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107화-그만 좀 나와라 (2)
굶주림과 추위.
몸이 약한 처와 자식이 넘기엔 너무나도 높았던 언덕.
결국, 그 언덕을 넘은 것은 사내뿐이었다.
평범한 농민이었던 사내가 무기를 손에 쥔 것은 그래서였다.
분노를 쏟아 내지 못하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굶주림의 원인은 사내가 농사를 잘 못 지어서가 아니었다.
부패한 관리가 그들이 먹어야 할 식량까지 전부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갈취해 갔기 때문이다.
비리를 저지르다가 생긴 구멍을 막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명목으로 돈을 뜯어 낸 것이다.
산에 들어가 산적이 되었고, 무기를 손에 쥐고 사람을 죽였다.
처음 사람을 죽인 날, 사내는 깨달았다.
농사일에 도움이 되던 타고난 힘이 사람을 죽이는 백정 짓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그렇게 사람을 죽이고 또 죽이던 나날.
현실은 너무나도 비정했다.
원수의 머리를 쪼개기도 전에 관군에게 붙잡혀 목이 잘렸다.
노골적으로 관리들을 노린 탓에 관군이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그렇게 깊은 원념을 품고 목이 베인 사내는 악귀가 되었다.
관리를 저주해 죽이고.
자신의 목을 벤 처형인을 저주했다.
이성은 흐릿해지고, 오로지 살심만이 가득해졌다.
스스로를 되찾았을 때는 이미 웬만한 도사들도 건드릴 수 없는 악(惡)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였다.
자신을 붙잡고자 왔다 하는 남자에게 순순히 잡혀 준 것은.
그곳으로 가면 더 이상 사람을 죽일 일은 없을 것 같았으니까.
“잡념이 가득하네.”
그런 사내의 눈앞에 짝다리를 짚은 채 서 있는 이가 보였다.
소년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앳된 외모.
자신의 아들이 장성했다면 저랬을까?
아니, 자신의 아들은 자신을 닮았으니까 저리 미남일 리는 없겠네.
[……꺼, 져, 라.]
최소한의 이성.
자식 정도 되는 아이를 죽이고 싶지 않다는 마지막 이성이 부(剖)의 발걸음을 막았다.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살심과 본능으로 이곳까지 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두 가지에 휘둘려 막무가내로 도끼를 휘두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슬슬 한계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야?”
시뻘게진 두 눈.
몸 전체에서 풍겨 나오는 살기(殺氣).
누가 봐도 지금 당장이라도 도끼를 휘두르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새다.
“너무 참는 것도 안 좋아.”
피식 웃으며, 설천위는 도를 꺼냈다.
마음에 든다.
“일단, 싸우고 시작할까?”
* * *
“가능?”
“끄응, 해 봐야지.”
설천위가 부(剖)와 겨루기 시작한 사이.
흑관에 봉인된 후도의 앞에 선 청백은 청유의 물음에 곤란함을 감추지 않았다.
감춘다고 뭐가 될 것도 아니고.
“내가 봉인이 특기라는 건 대체 어떻게 안 건지…….”
“아마 모르고 부탁했을 걸요?”
“예?”
어느새 옆에 다가온 유예린의 목소리에 청백은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아니, 그런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맡긴답니까?”
“머리는 좋은데, 생각은 짧은 사람이라서요.”
“……뭐, 그래 보이긴 하네요.”
유예린의 솔직한 평가에 청백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부터 울리는, 공간이 떨릴 정도의 금속음.
도끼와 도가 부딪히면서 나는 무식한 소리다.
저만큼 잘 싸우면 생각이 좀 짧아도 뒷수습이 가능할 테니까.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조금 짐작이 가네요.”
“예?”
“저렇게 강하니 생각이 좀 짧을 만하네, 그리 생각하신 거죠?”
후도의 상태를 관찰하며 작게 웃는 유예린의 모습에 청백은 입을 다물었다.
정확하게 읽혔으니까.
그 모습이 오히려 대답이 됐기에 유예린은 빙긋 웃었다.
“설 공자는 작년까지 낙제생이었어요.”
“……예?”
“무림학관에서 나가라는 의미로 주는 계(癸)였죠.”
최근엔 너무 강해져서 많은 사람들이 까먹고 있지만, 설천위는 원래 밑바닥이었다.
뭐, 사실 지금도 영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무인으로서의 면모만 보면 겨우 일류에 턱걸이할 정도의 실력이지만…….
