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97화-그건 그쪽 사정이고 (4)
“상황이 힘드네요.”
처지기 시작하는 목소리.
서하영의 말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휴식도 없이 바로 사건에 휘말려 산을 수색하고 있는 상황.
그런데 거기에 더해 공격까지 받고 있다.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힘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대로 수색을 계속하는 게 맞을까요?”
그렇기에 주현운이 꺼내는 한마디에 다른 사람들은 침묵했다.
수색을 계속하는 것이 맞느냐.
이대로 가다가 지친 우리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
그 안에 담긴 뜻을 모를 리가 없다.
그렇기에 유예린은 담담한 눈으로 주현운을 바라봤다.
“소협.”
“네?”
“저는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뜬금없는 유예린의 말에 주현운은 입을 다물었다.
뜬금없지만, 왜 저런 말을 꺼냈는지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친구를 구하기 위해 무리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저는.”
“알아요. 소 소저랑 가장 친하니 오히려 냉정하게 판단하고 싶었던 거죠?”
입을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이는 주현운.
그 모습에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리 천무지체라는 괴물 같은 재능을 타고났고, 뛰어난 오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애는 애다.
나이는 고작해야 16살.
현대에 태어났다면 중학교 3학년이었을 나이.
목숨을 건 전장에서 평상심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나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해. 진짜 무리면,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일이면 내가 나서서 말려 줄 테니까.”
“……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주현운은 망설임 없이 가장 앞으로 나선다.
산 정상을 향해 걸어가는 길.
목표는 당연히 철백과 소윤혜의 수색이다.
“공자.”
“응?”
“아무래도 묘해요.”
작게 말하는 유예린을 가만히 바라보던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감이 좋아.
“아마 최소 셋은 우리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아.”
“셋이요?”
“어.”
살짝 짐작 가는 바가 있다.
원래 이 근처에서 하는 임무는 아니었지만 게임에서 이런 상황이 펼쳐지는 임무가 있었으니까.
뭐, 큰 문제는 없겠지.
짐작하는 게 맞는다면 오히려 호재다.
빨리 처리하면 처리할수록 이쪽이 유리해지는 상황이니까.
이렇게 빨리 시작하게 됐다는 사실에 되레 감사해야 할 일이지.
‘……숫자도 많으니 의외로 경험치가.’
꽤 쏠쏠할지도.
강한 놈 한 마리 잡는 것보다 적당히 강한 놈 여러 마리 잡는 게 경험치가 더 많은 건 알피지의 기본이니까.
“셋이라면 조금 버겁지 않나요?”
“응? 왜?”
“조금 전에 마주했던 꼭두각시들, 저와 서 소저뿐이었다면 한참 더 싸웠을 거예요.”
그리고 지쳐서 도망치다가 다른 적을 만나면 더욱더 지쳤겠지.
거기에다 만약…….
“진법을 펼칠 수 있는 악귀가 있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죠.”
“음.”
갇혀 버리면, 답이 없긴 하지.
“뭐, 조력자가 없으면 힘들겠지?”
진법에 상세한 술사나 도사 같은 사람이 필요하긴 할 거다.
문제는 일행 중에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 정도?
나야 뭐 술사라고 하기엔 좀 쪽팔리고.
고작해야 배운 게 술법 두 개뿐이니까.
하나는 공격, 하나는 탐색…….
“……아.”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완전히 까먹고 있었네.
쓸 일이 없어서 기억 한구석에 처박아 둔 게 문제였나.
유예린의 말에 백화단주에게서 배웠던 두 개의 술법 중 하나를 떠올린 설천위는 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요?”
갑자기 걸음을 멈춘 설천위의 모습에 한껏 긴장한 상태로 주위를 경계하던 서하영이 창을 들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 설천위가 자신들이 모르는 수에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경계하는 움직임.
그 움직임에 만족하면서도 설천위는 손을 내저었다.
“까먹고 있던 게 생각나서.”
철백을 직접적으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까먹고 있었다.
“기다려 봐.”
잠시 멈춰서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은 설천위는 독특한 수인을 취했다.
중지와 중지를 맞대고, 엄지와 엄지를 맞대어 만드는 삼각형.
동시에 눈을 감고, 체내에 흐르는 영력에 집중한다.
[끼잉 끼잉.]
옆에서 들려오는 청랑의 울음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설천위는 천천히 술법을 발동시켰다.
백화단주에게서 배운 기초 술법.
사계(挱界).
