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99화-그건 그쪽 사정이고 (6)
[크우오오오!]
괴성을 지르며 떨어지는 주먹에 유예린은 옆으로 몸을 날렸다.
웬만하면 막고 반격을 노리거나 아니면 한 끗 차이로 피한 후 반격을 하겠지만…….
‘쉽지 않네요.’
땅에 큼지막한 구멍을 내는 저 주먹에 그런 위험한 도박을 할 순 없었다.
무엇보다 이쪽의 공격이 너무 안 통하는 게 문제다.
‘이 영역이란 것, 참으로 번거롭네요.’
움직임을 제약하는 건 물론이고, 내공의 사용 또한 둔해진다.
기를 두른 공격만이 적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데, 외부로 발출한 기를 갉아먹어 약화시키니 힘의 소모가 급격히 커진다.
애초에 무기에 두르는 검기나 도기 같은 것은 회수하는 걸 전제로 사용하는 것이니까.
회수하냐 아니냐에 따라 전투 지속력 차이가 너무 크기에 기(氣)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수준이 되면 스승에게 반드시 배우는 부분이다.
그런데 그런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니, 이 영역이란 것이 무인에게 얼마나 까다로운 것인지 새삼 절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흡!”
[크륵?]
팔뚝을 훑고 지나가는 검기에 거대한 원숭이, 거원(巨猿)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검기가 훑고 간 자리로 쩍 벌어진 상처에서 고통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습에 정작 충격을 받은 건 검기를 날린 소윤혜 쪽이었다.
‘위력이 곱절 이상 약해졌어.’
원래라면 상처 정도가 아니라 최소 뼈를 반 이상 잘랐어야 할 공격이다.
그걸 이토록 쉽게 막다니.
미간을 찡그린 소윤혜는 이내 도를 들어 몸의 전면을 지켰다.
그 순간, 아득해지는 충격이 전신을 뒤흔든다.
놈이 휘두른 주먹이 만들어 낸 강렬한 충격.
하지만…….
“흡!”
버틸 수 없다.
하체가 약하기에 이런 방어는 그녀와 맞지 않으니까.
하지만 잠깐.
아주 잠깐이면 된다.
서걱.
무언가가 베이는 소리와 함께 거원의 팔 하나가 잘려 나갔다.
“후우…….”
나지막이 호흡을 뱉어 내는 유예린.
그녀의 손에서 나간 비수가 뼈 근처까지 파고들었던 상처를 더욱 파고들어 완전히 베어 낸 것이다.
소윤혜를 공격하던 팔은 멀쩡한 팔이었지만, 반대쪽이라곤 해도 팔 하나가 잘려 나갔다.
거원이 괴성과 함께 몸을 비틀자, 그 틈을 타 소윤혜가 얼른 몸을 빼냈다.
그리고 그런 소윤혜를 따라가지 않는 거원을 마주하는 유예린.
“그래 봤자 짐승이지요.”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하나, 그래 봤자 짐승이다.
그 움직임에는 치밀한 계산 따윈 없었고, 섬세한 의미도 없었다.
자신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드는 주먹을 상체를 비트는 것으로 피하며 유예린은 검을 휘둘렀다.
* * *
“잘 싸우네.”
“문제없겠군.”
유예린과 소윤혜의 싸움을 지켜보던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재능이 있다.
점점 공격에 영력이 깃들기 시작한 걸 보니 얼마 안 가 영안을 개안할지도.
재능이란 게 참 무서워.
“두 사람은?”
“문제없더군.”
다른 쪽에 나타난 악귀를 맡은 주현운과 서하영의 상태를 확인하고 돌아온 철백의 대답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현운, 걔는 거의 개안 직전이던데.
두 사람이 함께라면 문제없긴 하지.
서하영은 애초에 영안을 개안한 상태라 영적인 존재랑 싸운다고 해서 손해 보는 부분이 거의 없으니까.
조금 더 마음이 편해진 설천위가 다시 유예린과 소윤혜의 싸움에 집중하려는 순간.
“……죄다 괴물들이시네요.”
“뭐, 기본이지.”
갑자기 나타난 청아의 평에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아직도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곤 몸을 돌렸다.
“그래서, 알아왔어?”
“아무래도 정리가 좀 됐나 봐요.”
“정리?”
썩 좋지 않은 느낌인데.
청아의 말에서 느껴지는 묘한 느낌에 설천위가 미간을 찡그리자 청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게도, 설천위의 감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삼귀(三鬼)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아요.”
삼귀(三鬼).
청아가 미리 꼽아 놓은, 절대 접근해선 안 될 악귀 셋이다.
