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98화-그건 그쪽 사정이고 (5)
“……살벌하네.”
철백이 어떤 여자의 품에 안겨 있는 걸 발견하고 분명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는데…….
제정신을 차리자마자 창을 던질 생각부터 하다니.
얘, 진짜 무서운 애라니까.
눈에 불을 켜고 달려 나가는 서하영의 뒤를 따르며, 설천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설 공자.”
“응?”
“제 비수는 입으로 막을 수 없을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던지겠단 소리야?
바람피우는 걸 보는 순간, 면상에 비수를 던져 버리겠다고?
철도 뚫어 버리는 비도술로?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경고에 설천위는 전방을 주시했다.
“철백이 잘못했네!”
[친구를 팔다니, 비겁한 놈.]
뭐, 저항 못 하고 딴 여자 품에 안겼으면 그것도 잘못이지.
여기서 철백을 옹호했다간 내가 간다.
“거기까지.”
그러니 지금 필요한 건 주제를 바꾸는 거다.
“어머? 왜 그러시나요?”
“에헤이, 알면서?”
도망치려는 여도사의 앞을 빙긋 웃는 설천위가 막아섰다.
물론, 그녀 따윈 안중에도 없는 서하영은 철백의 입에 물린 창을 회수하며 울먹이고 있었지만.
“이, 이……!”
울기는 싫은지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는 서하영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슬금슬금 움직이고 있는 여도사를 바라봤다.
“도망치다 걸리면 모가지다?”
“…….”
“알잖아. 못 도망가는 거.”
빙긋 웃는 설천위의 눈동자가 묵빛의 기운을 품고 일렁였다.
[패령안(覇靈眼)]
영체에게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눈동자는 여도사의 심령을 압박했다.
“어디 하나 망가져야 눈 돌리는 걸 멈추려나?”
“……어차피 죽을 거라면 발악이라도 하고 죽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에이, 아닌데? 너 못 죽는데?”
입꼬리를 올리며 설천위가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거리를 좁힌다.
어느새 그녀의 앞에 도달한 설천위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두 눈을 마주한다.
“얘들은 좋아서 나랑 함께 있는 걸까?”
설천위와 두 눈이 마주친 순간.
여도사의 시선은 빨려들듯 그의 두 눈으로 향했다.
그리고 보이는 것.
[빌어먹을 놈.]
[끄아아아아아!!]
보인다.
황폐한 대지 위.
망가진 몸으로 바닥을 기고 있는 이들이.
설천위가 의도적으로 열어 보여 준 그의 심상 세계.
동시에.
덜덜덜.
사지가 떨린다.
고통 받는 놈들?
나름 무섭긴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의 머리 위.
심상 세계의 하늘에 위치한 존재.
번뜩이는 노란 눈동자를 마주한 여도사는 떨리는 몸을 가라앉히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 순순히 얘기할 준비는 됐나?”
“……사, 살려는 주나요?”
“그건 일단 이야기를 들어 봐야 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여전히 상쾌하게 미소 짓고 있는 설천위지만, 여도사는 도저히 따라 웃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 * *
이름은 요(妖).
그녀는 사람을 홀리는 요괴다.
낭인으로 살아간다.
그녀는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당연히 남자들이 꼬이고, 얽히고 얽히는 관심 속에서 그녀는 여러 남자들을 만났다.
사랑을 품고 다가오는 이들에겐 그에 맞는 사랑을.
욕정을 품고 다가오는 이들에겐 그에 맞는 욕정을.
베풀고, 갈취한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남자 몇의 정기를 갈취해 죽이면 성을 떠난다.
이름을 바꾸고, 살짝 외형을 바꿔 살아간다.
그것을 반복하고 반복하며 살아가는 존재.
그것이 요(妖).
아름답지만, 허상과도 같은 존재.
“정말 나쁜 놈들만 먹었어요!”
“흠.”
[아무래도 진짜 같구나.]
“저, 정말이에요!”
무릎을 꿇고 비는 여도사, 요의 모습에 설천위는 턱을 쓸었다.
뭐, 일단 그렇게 강한 녀석 같지 않긴 한데 그렇다고 약한 녀석 같지도 않네.
대충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요의 발악에 일단 결정을 보류하기로 한 설천위는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는 서하영을 바라봤다.
“그…… 서 매 괜찮소. 나라도 목이 꿰뚫리면 죽겠지만, 괜찮소.”
“으아아앙! 죄송해요!”
상황 파악이 끝나 오해가 풀린 서하영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서하영을 놀리는 게 상당히 재미있는지 철백이 그녀를 계속 놀리고 있었고.
