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96화-그건 그쪽 사정이고 (3)
몸은 이 세계에선 흔치 않은 기계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세계관이 세계관인지라 있긴 있지만, 흔히 볼 수 없는 물건.
끼릭끼릭, 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진다.
“본체는 아닌가.”
[크르르르르.]
나지막이 퍼지는 패융의 울음소리와 함께 설천위는 몸을 비틀었다.
단숨에 기계인형과의 거리를 좁히고 손을 뻗는다.
주먹은 안 쥐고 있다.
애초에 파괴가 목적이 아니니까.
호쾌하게 뻗은 손이 기계인형의 목을 움켜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너무나도 빠른 움직임에 기계인형은 제대로 반응도 못 하고 설천위의 손에 잡혔지만, 설천위는 멈추지 않았다.
뿌득뿌득.
섬뜩한 악력이 단숨에 기계인형의 목을 분쇄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장면.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그대로 기계인형의 어깨에 손을 올린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팔에 힘을 줬다.
[크르르르.]
동시에 패융이 휘감은 기계인형의 육체는 그 자리에 고정되었다.
몸은 고정되었는데 머리는 위로 힘을 받는다.
뿌드드드득.
그 결과가 어찌 될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무언가가 뽑혀 나오는 것과 함께 설천위의 손에서 기계인형의 머리가 흔들린다.
단숨에 기계인형을 제압해 그 머리통을 손에 쥔 설천위는 담담했다.
“……대단하네요.”
“뭐가?”
“저는 한 걸음도 못 움직였어요.”
쓰게 웃으며 자신의 발을 가리키는 주현운.
과연 떨고 있진 않지만 공격을 위한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다리가 보였다.
“움직인다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이지.”
정신력은 중요하다.
하지만 정신력이 현실을 바꾸는 건 아니다.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는 것이고.
버틸 수 없는 건 버틸 수 없는 거다.
아무리 악으로 깡으로 버텨도 부서지고 무너지는 것.
그것이 현실이라는 무게다.
“그래도 다행이야. 아직 본체는 움직이지 않은 것 같으니까.”
“예?”
“우리 여기에 온 지 하루도 안 됐어. 관찰이나 할 시간이지.”
이게 관찰이라고?
설천위의 손에 잡힌 인형을 보며 주현운은 침음을 삼켰다.
설천위는 간단하게 제압하긴 했다.
그런데 만약 설천위가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이라도 저리할 수 있었을까?
몸은 못 움직여도 눈은 그대로인 주현운이다.
설천위가 달려드는 순간.
기계인형은 분명히 반응했다.
손발이 움찔거리는 것을 분명히 봤다.
한데, 움직이지 못했다.
설천위가 가끔 전력을 다할 때 내는 기이한 압박감.
그것에 짓눌린 것이겠지.
‘최소 일각(15분) 이상 싸웠어야 했을 거야.’
기계인형에게서 느껴지던 기세를 가늠하며 주현운은 냉정하게 자신을 평가했다.
저렇게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는 건 아마 설천위 정도뿐이리라.
‘유 소저도 힘들겠지.’
“흠.”
주현운이 스스로에게 냉정한 평가를 내리던 사이, 설천위는 손에 붙잡은 기계인형을 가만히 바라봤다.
“선명한데?”
[평범한 영(靈)은 아닌 것 같구나.]
천마의 말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영역(靈域) 안이라곤 하지만, 이토록 선명한 감촉.
나무와 쇠의 질감을 이토록 사실적으로 구현할 정도라면 흔한 녀석은 절대로 아닐 테지.
거기에…….
끼릭 끼릭.
“슬슬 움직여라.”
아무래도 꽤나 긴 밤이 될 것 같으니까.
다른 녀석들은 잘하고 있나 모르겠네.
* * *
“이건…… 상당히 버겁네.”
숲속.
수색을 위해 마을 근처에 있는 산을 오르던 유예린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기계인형의 물량에 혀를 내둘렀다.
하나하나가 웬만한 고수도 상대하기 까다로울 정도로 강하다.
무리(武理)가 깊은 움직임은 하나도 없었지만, 단순히 빠르고 단단하다.
그것만으로도 사람은 그 존재를 상대하기 위해 내공을 소모할 수밖에 없다.
빠른 움직임에 대응하는 것도, 단단한 몸을 베거나 부수는 것도 내공이 필요하니까.
“쉽지 않네요.”
설천위를 따라다니면서 콩고물이나 주워 먹을 생각으로 온 의뢰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당장 설천위를 따라다니는 할아버지들이 불호령을 내렸을 테니.
