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105화-그건 그쪽 사정이고 (12)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유예린이었다.
자신이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믿기 힘든 현실을 부정하기보다, 몸의 반응이 더 빨랐다.
단숨에 거리를 벌리는 것과 동시에 상대를 경계한다.
섣불리 공격해 자극하지 않고 최대한 거리를 벌려 그 움직임에 대응하고자 했다.
허나, 거리를 벌리는 과정에서 달려드는 악귀들로 인해 유예린은 어쩔 수 없이 남자에게서 시선을 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주 잠깐.
눈 깜짝할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이쪽도 훌륭하군.”
그런 그녀의 지척에 도달한 남자는 웃으며 유예린을 칭찬했다.
“진행 정도가 어떤지 궁금해서 찾아왔더니, 요즘 애들은 우리 때보다 더 뛰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빙긋 웃으며 유예린을 바라보던 남자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해 도를 휘두르는 이를 바라봤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짧은 물음과 함께 도가 남자의 목을 베고 지나간다.
일격.
단숨에 목이 잘린 남자의 머리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지만, 목을 자른 당사자인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악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 않나?”
설천위의 물음에 웃으며 대답하는 사내.
잘렸던 머리가 어느새 자라나 있었고, 허공으로 떠올랐던 머리는 사라진 상태였다.
“참으로 아쉽군. 이런 분신 따위를 보내는 게 아니라 직접 갔어야 했는데.”
진심으로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남자는 자신을 잔뜩 경계하는 설천위를 보며 한 걸음 물러났다.
“저쪽부터 신경 쓰는 게 낫지 않겠나? 자네에겐 아직 여러모로 신경 쓸 게 많은 적일 텐데.”
남자가 가리킨 곳에선 이곳저곳이 터져 나갔던 후도가 떨어진 액체들을 모아 빠르게 몸을 재생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설천위가 먼저 지치게 될 확률이 높은 상황.
초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흐트러진 후도는 지금이 몰아붙이기에 딱 좋은 순간이긴 했다.
하지만.
“일의 경중 정도는 파악할 수 있으니 신경 끄지?”
“하하하하! 확실히 수령원의 머저리들보단 똑똑한 것 같구나.”
정확히 자신을 바라보는 설천위를 보며 남자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지. 내가 이곳에서 너희를 해할 일은 없을 거다.”
그렇기에 남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약속했다.
내가 이곳에서 너희를 공격할 일은 없을 거다.
그러니 하던 일을 마저 해라.
나는 그것을 보고 싶으니.
그 안에 담긴 의도가 너무나 뚜렷해서 설천위는 오히려 미간을 찡그렸다.
저 말에 믿음이 간다는 것이 짜증 났다.
“……유 매, 내 곁으로.”
“알겠어요.”
유예린이 설천위의 곁으로 붙자, 주변에서 상황을 살피던 이들도 눈치껏 뭉치기 시작했다.
악귀들을 정리하기 위해 흩어져 있던 이들이 모이는 모습에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파 무림이 살아남은 것은 너희 같은 이들이 있어서겠지.”
서로를 믿고, 서로를 위해 움직이는 이들.
이들이 정파 무림의 뿌리이자 기둥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아쉽구나. 너무나도 아쉬워.”
남자의 눈에 짙은 슬픔이 깔렸다.
그 안에 담긴 슬픔이 흘러나와 주변을 잠식할 것만 같은 그런 짙은 슬픔이.
‘……아니, 진짜 흘러나오고 있는데?’
남자의 몸을 중심으로 흘러나오는 기묘하리만치 서늘한 기운에 설천위는 더욱더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평범한 중년 정도로 보이는 외모.
얼굴은 잘생긴 축에 속하나, 한번 보면 눈을 못 뗄 정도의 미남은 아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장발은 손질되지 않은 채 대충 늘어져 있다.
입고 있는 푸른 도복을 보면 무당파가 아닐까 의심되지만, 푸른 도복은 무당만 입는 옷이 아니다.
그러니 확신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이상해.’
도복을 입고 있으며, 긴 장발을 늘어트린 남자.
게임 속에선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나 기질이 묘하게 기시감이 든다.