소동물 모드에 들어간 서하영은 놀리는 맛이 쏠쏠하지.
저 철백조차 놀릴 정도니까.
유예린도 살짝 근질근질한 것 같네.
“그나저나, 넌 왜 여기에 있냐? 다른 놈들도 있는 것 같던데.”
“고독(蠱毒)이에요.”
“……고독?”
“정확히 말하면 고령(蠱靈)이라고 해야 할까요?”
영들을 모아 상잔(相殘)시켜 특출 난 하나의 악령을 길러 낸다.
요의 설명에 유예린이 심각한 얼굴로 설천위를 바라봤다.
“공자, 저희들은 빠져야 하지 않을까요?”
요의 설명대로라면, 이곳에 풀린 악귀만 다섯이 넘는다.
그것도 요가 알고 있는 숫자가 다섯이지 그 이상일 확률이 구 할이 넘는다.
아무리 설천위라도 짐이 되는 사람을 다섯이나 데리고 싸우는 건…….
너무 큰 부담이다.
그런 의미가 담긴 유예린의 시선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적이 많으니 이쪽도 많아야지.”
“하지만…….”
“괜찮아.”
짐이 되기 싫은 유예린의 걱정을 일축한 설천위는 담담한 얼굴로 요를 바라봤다.
“너도 이곳에 있기는 싫다는 거지?”
“당연하죠. 저는 애초에 이곳에서 강해질 수 없는 존재인데요.”
먹잇감이다.
발악하다가 먹혀 다른 존재를 강하게 만들기 위한 먹잇감.
슬픔이 담겨 있는 두 눈동자에 설천위는 유심히 그녀를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서, 죽일 마음은 안 든다.
외모에 혹해 다가오는 남자에게서 정기를 갈취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위험하지만…….
‘아랫도리에 이성이 져 버린 놈들이 뭘 잃든 그건 자기 책임이고.’
듣자 하니, 강제로 하려 하지 않는 남자는 정기만 좀 빨아들이고 끝이라고 하니 딱히 죽일 필요까진 없어 보인다.
‘……괜찮군.’
[패령안(覇靈眼)]을 통해 그녀의 혼을 꿰뚫어 본 설천위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체가 있다는 건 좋지…….”
여러모로 활용 방도가 쏠쏠하다.
호위로 쓴다든가, 심부름꾼으로 쓴다든가…….
“……공자?”
“응?”
“실체가 있다는 건 좋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서늘하게 빛나는 눈동자.
그 눈동자를 마주한 설천위는 깨달았다.
아, 잘못 말하면 비수가 내 주둥이에 꽂히겠구나.
“써, 써먹기 좋다는 거지! 저 할배들을 봐. 여러모로 제약이 많잖아?”
“흐음? 제가 생각하는 그런 방식은 아니지요?”
“무, 무슨 방식? 난 잘 모르겠는데?”
“……좋아요. 넘어가 드리죠.”
살았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설천위는 헛기침을 했다.
“그럼, 살려 줄게. 대신 알지?”
“……네.”
설천위의 말에 작게 고개를 떨군 요는 천천히 앞섶을 옆으로 벌리…….
“야! 그거 말고!”
다급히 요의 팔을 붙잡은 설천위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흐음.”
어느새 비수를 손에 쥔 유예린이 계속해 보라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얘 데려가는 거 맞나?’
잘못하다가 내가 죽을 것 같은데?
씁, 그래도 데려가야지.
쓸모가 얼마나 많은데.
“종속 계약. 저기 쟤처럼 따라다니라고.”
“……어차피 밤이 되면 요구하실 거 아닌가요?”
“안 해, 이 자식아!”
“약속이죠?”
“어!”
“알겠습니다.”
장난스러운 미소.
그 미소에 설천위는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이거 일부러 그런 거지.
이 자식, 어지간히도 남자가 손대는 게 싫은가 보네.
유예린을 바라보는 눈빛이, 만약 자신을 건들면 그냥 가서 꼰질러 버리겠다는 눈빛이다.
그 눈빛에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요의 팔을 붙잡던 손을 풀고 그 머리에 손을 올렸다.
“짐승과 사람은 구별해라. 난 사람이다.”
“……네.”
“그럼 물을게. 네 이름 좋으냐?”
“예?”
“요라는 이름, 마음에 드느냐고.”
요(妖).
아름답다는 뜻을 지닌 이 글자는 허깨비, 괴이하다 등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즉, 이해하지 못할 존재라는 의미의 이름.