무(武)란 인간과의 싸움을 위해 발전했지만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학문이 된 지 오래다.
그것을 더 깊고 더 넓게 이해하고 응용하기 위해선 인간 이외의 영역도 알아야 한다.
그 조언을 다른 사람이 해 줬다면, 약이나 판다고 생각하며 무시했겠지만…….
‘천마 할아버지의 조언이라면 믿어야지.’
자신이 익히고 있던 독문무공을 보는 것만으로 꿰뚫고 창법으로 바꾸는 데 도움을 준 은인.
이미 죽어서 혼으로 떠돌고 계시는 분이 그런 얘기를 하는 데 믿지 않을 수가 있나.
“후.”
슬슬 흐트러지기 시작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서하영은 창을 거뒀다.
“몇이나 되는 거죠? 벌써 스물은 부순 것 같은데.”
“음, 아직도 한 오십 정도는 더 있는 것 같은데?”
……거, 쉽게 말하시네.
누구 약혼자 아니랄까 봐.
아니지, 반대인가?
이쪽이 유 언니의 본래 성격 같으니까.
설 소협과 있을 땐 자주 존대를 하면서 단둘이 있을 땐 항상 반말을 한다.
대체 왜 그러냐고 묻고 싶지만, 도저히 물을 수가 없다.
전에 보니까 그 홍유화? 그 사람이랑 같이 있을 땐 설 소협 앞에서도 반말하는 것 같던데.
뭐지, 사랑하는 임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건가?
아니면 그냥 아직 덜 친한 건가?
순간 쓰잘데기 없는 곳으로 흘러가던 사고가 목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에 단숨에 제자리로 돌아온다.
깡!
“괜찮아?”
“괜찮아요!”
목 꿰뚫릴 뻔했네!
기계인형의 공격을 쳐 내고 그대로 창을 휘둘러 그 목을 잘라 버린 서하영은 한숨과 함께 자신들이 오르던 산을 바라봤다.
걱정이 깊어지니 자꾸 쓸데없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철 가가…….”
사랑하는 임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건 나뿐은 아니겠지.
* * *
“겨우 다 정리했네.”
“후욱 후욱, 그러게요.”
거친 숨을 몰아쉬는 주현운의 어깨를 툭 두드린 설천위는 주위를 둘러봤다.
산산조각이 난 기계인형의 산.
자신은 무슨 허수아비를 상대하는 것 같아 싱거울 정도로 쉽게 정리했지만…….
‘아무래도 다른 쪽을 도우러 가야겠는데.’
주현운의 꼬라지를 보아하니 그건 아닌 것 같다.
일부러 좀 더 성장하라고 주현운 근처엔 패기를 보내지 않았더니 주현운은 몸 곳곳에 상처가 생길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다.
본체가 아닌 분신들일 뿐인데, 주현운을 이토록 고전시키는 녀석들이라…….
“일단 내가 알던 환귀는 아닌 게 확실하네.”
거기에 더해, 아까 마을에서 봤던 그 녀석인지도 모르겠다.
“일단 애들부터 찾아서 돌아가자.”
“예.”
몇 가지 의문점이 아직도 그대로이지만 이렇게 있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다.
일단 일행을 모아서 마을에서 쉰 후 다시 조사를 시작해야지.
어차피 하루 이틀로 끝날 의뢰도 아니고.
그렇게 간단히 끝날 의뢰였으면 백화단에서 진즉에 힘을 썼겠지.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하는 영역을 보며 설천위는 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쪽은 영역이 흩어지고 있지만, 저쪽은 아직도 영역이 생생했다.
저곳에 있다는 소리겠지.
그렇게 주현운을 데리고 한참을 달린 설천위는 이내 기계인형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영역 내에선 사라지지 않는, 정밀하게 실체화된 육체.
사람 따위는 간단히 죽음으로 몰아가는 중급 이상의 악귀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
거기에 이만한 규모라면…….
‘상급일 가능성도 있겠어.’
문제는 상급이 흔한 등급은 아니라는 점인데…….
파훼법을 모르면 아예 제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상급 악령이나 악귀는 지역 혹은 업적에 따라 신(神) 자가 붙기도 한다.
그만큼 강력하고 희귀한 존재.
역시 한번 뭉쳐서 재정비를…….
“서 소저!”
옆에서 들리는 외침에 설천위는 주현운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심지어 나무들 사이에 가려져서 뭔가 보일 리가 없는데?
응?
[껄껄껄!]
기껍다는 듯이 웃는 천마의 목소리.