분명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을 정도의 존재란 소린데…….
의식 깊은 곳에 잠시 넣어 뒀던 기억이 떠오르며, 순식간에 기묘한 위화감에 매치시킨다.
그리고 생각보다 결과는 빨리 나왔다.
“……비후(悲吼)?”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 한마디.
허나, 설천위가 무심코 내뱉은 그 한마디에 남자의 표정이 일변했다.
슬픔으로 가득 찼던 눈동자에 놀람이.
주변을 좀먹던 한기(寒氣)에 온기(溫氣)가.
“허, 누구에게 들었느냐?”
한층 부드러워진 음색.
아이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
그 순간, 이유 모를 편안함을 느낀 유예린은 자신도 모르게 설천위를 바라봤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이대로 저 남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그렇게 유예린이 설천위를 바라본 순간.
설천위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개수작 부리지 말지?”
불쾌감으로 가득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비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구나. 내 심언(心言)을 견뎌 내는 아해를 보는 건 오랜만이구나.”
“맞나 보네.”
비후의 말에 확신을 얻은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이곤 경계를 풀었다.
“후.”
“공자?”
갑자기 경계를 푸는 그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유예린의 부름에 설천위는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됐어. 신경 안 써도 돼.”
“예? 하지만…….”
저런 존재를 그냥 두자고?
아무리 분신이라고 자신의 입으로 말하긴 했지만, 고위 술사는 설화에 나오는 도사나 다름없는 존재들이다.
분신으로 충분히…….
“봉인 당해 제 힘을 못 쓰는 놈이야. 분신 따위론 별거 못 해.”
확신.
당당하기 그지없는 설천위의 목소리에 유예린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들으면 된다.
일단 여기선 설천위를 믿자.
그렇게 판단한 유예린마저 자신을 향한 경계를 풀자, 비후는 헛웃음을 흘렸다.
“대체 뭐 하는 놈인지 모르겠구나.”
내가 봉인 당했다는 것을 아는 자는 극히 드물거늘.
무림학관의 애송이 따위가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닐 터인데.
가만히 설천위를 바라보던 비후는 이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그저 웃으며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정말 괜찮은 거냐?]
비후를 뒤로한 채 다시 후도에게 가던 설천위는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어요.”
술사는 생각보다 물리력이 정말 약하다.
영체나 죽은 자에게는 엄청난 공격력을 가지고 있지만, 산 자를 상대로 그 공격력은 1할 이하로 급감한다.
혼을 다루는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술법에도 큰 재능을 가졌지만 설천위가 무림학관에 남은 이유가 그거다.
무림의 절반 이상이 무인이다.
당연히 적의 절반 이상도 무인이다.
그런 무인을 상대하려면 높은 경지의 무공은 필수다.
심지어 무공의 경지가 높아지면 술법을 조금 첨가하는 것만으로도 영적인 존재들과 싸울 수 있으니 무공은 반드시 일정 경지 이상으로 익혀야만 한다.
“분신 따위론 우리 일행을 못 건드려요.”
영적인 존재의 봉인 혹은 제압이라면 몰라도 산 사람을 상대할 순 없다.
봉인이 풀린 후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그렇게 어느새 재생이 거의 끝난 후도의 모습에 미간을 찡그린 설천위가 걸어가던 그 순간.
“그 아이들은 우리의 계획이다.”
“그래서?”
“방해하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뜬금없는 경고에 설천위는 고개를 돌려 비후를 바라봤다.
아직도 잔잔히 웃고 있는 모습에선 따스한 기운이 흘러나온다.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일종의 술법이 자연스럽게 새어 나오고 있는 거다.
그렇기에 기분이 더럽다.
자신의 감정을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불쾌하다.
“그건 그쪽 사정이고, 나는 내 사정이 있으니 신경 끄시지?”
“흠.”
짜증이 담긴 설천위의 대답에 비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군. 그렇다면 나는 물러나도록 하지.”
너무나도 고분고분한 태도에 설천위가 다시금 미간을 찡그리려는 순간.
“하지만, 저 아이들은 아닐 테니 조심하게나.”
비후가 가리키는 방향.