후도(朽塗), 부(剖), 괴(乖).
이 셋이다.
그나마 괴(乖)는 영역이 넓고 상성이 좋아 가끔 그 먹잇감을 빼먹긴 했지만, 셋 다 그 본체와 마주해선 안 된다.
특히, 후도.
“그 괴물은 애초부터 사람에겐 관심이 없었어요.”
보이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괴물.
다른 둘도 본체와 마주하면 살아날 확률이 크게 줄어들지만, 후도는 한없이 영에 가까워진다.
말 그대로 괴물.
괴물 중 괴물.
“먹어 치워 자신의 덩치를 키우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녀석인데, 평소에 조용하던 괴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 같아요.”
“괴(乖)라면 맨 처음에 우리에게 이상한 인형을 보낸 그놈을 말하는 거지?”
“네.”
괴(乖).
본체는 움직이지 않고, 오로지 분신만을 움직이는 악귀.
심지어 이 녀석은 힘을 쌓는 방식조차 독특하다.
“마을에서 보셨다던 광경, 무조건 괴의 짓일 거예요.”
확신이 담긴 청아의 말에 설천위도 고개를 끄덕였다.
얼추 상황이 맞아 보이니까.
“사람의 공포를 이용해 힘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건가?”
“괴가 넓은 영역을 가진 이유가 그것이니까요.”
마을은 식량 창고고, 영역은 그 식량 창고를 두기 위한 부지인가.
청아의 말에 괴에 대한 평가를 내린 설천위는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부(剖)라는 놈은?”
“그게…… 사실 제대로 본 적이 없어요.”
“없어?”
왜?
그런 의문이 떠올랐지만, 설천위는 청아의 말을 기다렸다.
조급하게 물어봤자 다그치는 것밖에 안 되니까.
“원랜 한자리에 가만히 있고, 그 존재에 혹한 놈들만을 잡아먹던 악귀여서요.”
“근데 왜 부(剖)라고 부르는 거지?”
쪼갤 부(剖).
무엇을 쪼개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을지 대충 짐작은 가지만…….
그래도 확실히 하는 게 좋으니까.
설천위의 물음에 청아도 그 뜻을 눈치채곤 고개를 끄덕였다.
“다가오는 존재 전부의 머리를 그냥 쪼개 버려요.”
약하면 몸까지.
그야말로 이성이 없는 살인 기계나 마찬가지다.
“다만, 원래 이 산에 있던 존재인지 아니면 그놈들이 데려온 존재인지는 모르겠어요.”
“그 정도로 강한가?”
“네.”
청아의 솔직한 의견에 설천위는 잠시 고민했다.
뭐가 됐든, 청아는 셋 모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부라는 놈도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일 터.
“그래서 생각하는 대처는?”
“솔직히 말하면 일단 빠지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요.”
“빠져서 상황을 살펴보자?”
“그러다 보면 저희를 이곳에 푼 놈들이 나타날 테니까요.”
푼 놈들이 나타날 거다.
그 말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리고 그놈들은 이곳에서 살아남은 놈을 제압해 데려갈 정도의 능력이 있을 거고.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
간단하다.
삼귀(三鬼)에 환귀가 없어서다.
설천위가 기억하기론 이 근방에 자리 잡은 악귀는 환귀다.
그런데 지금 그게 없고 후에 나타난다는 말은, 지금 숨어 지내던 놈이 나중에 자리를 잡고 성장했다는 소리다.
즉, 그 환귀도 상대가 안 되는 놈들을 그 조직은 제압해서 수족으로 부릴 능력이 된다는 소리다.
‘거기에 후도라는 놈, 게임에서 봤던 그 녀석이랑 비슷한 것 같단 말이지.’
아직 성장이 덜 끝나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이름은 달랐다.
하지만 존재가 변함에 따라 이름이야 달라질 수 있는 거니 의심해 볼 여지는 충분하다.
그리고 만약 생각하는 바로 그놈이 후도라면.
“막아야지.”
“예?”
“더 크기 전에 막아야 해.”
그 미친 괴물이 풀려나게 둘 순 없지.
“그럼, 천위 일단 휴식을 취하는 게 어떤가?”
“음,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서 곧바로 사건에 휘말려 산을 뒤졌다.
거기에다 지금은 전투까지 치렀으니 아무리 체력이 좋은 무인이라고 해도 지칠 수밖에 없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심지어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기까지 했으니 지치는 건 당연한 일.
“마침 끝난 것 같네.”
소윤혜의 도가 거원의 목을 치는 것을 끝으로 전투가 끝났다.
