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108화-그만 좀 나와라 (3)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은 오로지 하나.
살아남고 싶다.
그걸 위해 강해지고자 했고.
강해지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인간이 자신을 보고 품는 공포가 힘이 된다는 것을 안 뒤로는 그들이 가축을 기르듯 인간을 영역 안에 두고 길렀다.
화전민이라 불리는 자들은 아무리 무서워도 산에서 내려가지 않는 이상한 자들이었지만, 덕분에 원하던 울타리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있다.
자신이 만든 영역도.
자신이 만든 공포도.
‘도망쳐야 해.’
하지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무언가를 잃으며 겪게 된 첫 분노조차 잠재웠다.
괴(乖)는 그런 존재니까.
나는 살아야 하는 존재니까.
살아 있지 않으면, 나는 존재할 수 없으니까.
왜 살아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 따윈 모르겠다.
그저, 살아 있어야 하기에 살고자 한다.
그러니 도망치자.
저 괴물에게서.
“아쉽구나.”
[끼릭.]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괴는 고개를 돌렸다.
누구?
아니, 어떻게?
“내 황궁에서 너를 주워 왔지만, 살고자 발악하는 나약한 놈들의 기질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어.”
아쉽다는 감정이 짙게 밴 목소리.
“지배하는 쪽에 가까워진 것 같긴 하다만 아쉽구나.”
정말로 아쉽다.
“도망치기만 해선 패자(霸者)가 될 수 없다.”
저 복마전인 황궁에서 진짜 권력을 손에 쥐는 이들은 그 하나하나가 패자(霸者)의 기질을 지니고 있다.
설령 그것이 학문이나 다른 영역의 재능일지라도, 적어도 자신의 분야에선 절대적인 존재감을 뿜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안 된다면?
둘 중 하나다.
굴복하든가, 죽든가.
“너는 아무래도 굴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 같구나.”
실패작이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저 괴물 같은 녀석이 오지 않았다면 성공했을 확률이 높은 녀석이었다.
하지만 뭐가 됐든 결과는 결과.
가정 따윈 의미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마지막 기회를 주마.”
험한 일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듯한 부드러운 손이 괴의 머리에 닿는다.
그 순간, 괴는 이 상황의 이상함을 깨달았다.
왜 나는 움직이지 못하지?
왜 나는 저항하지 못하지?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가득 찬 순간.
“부딪혀 이겨 내라. 그것이 너의 양식이 될 것이다. 허나, 그러지 못한다면…….”
비틀린 미소.
그 미소의 의미를 괴는 알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매우 기분 나쁜 미소라는 것이다.
그렇게, 괴의 의식은 끊어졌다.
* * *
[끼릭.]
“아, 이것 보소?”
의식을 되찾으니 눈에 들어온 것은 짜증이 가득 담긴 얼굴이었다.
귀찮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
“왜 자꾸 오냐.”
도를 쥔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인간.
그 괴물 같은 인간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인간의 앞에 있지?
그런 의문과 함께 괴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이미 도망가기에는 늦었다.
이 거리는 도저히 이놈에게서 도망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니까.
분신이긴 해도 혼을 나눠 주었던 녀석이 아무런 대처도 못 하고 당한 상대다.
도망친다고 해도 금세 잡히겠지.
그러니 최대한 발악하자.
“……흐음?”
날카롭게 변한 괴의 눈빛에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오로지 분신만을 움직일 정도로 조심스러웠던 녀석이 갑자기 본체로 온 것도 이상한데, 그 행동은 더욱더 이상하다.
차라리 굴복하기 위해 온 것이라면 모르겠으나, 저리 독기를 품은 눈빛이라니.
이상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뭐가 됐든 저쪽에서 적의를 품고 다가온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지배할까, 죽일까.”
고민해야 할 건 이거지.
빈틈을 노리기 위해 신중하게 자신을 관찰하는 괴를 보며 설천위는 짧게 고민했다.
어떻게 할까.
“저는 지배가 좋다고 생각해요.”
“이유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건, 주인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청아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사람을 지배하는 종류의 힘은 그 자체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심지어 수많은 분신까지 다뤘으니 단순히 사람을 지배하는 능력은 아니라는 소리겠지.