“재능이 아니라 노력만으로 극복해 낸 거예요. 저 무공 실력은.”
“…….”
“그러니 사람들 대부분이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죠.”
최고는 될 수 없어도 최선은 다할 수 있다.
무의식중에 그리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렁하고 근시안적이며 비현실적인 사고지만, 희망을 향해 달린다는 점에서는 그리 나쁘지 않은 사고라고 생각한다.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겁니다.”
“최선의 결과는 타협으로 정하는 게 아니고요?”
“잘 아시네요.”
끝까지 온 힘을 다한 뒤의 결과가 최선이지, 이게 최선이라고 멈춘 결과가 최선은 아니다.
말귀를 잘 알아먹는 청백의 대답에 유예린은 웃으며 몸을 돌렸다.
이쪽은 이제 전문가들이 알아서 잘해 줄 테니 저쪽을 볼 차례다.
“압도적이네요.”
[당연한 결과지.]
유예린의 말에 대답한 건 천마였다.
그녀를 대신해 아까 전부터 설천위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삼귀(三鬼)라고 칭하기엔 부족함이 많은 것 같은데요.”
[그건 저놈이 너무 괴물 같아서다.]
“맞아요!”
천마의 말에 격렬하게 동의하는 청아.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유예린은 가슴속에서 간질거리는 질투심에 시선을 돌렸다.
……곁에 항상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조금 아니, 상당히 거슬리긴 하는데.
부하일 뿐이니 참아야 했다.
청아의 외모가 진짜 여자도 혹할 정도로 예쁘긴 하지만, 설천위는 외모 따위에 마음이 흔들리진 않을 테니까.
……아마도.
“크흠, 그럼 딱히 문제는 없는 거죠?”
[저 녀석을 제압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구나.]
문제는…….
고개를 돌린 천마는 머리를 싸매고 있는 청백과 그 앞에서 울고 있는 후도를 바라봤다.
저 녀석을 봉인하거나 소멸시킬 방법이 문제다.
어떤 종류의 방법을 써야 소멸시킬 수 있을지 찾는 데만도 한세월이 걸릴 터.
여기서 당장 해답을 찾을 순 없을 거다.
설천위도 그래서 봉인을 부탁한 것일 테고.
부탁이라기보다는 명령이었지만.
[크아아아아아아!]
“오, 드디어 막바진가요?”
잠깐 생각에 빠져 있던 천마는 청아의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결국 설천위의 도가 부(剖)의 가슴을 베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설천위는 손속이 잔인한 편에 속한다.
원래 약한 사람이 전투를 하면 후환을 생각해 손속이 더욱 잔인해지기 마련.
상대가 자신에게 다신 무기를 못 들이대게 하려고 팔을 자른다거나 다리를 자른다거나 하는 악독한 손속을 보이게 된다.
전통 있는 상승 무공을 가진 정파가 손속이 자비로운 이유는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거의 하루살이처럼 피어나는 사파는 여유가 없기에 손속이 잔인하다.
기질로 따지면 설천위는 정파보단 사파에 더 가깝다.
그런데, 왜 악귀를 상대로 저리 손속을 아끼지?
그냥 팔다리를 베어 버리면 그만인…….
[저놈이?]
순간 설천위의 의도를 깨달은 천마가 미간을 찡그리고, 설천위의 도가 드디어 부(剖)의 도끼를 튕겨 냈다.
완전하게 드러난 승패(勝敗).
상대가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어쩔 수 없이 패배를 인정한 순간.
설천위가 원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었다.
[패령안(覇靈眼)]
패기를 한껏 머금은 두 눈동자가 빛난다.
부를 응시하는 눈에 깃든 패기가 단숨에 부의 심령을 꿰뚫는다.
혼을 굴복시키고, 의지를 꺾는다.
부의 두 무릎이 땅에 닿고, 두 눈에 가득했던 혈기가 가라앉는다.
주문으로 억지로 피워 낸 혈기를 강제로 찍어 누른 것이다.
동시에.
“역시, 마음에 들어.”
그 본질조차 꿰뚫어 본다.
부의 본질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것을 꿰뚫어 본 설천위는 웃으며 도를 거뒀다.
“언제까지 악의(惡意)에 휩쓸릴 거야?”
한 손을 내밀며 웃는 설천위.
“마지막으로 한 번쯤은 자신의 의지로 도끼를 휘둘러 봐야지?”