설천위의 물음에 요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정신 차리니 그리 불리고 있었을 뿐, 마음에 들진 않네요.”
인간 세계에 살면서 수많은 이름을 썼지만, 마음에 들진 않았다.
본래의 이름도, 가명도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는 아닌가?
요가 잊고 있던 옛날 기억을 떠올릴 때, 설천위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어떻게 태어났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럼, 지금부터 청아(淸芽)라고 부르마.”
“……예?”
맑은 싹이라니.
그게 무슨…….
“수많은 악행 속에서도 더럽혀지지 않은 네 혼을 나는 믿는다.”
[패령안(覇靈眼)]은 패기로 제압한 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언뜻, 탁하게 변한 혼 안에서 홀로 맑은 중심.
그 근본이 선하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마치 누군가가 심어 놓은 것처럼 맑디맑은 새싹 하나가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
“네 안에 누군가가 심어 놓은 새싹이 너를 살린 거다.”
“……아.”
순간, 누군가를 떠올린 듯 낮게 탄식한 요, 아니 청아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흐를 듯 말 듯 일렁이는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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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淸芽)(中中)가 소환수로 등록됩니다.
청아가 자신의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친밀도가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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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부하 하나 겟이다.
* * *
“요가 잡혔습니다.”
“벌써?”
부하의 보고에 가만히 산 아래를 바라보던 사내는 미간을 찡그렸다.
요는 도주와 기만에 특화된 악귀.
그리 쉽게 잡힐 녀석이 아닌데?
괴(乖)가 만들어 낸 영역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무인을 빼돌리던 녀석이다.
압도적인 불리함 속에서도 제 살길을 찾아가던 녀석.
그만큼 훌륭한 먹이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쯧, 괴의 상태는?”
“분신들이 전부 막혀 주춤한 것 같습니다.”
“겁쟁이 놈.”
분신이 아니라 본체가 움직였다면, 하나 정도는 확실하게 잡았을 텐데.
미간을 찡그린 사내는 한숨을 내쉬곤 다시 산 아래의 상황을 살피는 데 집중했다.
요가 허무하게 붙잡힌 것은 아쉽지만, 상황이 나쁘지 않다.
“움직이는군.”
거대한 흐름.
요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흘러넘친 기묘한 힘에 이 근방에 풀어 놨던 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먹잇감을 빼앗기 위해 움직이는 다른 존재들을 감지하면 괴(乖)도 본격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이번에 들어온 먹이는 참 크군.”
이번 먹이를 끝으로, 끝내도록 할까.
* * *
흑귀(黑鬼)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자신을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어떻게?
갑자기 괴(乖)가 움직인 것을 느끼고 몸을 움직이긴 했지만, 어둠에 스며들어 이동하는 자신을 괴(乖)라고 해도 쉽사리 찾아낼 수 없다.
이곳에서 처음 깨어나 정신이 없을 때 이상한 녀석에게 걸린 적은 있지만, 그 이후에는 단 한 번도 적에게 걸린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군.’
뭔가 이상하다.
최근 사람의 발길이 뜸해져 다른 놈을 공격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던 차다.
만약 다른 놈도 자신을 노리고 있다면?
불안감에 흑귀는 미간을 찡그렸다.
일단 이동하자.
다른 놈들을 습격하는 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일단은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들은 것보다 별문제는 없군요.”
“음……. 그러게요.”
좀 더 깊은 곳으로 숨으려던 흑귀는 오랜만에 들려온 인간의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딱 봐도 어린 무인이 다섯.
운 좋게 괴(乖)가 펼친 영역에 들어가지 않은 놈들인 듯, 얼굴에 위기감이나 긴장감이 전혀 없었다.
‘좋군.’
마지막으로 힘을 보충하고 다른 놈들을 습격해야겠어.
고개를 끄덕인 흑귀는 어둠을 타며 서서히 움직였다.
일단 저기서 가장 강해 보이는 여자를 단숨에 죽이고 그다음엔…….
“진짜 있네?”
“그렇죠?”
“좋아. 공적 하나 인정이다.”
뒤에서 들려오는, 긴장감 하나 없는 목소리.
그것을 깨달은 순간, 흑귀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어떻게?
그리고 그 생각이 흑귀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나쁘지 않네.”
잘리자 서서히 바스러지기 시작하는 흑귀의 머리를 손에 쥔 설천위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훌륭한 탐색기가 생겼으니 이젠 사냥할 시간이다.
빨리 끝내고 학관으로 돌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