백화단주에게 배우기론 분명 수색 계열이라고 했다.
가동 방법과 쓰는 법만 배우고 아직 실전에선 써 본 일이 없으니 살짝 불안한 감이 없진 않지만…….
‘뭐, 명색이 백화단주가 알려 준 술법인데.’
그래도 1인분은 하겠지.
또 흘러넘치려는 잡생각을 쳐내며 설천위는 눈을 감고 술법에 집중했다.
가슴 앞에 모은 수인 안으로 영력이 모여든다.
백화단주는 분명 기초적인 술법을 설천위에게 전수해 줬다.
설천위의 재능이라면, 다른 고등 술법도 충분히 배울 수 있었지만 굳이 기초를 두 개 가르쳤다.
이유는 두 가지.
기초를 배워야 더 많은 술법을 익히는 기반이 될 수 있어서.
기초만 배워도 그것으로 웬만한 건 다할 수 있는 재능이 있어서.
기초란, 결국 그 계통의 바탕이란 소리다.
그 깊이가 더욱 깊어지고, 크기가 커지면 결국 도달한다.
어디에?
고등 술법이라 불리는, 인외의 영역에.
[사계(挱界)]
순간 설천위의 손안에서 시작된 영력의 파동이 공간을 휩쓴다.
“음?”
아직 영력을 느끼는 데 미숙한 서하영과 유예린은 고개를 갸웃했고.
“흡?!”
그나마 영력을 제대로 느끼기 시작한 주현운은 경악했으며.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영력이 존재 자체인 악귀들은 비명을 내질렀다.
“이, 이게 무슨 일이에요?!”
당황한 서하영의 외침에 천천히 눈을 뜬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느껴졌다.
주변의 상황이 어떤지, 내가 무엇을 했는지.
“주변에 있던 결계들은 다 부쉈으니까 움직이자.”
[왕!]
이제 청랑의 코도 작동하는 것 같네.
* * *
“후우, 소저 괜찮으시오?”
“네. 전 괜찮아요.”
철백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소윤혜는 작게 이를 악물었다.
솔직히 힘들다.
걸어서 움직이고 있다곤 해도 소윤혜 자신은 이렇게 휴식도 없이 오래 걸을 수 있을 만한 몸 상태가 아니니까.
하지만 불만을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쉬다가 적에게 포위라도 당하면 어떡한단 말인가.
무엇보다.
‘극복해야 해.’
무인이라는 길을 선택한 이상, 분명 이런 일은 계속해서 일어날 거다.
지금은 악귀들에게 쫓기고 있지만, 후에는 칼을 든 인간에게 쫓길 거다.
그런 상황에서 느긋하게 쉴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니 극복하자.
한 번 해내면, 다음은 더 쉬우니까.
‘……슬슬 한계인가.’
이를 악무는 소윤혜를 보던 철백은 고개를 돌려 앞에서 걸어가는 도사를 바라봤다.
도복을 입은 여인.
조금 흔하지 않은 조합이지만, 없는 조합도 아니다.
화산만 해도 여제자를 본산의 제자로 받아들이는 데다 작은 도관 같은 곳은 여제자가 상당히 많은 편이니까.
“소협, 괜찮으신가요?”
“문제없소.”
철백의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돌린 여도사는 작게 웃곤 걸음을 재촉했다.
“상당히 까다로운 진법이에요.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전투를 피해 이렇게 무사히 이동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오.”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저야말로 감사하죠.”
작게 웃는 여도사.
품이 넓은 도복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굴곡진 몸매에다 보는 이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미모.
도사를 하고 있다는 게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런 여인의 부드러운 미소는 뭇 남성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지만…….
“감사는 내가 하는 것이 맞으니, 그런 말 마시오.”
“후후.”
고개를 젓는 철백의 모습에 작게 웃다가 그의 뒤를 따라오는 소윤혜를 보곤 걸음을 멈췄다.
“음…….”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여도사는 이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변에 있던 큼지막한 나무 쪽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도인의 몸으로 이렇게 걸으니 조금 힘드네요. 잠시 휴식을 취하죠.”
“……배려 감사하오.”
“아뇨. 제가 쉬고 싶어서 그런 건데요. 뭐.”
진짜 한계에 도달한 듯 멍하니 걷기만 하던 소윤혜를 자리에 앉힌 철백은 그녀의 곁에서 주변에 부적을 붙이는 여도사를 바라봤다.
“한동안은 적의 시선을 피할 수 있을 거예요.”
“정말 고맙소.”