그리고 순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한기.
지금 자신들은 영역(靈域) 안에 있다.
시야를 흐리고 사물을 왜곡시키는 곳.
주현운의 시력이 자신보다 좋은 것이야 당연하다.
주현운은 말 그대로 축복받은 육체를 타고났으니까.
약간의 내공이 상시 눈에 깃들어 있는 것만으로 매의 뺨을 후려칠 정도의 시력을 가지고 있을 거다.
그래도 영역 안에서는 자신보다 시력이 안 좋아야 하는데…….
분명 그런데…….
그래야 하는데…….
“……이 미친 재능충 새끼가?”
“예?”
“……아무것도 아니야.”
의아함에 뒤를 돌아보는 주현운과 눈을 마주친 설천위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눈에 깃든, 기묘한 푸른색.
내공이 아니다.
영력(靈力)이다.
철백이나 서하영도 며칠 걸려서 겨우 도달한 경지를, 이 새끼는 고작 한두 시간 만에 도달한 거다.
아니, 아무리 영적인 재능이 두 사람보다 좋다곤 해도 이건 아니지.
이건 아니지, 개X끼들아!
“……왜 저러죠?”
[허허, 세상의 불공평함을 깨닫는 이들이 모두 겪는 일이니 너는 신경 쓸 것 없다.]
웬만하면 겪을 일 없으니까.
주현운의 관심을 가볍게 돌린 천마는 짜증으로 두 눈이 번뜩이는 설천위를 보며 웃었다.
저, 자신의 복도 모르는 놈이.
상황에 집중하느라 설천위는 깨닫지 못했지만 옆에서 그를 관찰하는 천마는 알 수 있었다.
‘진짜 괴물 같은 놈이구나.’
주현운보다 설천위가 압도적인 속도로 주변의 영력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기계인형을 무너트린 곳의 영역이 약해진 이유가 단순히 기계인형들이 전멸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제 놈도 재능으로 먹고사는 주제에 남의 재능에 배 아파하는 꼴이 꼴 보기 싫어서 알려 줄 생각은 없지만.
* * *
“……정말 괜찮나요?”
“괜찮을 거요.”
산 중턱.
소윤혜보다 두 걸음 정도 앞에 선 철백은 나뭇가지를 꺾어 내며 거침없이 걸었다.
다리가 아픈 소윤혜를 배려해 일단 높이 올라가는 것을 목표로 잡은 두 사람이다.
정상으로 가는 게 더 힘들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차라리 길을 따라가는 게 낫다.
야산을 뒤지는 건 정말 체력을 크게 소모하는 일이니 소윤혜에겐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무엇보다.
‘천위 놈…….’
자신이 폭주하지 않도록 소윤혜를 붙여 줬다는 것을 알기에 철백은 의식적으로 천천히 걸었다.
자신의 걸음걸이를 소윤혜가 따라올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내려가는 길이 안 보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갑자기 봤던 길이라고 하는 소윤혜의 말에 철백은 망설임 없이 나무 하나를 타고 올라갔다.
그렇기에 발견한 불편한 진실.
끝도 없이 펼쳐진 나무는 자신들이 잘못 들어왔다는 것을 증명해 줬다.
진법에 갇혔다.
아니, 진법인진 모르겠지만 여하튼 갇혔다.
그 순간, 철백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리고 부족함 또한.
그래서 바로 자문을 구했다.
[음, 이쪽이 맞을 게다.]
도주의 전문가에게.
설천위가 이분을 붙여 준 것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도망치라는 의도겠지.’
다리가 불편한 소윤혜가 있다면 전투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고.
암영의적이 있다면 도주하는 것이 상책이다.
뭐가 됐든 도주하라는 의지의 표현.
불의를 보고 그냥 넘기지 못하는 자신의 성격을 배려한 배치겠지.
어떨 땐 생각이 한없이 얕은 것 같으면서도 어떨 땐 배려심이 너무 깊어 어리둥절할 정도다.
“……오는군.”
진법에 갇힌 걸 알고 도주를 선택하고 조금 뒤.
미묘하게 자신들을 쫓아오는 기척을 느낀 철백은 암영의적과 상의해 그 기척을 피하고 있었지만 이젠 한계다.
소윤혜의 다리로는 여기까지.
그렇다면.
“소 소저, 전투를 준비하시오.”
싸우는 수밖에.
의지를 세운 철백이 그녀를 지키기 위해 기척이 오는 방향으로 서는 순간.
“이쪽! 이쪽이요!”
웬 도복을 입은 여인이 수풀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손을 까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