그곳에서 피어나는 기묘한 기운에 설천위의 몸이 굳었다.
[그륵 그륵.]
요동치는 후도의 몸체.
[키에에에엑!]
[키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는 악귀들.
“천위! 상태가 이상해!”
다급한 철백의 외침에 설천위는 비후가 있던 곳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사라지고 없는 비후.
그렇다면 저 녀석의 짓인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분신이다.
무언가 술법을 펼쳤다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즉.
“다른 놈들이 있다! 전부 뭉쳐!”
또 다른 놈들이 뭔가 손을 썼다.
그리 판단한 설천위는 즉시 일행을 모았다.
원래 함께했던 이들은 물론이고, 청백과 청유까지.
하나로 뭉친 일행을 보며, 설천위는 넓게 기감을 펼쳤다.
사람의 인기척이라면 유예린이나 주현운 같은 애들이 훨씬 더 잘 느끼겠지만, 영혼의 기척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인근의 악귀들은 물론,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는 악귀들의 기척까지 하나둘 감각 안으로 들어올 때쯤.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없다.
기묘한 기운이 피어났던 곳에 아무도 없었다.
이미 일을 마치고 떠났다는 소리.
설령 기운을 숨기는 것이 능숙해 느끼지 못한 거라고 하더라도 결과는 똑같겠지.
“하, 진짜.”
그냥 악귀들을 잡아서 영력이나 올릴 생각으로 온 거였는데, 이게 무슨 개고생이냐.
[키릭 키릭.]
[케륵.]
기묘한 울음과 함께 서서히 거리를 좁혀 오기 시작하는 악귀들.
이미 이성 따윈 깔끔하게 날아간 눈동자에는 찐득한 욕망만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륵 그륵.]
그건 거대한 몸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후도도 마찬가지였다.
말 그대로 폭주.
사실 원래라면 폭주고 나발이고 그냥 때려잡아서 정리하는 길을 선택했겠지만…….
‘짜증 나게 하네.’
이들을 폭주시킨 이들의 존재로 인해 그리 마음 놓고 움직일 수 없게 됐다.
막무가내로 움직였다간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하다가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
철백의 몸 상태도 별로 좋지 못하고, 유예린과 소윤혜는 아직 제대로 영안을 개안하지도 못했다.
뭐 반쯤 개안한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이긴 하지만.
“씁.”
빠르게 생각을 이어 가던 설천위는 결국 짧게 호흡을 마시며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공자?”
갑작스러운 행동에 유예린이 고개를 갸웃하고, 청백과 청유가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순간.
설천위는 품에서 종이 하나를 꺼냈다.
그런데 그게 그냥 종이가 아니었다.
기이한 문양이 그려진 부적.
“……에?”
“응?”
너무나도 도사 같은 모습에 유예린이 당황했고.
그 부적의 내용을 파악한 청백과 청유의 눈이 놀람으로 크게 떠지는 순간.
가슴까지 부적을 들어 올린 설천위는 가볍게 부적을 털어 던졌다.
“박도(縛道).”
설천위의 목소리에 청백은 더욱 미간을 찡그렸다.
설천위가 던진 건 술법의 기초 중의 기초인, 면을 활용한 결계를 펼치는 부적이다.
도저히 묶는다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술법에 쓰일 만한 부적이 아닌…….
“흑관(黑棺).”
순간, 세상이 검게 물들었다.
* * *
“흠.”
나무 위.
설천위를 비롯한 이들이 있는 곳에서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앉은 비후는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린 채 턱을 괴었다.
“재미있는 아이야.”
영적인 재능이 차오르다 못해 넘치고 있는데, 왜 무공 따위를 배우고 있는 걸까.
참 오랜만에 제자로 맞이하고 싶은 아이를 만났지만, 자신의 이름까지 알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도저히 제자로 받긴 힘들 것 같아 한 걸음 물러났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제대로 권유해 봐야지.
그나저나.
“백화단주인가?”
저런 기이한 술법을 가르쳐 준 것은.
영롱하게 반짝이는 비후의 눈동자.
그 눈동자에는 설천위를 비롯한 일행을 완전히 감싼 검은색의 상자가 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