철백의 감사에 빙긋 웃은 여인은 소윤혜가 앉은 반대편에 엉덩이를 붙였다.
철백과 거의 피부가 닿는 거리.
“결계를 작게 펼쳐서 양해 좀 부탁드려요.”
“괜찮소.”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 철백은 향긋한 향기에 슬쩍 여도사를 바라봤다.
서 매도 향이 좋은데, 이 사람은 더하군.
도사라도 향낭 정도는 가지고 다니는 건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철백이 다시 정면을 바라보자, 여도사는 살짝 몸을 뒤척였다.
“우, 갑갑하네요.”
그러곤 살짝 풀어헤치는 앞섶.
갑자기 공기 중으로 나온 살결이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던 철백의 눈에 들어왔다.
검은 세로선.
저리도 선명한 선이라니.
“크흠.”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돌린 철백은 다시 앞을 바라봤다.
살짝살짝 닿는 살결이 너무나도 부드럽다.
‘……금강경이라도 외워 둘 걸 그랬나?’
불교 쪽엔 관심이 없어서 제대로 읽은 적도 없지만.
부동심을 유지하는 데는 참 좋다던데.
설천위나 할 법한 헛생각을 하면서 잠시 고민에 빠지는 철백.
그런 철백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여도사는 슬쩍 그에게 말을 붙인다.
“뭘 그리 고민하시나요? 소협?”
웬만한 나무기둥만 한 팔에 닿는 무언가.
그 기묘한 감각에 철백은 애써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어찌 빠져나가서 일행을 만날지 고민하고 있었소.”
영력이 넘쳐흐르는 이곳에서 가장 의지가 되는 건 천위니까.
“하지만 일행분들도 분명 헤매고 계실 텐데요?”
“결계라면 아마 문제없을 거요.”
천위는 영적인 상황에 한해서는 놀랍도록 뛰어난 대처 능력을 보여 주니까.
“지금도 어떤 식으로든 결계를 해결하고 우리를 찾고 있겠지.”
“흐음?”
짧은 시간이지만, 철백의 굳건하기 그지없는 눈을 봤던 여도사는 그가 그토록 믿는 사람에게 흥미를 느꼈다.
이런 남자는 사람을 잘 믿거나 의지하지 않는 법인데.
과연…….
“재미있네요.”
빙긋 웃은 여도사는 철백의 팔에 붙였던 가슴을 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소협이 믿는 친구가 온 것 같군요.”
“……지금 뭐라고?”
“저는 아직 모습을 드러낼 수 없으니 다음에 또 뵙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이번에 확실하게 안을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지.
아쉬움을 삼키는 여도사의 모습에 철백이 일어나려는 순간.
“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감각이 둔해지는 법이죠.”
“……독인가?”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 주세요.”
정확히는 주독(呪毒)이지만.
가슴으로 정신을 쏠리게 만든 후 은밀하게 뿌렸으니 이제야 알아채는 것도 당연하다.
‘아쉬워. 저만한 남자를 먹어 치우면 단독으로 앞설 수 있을 텐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기에 아쉬움을 삼킨 여도사는 이내 짓궂게 웃으며 철백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끌어안는다.
부드러운 품이 그의 머리를 감싸자.
“이?!”
말을 잇지 못하는 철백의 외침과 함께 여도사는 웃었다.
이리도 건장한 남자가 이러는 모습은 언제 봐도 즐겁다니까.
빙긋 웃은 여인이 당황하는 철백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며 웃었다.
“그럼, 이제 진짜로 이별. 다음에 또 봐~.”
일단, 저 괴물 같은 녀석에게서 떨어져…….
[흠흠.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만, 이미 늦었느니라.]
“……뭐라는 거야, 영감.”
아까부터 이쪽을 졸졸 따라다니던 혼이 갑자기 입을 열자 여도사는 미간을 찡그렸다.
아니, 무시하자.
일단 저쪽에서 달려오는 기묘한 녀석에게서 빠져나가는 게 우선…….
샤악.
순간, 코앞을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를 느끼며 여도사는 고개를 비틀었다.
방금 그거, 피하지 않았다면 머리가 날아갔다.
“내가 바람피우면 죽는다고 했지!!”
응?
이해 못 할 외침에 고개를 돌린 여도사.
그녀는 이제야 그 창이 자신을 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으브읃!”
앞니로 창을 정확하게 물어 목숨을 부지한 남자, 철백이 억울함을 담아 외쳤다.
“브가하력(不可抗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