두 사람보다 먼저 끝낸 서하영과 주현운은 진즉에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고.
“일단, 좀 쉬러 가자.”
* * *
작은 객잔.
산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돌아온 일행은 가능한 음식이라곤 소면과 만두뿐인 객잔에 자리를 잡았다.
애초에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려고 했지만, 여러 사건에 휘말린 덕에 이제야 찾아왔다.
“그래서, 그 셋을 모두 없앨 거라는 건가요?”
“어. 아무래도 지금 안 하면 나중에 더 귀찮아질 것 같아서.”
“흠, 그건 그렇겠죠.”
고개를 끄덕인 유예린은 잠시 고민하는 듯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악귀들을 풀었다고 하는 이들에 대해 짐작 가는 바가 있으신가요?”
“씁, 아직 없어.”
뭐, 사실 얼추 알고 있다.
게임에서 몇 번이나 나왔으니까.
문제는 어떤 조직인지 알고는 있어도 그 본거지의 위치나 정확한 조직도, 구성원 같은 건 전혀 모른다는 점이다.
아무리 그래도 게임에서 그런 쓰잘데기 없는 정보를 상세하게 알려 주진 않으니까.
그냥 어디쯤에 임무가 있었으니 그 근처에 있겠거니 하고 짐작만 하는 수준이다.
“흐음? 혹시라도 정확히 알게 되면 알려 주세요.”
“……그래.”
거, 속이기 힘드네.
마지못해 기다려 준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면 상당히 부담스럽단 말이지.
“그럼 일단은 휴식을 위해 방을…….”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일행의 모습에 철백이 먼저 말을 꺼내고 있는 와중에.
“음?”
“응?”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들을 발견한 일행의 표정이 묘해졌다.
하지만 그런 일행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들어온 이들은 검을 찬 설천위 일행을 보며 포권으로 인사했다.
“이런 산골에서 무림의 동도분들을 뵙게 될 줄은 몰랐소이다. 본도는 화산의 청백이라고 하오. 아, 이쪽은 제 사제인 청유라고 합니다.”
담담하고 예를 잃지 않는 인사.
사형 쪽이 남자, 사제 쪽이 여자다.
문제는 두 사람 다 도사라는 점이다.
심지어 사제인 청유 쪽은 미모가 상당한 것이…….
“……아는 사람?”
“……아닌데요.”
도사의 모습으로 철백을 속였던 청아가 입술을 삐쭉이며 부정했다.
아니, 이런 곳에 있을 법한 사람은 도사뿐이니 그렇게 변장했을 뿐인데.
청아의 부정에 일행이 살짝 안도하는 사이, 그나마 무림의 예의와 법도에 밝은 유예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근방에서 남색의 도복을 입고 소매에 매화를 수놓으며 여자를 도인으로 받는 도문이라면 하나뿐이다.
“화산의 영웅분들이시군요. 저는 무림학관에서 나온 유예린이라고 합니다.”
“오, 무림학관의 분들이셨군요. 저와 사제는 수령원(修靈院)에서 수학 중인 이들입니다.”
수령원.
술법계의 무림학관으로, 백화단(白花團)과 만귀단(萬鬼團)의 인원은 거의 대부분이 수령원 출신이다.
즉.
“이 인근에서 날뛰는 악귀들을 제압하러 오신 건가요?”
“알고 계셨습니까?”
이 분야의 프로란 소리다.
희소식에 일행의 표정이 밝아졌고.
“마침 잘됐습니다. 저희도 여러모로 상황이 복잡해진 상태인지라…….”
“음, 아까부터 느껴지던 불길한 영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 이건 얘기가 좀 통하나?
알고 있다는 듯 대답하는 청백의 대답에 설천위가 웃는 순간.
“불길하기 짝이 없는 기운이 산 전체에 요동치니 이건 필시 대요괴의 등장을 의미하는…….”
아.
텄네.
[기(氣)의 구분조차 안 되는 녀석이구나.]
[미숙한 고로.]
나름 영력을 다룬다는 놈이 저 산에 수많은 악귀들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못 느껴?
얘는 쓸모없다.
순식간에 기대감을 접은 설천위는 두 도사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끼잉.]
“오, 다 먹었냐?”
만두를 다 먹고 자신의 다리에 턱을 부비는 청랑을 들어 올린 설천위는 무릎 위에 놓고 청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 순간.
[왕!]
……응?
처음 듣는 개소린데?
순간, 자신의 앞에서 헉헉거리는 개를 발견한 설천위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 뒤에 서 있는 청유를 보곤 웃었다.
“야, 너도?”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