뭐가 됐든, 참으로 탐나는 능력이긴 하다.
잠시 고민하던 설천위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해 볼까.”
지배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넝쿨째 굴러 들어온 기회이니 시도 정도는 해 봐도 나쁘지 않겠지.
* * *
“청유야.”
“…….”
대답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제.
그녀를 바라보며 청백은 그들이 바라보던 광경을 가리켰다.
도를 놓은 채 달려든 설천위가 괴의 턱주가리를 갈기고 있었다.
“가능하겠느냐?”
“무리.”
그렇겠지.
무려 귀(鬼) 등급의 악귀다.
백(魄)이나 원(怨)과 달리 진짜배기 술사들이 달려들어야 겨우 제압하거나 소멸시킬 수 있는 악귀.
그런 녀석을 이미 하나 제압해서 지배하에 뒀는데, 또 하나를 지배한다?
무리다.
아마 수령원 내부에서도 과연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저쪽도 무리.”
청유의 말에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본 청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여인, 청아.
그녀가 악귀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충격이란.
술사인 자신들의 이목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둔갑술에 뛰어나다는 증거다.
아마 그 급은 못해도 원(怨)의 끝자락, 조금만 더 성장하면 귀(鬼)에 이르는 수준이겠지.
“지금 당장 만귀단에서 데려가겠다고 와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군.”
게다가 악귀들을 제압한 저 술법까지?
괴물이다.
말도 안 되는 괴물.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청백은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뭐, 사람이란 것이 자신의 재능에 맞게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면 되는 거지.
남과 비교해서 얻는 건 상처뿐이다.
이미 상처뿐인 마음을 숨기며 청백은 후도를 바라봤다.
어느새 상당히 약해진 녀석.
일단, 이 녀석을 봉인해 데려갈 생각을 하자.
가장 가까운 지부로 가면 맹의 본부까지 인도할 술사가 있을 테니.
* * *
“……그래서 제압하셨다는 건가요?”
“어.”
생각보다 쉽게 제압한 괴를 데리고 후도의 앞에 선 설천위는 유예린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발악하긴 했지만, 몇 대 처맞고 패기로 누르니 금세 굴복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온 건지 모르겠네.
“일단 여기는 대충 마무리된 것 같네.”
“네. 모였던 악귀들도 전부 정리했어요.”
설천위가 삼귀(三鬼)를 상대하는 사이, 일행도 열심히 악귀들을 마무리했다.
어차피 흑관에 붙잡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놈들이라 마무리는 손쉬웠다.
“기이한 감각이에요.”
“오, 뭐야. 개안한 거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영역(靈域)은 이미 후도를 중심으로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다른 악귀들은 전부 정리했으니까.
약해진 후도는 영역을 광범위하게 유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그 덕분에 원래라면 슬슬 잘 안 보이기 시작해야 하는 할배들을 유예린을 비롯한 일행은 똑똑히 보고 있었다.
영안이 개안됐다는 증거다.
“좋네. 이것만으로도 한 걸음 더 나아간 거야.”
“공자 덕에 이런 이점이 있네요.”
[흠흠, 우리가 좋은 스승이긴 하지.]
암영의적의 대답에 설천위는 피식 웃었다.
“가장 쓸모없는 아저씨가 뭐라는 거예요.”
[어허, 내 신법이 분명 천하일절이거늘!]
“생전이라도 유 매랑 싸웠으면 졌을 양반이.”
[그, 그건 싸움을 피하는 군자로서의 내 품격이……!]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암영의적을 가볍게 무시하며 설천위는 다시금 후도에게 집중했다.
상당히 약해져 있다.
독기는 거의 다 뺀 상태라고 해야 하나.
상당히 얌전해지기도 했고.
“……흐음?”
잠깐.
“무슨 일이십니까?”
“잠깐만.”
한창 봉인을 준비하던 청백은 묘하게 변한 설천위의 눈빛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대체 뭘 하려는 거냐.
“……얘도 데려가?”
“예?”
그게 무슨 개소리야?
“봉인하는 것보다 그냥 내가 제압해서 데려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게 가능합니까?”
“이 정도로 얌전해진 걸 보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진지한 눈빛으로 고민하는 설천위.
