 있겠어?”
“……그건 좀 설득력이 있네요.”
작게 고개를 끄덕인 유예린은 눈을 감고 기감을 펼쳤다.
조금 반성이 된다.
그날, 방심해서 실수를 저질렀던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유예린의 표정이 변하자, 다른 일행의 표정도 변했다.
그리고.
“……반응이 너무 다른 거 아니야?”
왜 내가 하면 호들갑이고, 유예린이 하면 신중한 거야?
취급이 너무 다르잖아?
“그야 설 소협의 생각은 이해하기 힘드니까요.”
“가끔 알아듣지 못할 말도 많이 하고.”
“나는 나름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야.”
“저도요!”
이것이 남자의 의리구나!
서하영과 소윤혜의 평가에 나름 천위를 옹호해 주는 두 남자.
그 의리에 설천위가 감탄하려는 순간.
“……왜 눈이 돌아가 있냐?”
“아, 아닌데?”
“별거 없는데요?”
거짓말을 잘 못 하는 두 남자의 눈이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당황해서 대답도 이상하게 하네, 이 새끼들.
특히 철백.
너에 대한 배신감이 심하다.
알려 주면 알려 주는 대로 곧잘 따라 하던 주제에.
[껄껄껄, 피곤하긴 해도 이런 경계심은 무림에서 꼭 필요한 마음가짐이니라.]
“음.”
“예! 할아버지!”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소윤혜.
심지어 목소리도 꽤 커진다.
소윤혜가 볼 수 있게 된 뒤로 완전히 할아버지 모습으로 변한 소백진이 웃으며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림에는 상상도 못 할 악의가 넘치니, 그것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법을 익혀야 하느니라.]
“예!”
아이고, 당차다.
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저렇게라도 만날 수 있다는 건 감격할 만하지.
죽어서 혼이 된 존재들은 대부분 긴 시간을 이승에 머물러 있지 못한다.
자식에게 미련이 남아도, 자신이 그대로 있으면 오히려 자식을 해치게 될 것이란 걸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며칠 정도는 지켜보더라도 결국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악귀가 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높은 정신력과 자아를 가진 이들.
즉, 최소 초절정 이상의 존재들이 아니면 악귀가 되지 않고 저렇게 혼으로 버티는 건 상당히 힘들다.
듣자 하니 소윤혜의 부모님은 무공을 익히긴 했어도 일류 수준이었다고 하니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하셨겠지.
그런 와중에 할아버지라도 이렇게 남아 계시니 저리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이해는 간다.
“공자는 알아서 잘하니까 너무 믿고 있는 거 아닐까요?”
설천위의 입이 부루퉁해지자, 부드럽게 웃으며 유예린이 설천위를 다독였다.
최근 설천위의 행동이 여러모로 어른스러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애 같은 부분이 남아 있다.
이건 천성인가?
옛날에는 정말 심했지.
옛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 지은 유예린이 그렇게 설천위를 다독이던 순간.
[천위.]
누군가의 부름에 설천위의 표정이 단숨에 변했다.
일행의 장난에 함께 어울리던 표정에서 단숨에 경계심을 품은 표정으로.
순식간에 변하는 설천위의 표정에 일행들의 표정도 변하는 그 순간.
“이런, 너무 경계하는 거 아닌가?”
끈적한 살기가 묻어 있는 목소리가 일행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다만, 이상한 점은 그리 짙은 살기와 달리 목소리는 밝기 그지없다는 점이다.
[살인에 익숙한 놈이구나.]
천마의 평가에 설천위는 단숨에 이상함을 이해했다.
살인이 즐거운, 그런 미친 인간이라는 것을.
“뭐냐.”
한껏 경계심을 끌어올린 설천위를 잠시 바라보던 남자는 고개를 돌려 유예린을 바라봤다.
설천위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없는 무시.
“진짜는 너구나?”
“……누구시죠?”
설천위가 무시당했다는 것을 눈치챈 유예린은 한층 날카로워진 기세로 남자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런 유예린의 표정에도 남자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에이, 너무 경계하지 마. 어디까지나 친분을 쌓기 위해 온 거니까.”
“……친분?”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의문의 조직을 경계하던 설천위가 미간을 찡그렸지만, 남자는 그런 설천위를 아예 눈에 담지도 않았다.
노골적이고 완전한 무시.
하지만 설천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딴 걸 신경 쓸 이유가 없거니와 일단 눈앞에 닥친 상황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하지만, 설천위가 스스로 무시당하는 것에 내성이 있는 것과 달리, 한 사람은 내성이 없었다.
“불쾌하군요. 아주 많이.”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는 유예린.
그녀의 눈빛엔 이미 차가움밖에 담겨 있지 않았다.
“휘유~, 화내는 모습도 예쁘네?”
날카로워진 유예린의 눈빛에도 남자는 히죽거리며 웃었다.
여유.
[꽤나 실력이 있는 아이구나.]
설천위를 무시한 것은 그 실력을 읽어 냈기 때문이고.
유예린에게 말을 건 것도 그 실력을 읽어 냈기 때문이다.
“정말 예쁘네!”
……외모에 혹한 것뿐인 듯하지만.
“예의라곤 전혀 없는 분이시군요. 자기소개를 먼저 하는 게 인사의 기본 아닌가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유예린에게 남자의 칭찬은 그저 무의미한 칭찬일 뿐이었다.
아무리 들어도 전혀 기쁘지 않은, 그런 찬사.
“이런, 내가 마음이 급해서 실수했네. 너무 예뻐서 그만.”
하지만 여전히 히죽거리며 웃는 남자는 포권과 함께 자신을 소개했다.
“흑룡학관 적랑대(赤狼隊) 소속 가무학이라고 하오.”
장난스럽게 점잔을 빼는 목소리.
그 안에 담긴 목소리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나쁘게 말하면 이쪽을 향한 무시로 가득했고.
“무림학관의 유예린…….”
“오! 은검(隱劍)?”
유예린의 소개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말을 끊어 버리는 그 태도에 철백이 나서려는 그 순간.
“무례하다. 무학.”
유쾌하게 웃던 가무학의 표정이 일순 굳더니 몸을 숙인다.
“실례했습니다.”
동시에 포권과 함께 물러나는 가무학.
그 모습에 놀란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방금 나타난 사람에게로 향했다.
“적랑대의 대주, 성무경이라고 하네.”
누가 봐도 가무학의 윗사람으로 보이는 청년, 성무경.
그의 시선은 정확하게 설천위를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