너, 내 부하가 돼라.
* * *
“……그래서 부하로 삼았다고요?”
“어. 쓸모 있어 보이잖아? 쟤는 좀 약하기도 하고.”
“저, 저도 나름 강하거든요?”
삼귀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강한 편인데!
괜히 괴의 영역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사람을 빼돌릴 수 있었던 게 아닌데!
억울하다는 듯 자기주장을 하는 청아를 가볍게 무시한 설천위는 아직도 머리를 싸매고 있는 청백을 바라봤다.
거, 봉인 하나를 못 하고.
그런 설천위의 시선을 눈치챈 청백은 결국 한숨과 함께 그에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제 실력으론 제대로 된 봉인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
그건 상당히 아쉬운데.
“무림맹에 요청을 넣어서 파견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데.”
무림맹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오려면 한세월은 걸릴 거다.
그걸 기다렸다간 너무 늦게 돌아간다.
영력을 키우고 일행의 영안을 개안시키는 건 중요하지만 당장 준비해야 할 친선전도 중요하다.
특히, 이곳의 일행 전부가 친선전에 나가야 하니 빨리 돌아가서 수련에 매진해야 한다.
일정이 조정 중이긴 하지만 갑작스럽게 다음 학기에 친선전이 열릴 수도 있으니까.
웬만하면 내년에 한다고 하긴 했지만.
여하튼, 그러니 일단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바쁘시다면 이곳은 우리에게 맡겨 주셔도 됩니다. 다른 악귀들만 전부 정리해 주신다면 이 악귀 하나를 살피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하다.
끝까지 말하진 않았지만 청백이 말하려는 의도가 너무 뻔했기에 유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이 맞겠지.
보아하니 저 후도라는 악귀를 묶은 천위의 술법도 상당히 오래갈 것 같고.
나머지 악귀들이야 아까부터 일행이 정리하고 있었으니 천위가 손을 쓰기 시작하면 금세 정리될 거고.
일단 여기는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아니아니, 그거 절대 안 될 선택지지.”
“예?”
“내가 떠나면, 이 꼴을 만든 놈들이 찾아오겠지? 그럼 너희는 죽고 그놈을 뺏기겠지? 그럼 지금껏 내가 한 고생은 물거품이 될 테고.”
그게 무슨…….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들이 지키지 못할 거라고 말하는 설천위의 말에 청백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설천위는 그의 표정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너무나도 뻔한 클리셰 아닌가.
게임에서도 이쯤에서 떠난다는 선택지가 떴으면 절대로 안 떠났을 거다.
그런 방심이 다 뒤통수를 아릿하게 만드는 거라고.
“무엇보다 저 흑관이 얼마나 갈지 장담할 수가 없어.”
애초에 내가 만들어서 실전에서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인 술법이다.
솔직히 이렇게 오래 유지되고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
흑관의 봉인이 풀리면?
청백과 청유는 속절없이 밀릴 거고, 이 마을은 전멸이다.
이 마을을 지키겠답시고 싸우다가 두 사람 다 죽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
“쯧,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네.”
“예?”
“내가 봉인할 수 있는 수준까지 만들어 줄게.”
자고로 사람마다 특기가 다 다른 법.
연주는 할 수 없지만 편집은 잘하는 사람이 연주하는 척할 수 있는 것처럼.
봉인은 할 수 없지만 폭력은 잘 쓰는 사람이 봉인하는 척할 수 있다.
어떻게?
“으랏차!”
이렇게!
당황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설천위의 주먹이 흑관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후도의 턱을 후려갈긴다.
동시에.
[독기 흡수(毒氣吸收)]
부서져 흩어지는 액체에서 독기를 빨아들인다.
그다음 체내에서 [해독(解毒)].
두 가지를 함께하면서…….
“으샤!”
[그으어어!]
부순다!
독기만 빨아들이는 거니 소멸까진 못 시키겠지만 엄청나게 약하게 만들 순 있을 터.
저 두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까지 만들면 그다음 선택지가 보이겠지.
그렇게 확신을 품은 설천위가 열심히 주먹을 휘두르던 그 순간.
[끼릭.]
“……응?”
들려선 안 될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젠 진짜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끼릭.]
“씁.”
아씨.
휘두르던 주먹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는 설천위.
그곳에서 거적때기로 몸 전체를 감싼 무언가가 보였다.
“그만 좀 나와라. 좀.”
집에 좀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