그 모습에 청백은 헛웃음을 흘렸다.
악귀를 왜 봉인하는가.
단순히 소멸시키기 불쌍해서?
아니다.
지배하거나 소멸시킬 힘이 부족해서다.
봉인은 그나마 쉬우니까.
그런데 지배를 저리도 쉽게 입에 담다니.
이 무슨 오만함…….
‘……아니지, 자신감인가.’
할 수 있는 걸 하겠다고 하는 것은 오만한 것이 아니니까.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청백.
뭐가 됐든 일이 쉬워지면 그걸로 만족…….
“에이, 됐다.”
“아씨.”
자꾸 오락가락하네, 이 인간?
차마 무서워서 눈을 부라리진 못하고 속으로 작게 화를 내며 청백은 설천위를 바라봤다.
“어떻게 하시고 싶은 겁니까?”
“그냥 봉인하자. 얘 다루기 귀찮을 것 같으니까.”
구부주귀(久腐洲鬼)라는 이름은 일종의 말장난이며 경고다.
구주(九州)는 천하를 의미한다.
옛날에 이 땅을 아홉 개의 주로 나누어 불렀기 때문이다.
부귀(富貴)는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음을 말한다.
천하가 부유하더라도.
오래되어 썩으면 구주를 뒤덮는 귀신이 되니.
이 녀석은 이 천하에 가득한 인간이 품은 욕망의 결정체다.
결코 사라지지 않고, 결코 사그라지지 않는 불멸의 존재.
데려간다고 한들 제대로 써먹으려면 온갖 고생을 해야 할 터.
전문가에게 맡기는 편이 여러모로 좋다.
“그럼 봉인하겠습니다.”
설천위의 변덕에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청백은 착실하게 봉인 준비를 끝내고 봉인을 시작했다.
온갖 부적을 땅에 붙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후도의 몸 곳곳에도 가득 붙였다.
“삿된 존재의 쇠락, 검은 연못의 가뭄, 호황의…….”
이상한 주문을 외우며 봉인을 시작하는 청백.
그 모습을 보며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흑관을 따라 한 술법을 쓰는 자신이 할 말은 아니지만 어딘가의 사신들을 연상시키는 주문이다.
백화단주에게 배울 때 어떻게든 저 주문을 생략하려고 노력 많이 했지.
그래서 두 개밖에 못 배운 거지만.
도저히 남들 앞에서 외울 용기가 안 나서 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봉인을 시작한 청백을 관찰하며 설천위는 상태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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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설천위
나이: 16세
레벨: 5
근력 中下
체력 中下
순발력 中下
지력 中下
정신력 中中
내공 中下
영력 中中
패기 上下
독기 下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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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영력은 中中에 머물러 있다.
여러모로 악귀들의 처리를 일행에게 양보했으니 뭐, 이건 예상했던 부분이긴 한데…….
독기.
얘는 예상 못 했는데.
후도의 독기를 흡수해 몸 안에서 해독하는 작업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스탯이 생길 정도인가?
이거, 뭐 이러다가 독기 다루려고 사천당가 출신의 귀신도 데려와야겠어.
실없는 생각을 하며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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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기 제어(毒氣制御)(下下)(一星)
-숙련도 1/100
독기를 제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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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스킬을 얻었으니 사천당가 사람을 굳이 데려올 필요는 없겠지.
그래도 덕분에 새로운 능력을 얻었으니 나쁘진 않다.
영력을 성장시키지 못한 건 아쉽지만 뭐, 이 정도로 만족하자고.
“돼, 됐다!”
상태 점검이 대충 끝나 자리에서 일어나니 환호성이 들려왔다.
살펴보니, 후도가 있던 자리에 푸른 상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걸 진짜 성공했네.
심지어 저 작은 상자에 밀어 넣었어?
능력 좀 있는데?
뭐, 그럼 일단 대충 해결이 됐으니까…….
“좀 쉬자!”
와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달렸으니 이제 좀 쉬자!
* * *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마을 사람들을 챙긴 후 객잔으로 향하는 설천위 일행을 보며 비후는 미소 지었다.
“계획의 끝, 네가 나타난 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그 끝에 도달했을 때가 기대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