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95화-그건 그쪽 사정이고 (2)
사람은 나약한 존재다.
그렇기에 타인과 함께한다.
인연을 맺고,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존재.
그것이 사람이기에 인연(因緣)이란 단어에 인(人)이 아닌 인(因)란 글자가 들어간 게 신기할 정도로 사람에게 약하다.
주변의 죽음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죽음에 자신의 책임까지 있다면?
인간은 허무하게 무너진다.
설령 지켜야 할 다른 인연이 있더라도.
그 죄책감에 스스로 나락으로 떨어진다.
[크아아아아!!]
괴성.
이미 인간의 목소리라고 할 수 없는 괴성에 주민들이 공포에 빠졌다.
하물며, 그 모습을 코앞에서 지켜보는 여아는 이미 공포에 완전히 잠식된 상태였다.
하지만, 물러날 수 없었다.
“아빠……!”
하나뿐인 가족이니까.
유일한 구원이니까.
물러날 수 없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앉아 있는 아이의 모습에 주민들이 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각오했다.
눈앞에 펼쳐질 끔찍한 풍경을.
“과연, 알겠습니다.”
한데 기대와 다른, 너무나도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픈 아이의 비명이 아니라 담담한 여인의 목소리.
“아무래도 저도 활약할 부분이 있을 것 같네요.”
땅을 박찼던 설천위는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고마워.”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소매를 늘어트린 채 빙긋 웃는 유예린.
그녀가 던진 비수는 이미 사내의 사지를 꿰뚫어 벽에 고정시킨 상태였다.
“혹시나 해서 혈을 짚지 않았는데, 맞는 선택이었나요?”
“어, 훌륭한 정답이야.”
유예린의 신속한 대처 덕에 여유를 찾은 설천위는 담담하게 사내를 향해 걸어갔다.
“괜찮니?”
어느새 튀어나와 아이를 감싼 서하영과 소윤혜에게 아이를 맡긴 채 사내의 앞에 선다.
철백과 주현운은 유예린의 곁에 붙어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또 다른 변화가 생기면 즉시 대응하기 위해서.
녀석들을 믿기에 설천위는 사내에게 온전히 정신을 집중했다.
[마기? 조금 다르구나. 음……. 영 쪽의 영역인가?]
소백진의 물음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적인 영역의 오염이 맞다.
백화단주에게 배웠던 지식 중에 이와 비슷한 것이 있었으니.
‘게임 속에서 봤던 능력과 다르다는 게 문제지만.’
환귀(幻鬼)는 분명 엄청나게 까다로운 패턴을 가진 몬스터였다.
하지만, 이런 능력은 없었다.
이렇게 사람을 조종하는 능력이 있진 않았다.
분명 분신을 만들어 내고, 환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주력이었을 텐데…….
게임 속에서 나오지 않았던 환혹 계열도 가지고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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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악령이 있을 확률이 구 할이 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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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줄기 문장에 설천위는 다시금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다르다.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르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환귀가 이곳의 보스로 등장하는 거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지만, 설천위는 일단 그것들을 의식의 한쪽으로 밀어 넣었다.
지금 중요한 건 눈앞에 있는 사내의 구제니까.
“깔끔하네.”
[회복하면 후유증은 아예 없겠구나.]
유예린의 비수가 꿰뚫은 부위를 확인한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요 혈관과 인대 등을 정확히 피해 근육과 피부만을 꿰뚫은 공격은 그야말로 훌륭했다.
예술적이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후.”
사내의 앞에 서서 그 머리 위에 손을 올린 설천위는 가볍게 호흡을 내뱉었다.
[왕!]
설천위의 부름에 응해 나온 청랑이 귀엽게 짖는다.
“냄새를 기억해 줘.”
[왕!]
가볍게 청랑에게 부탁한 뒤 설천위는 본격적으로 패기를 끌어올렸다.
지금 해야 할 건 이자의 머릿속에 침투한 무언가를 없애는 것이다.
존재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힘이 설천위를 감싼다.
[크르르르르.]
그가 힘을 끌어올리는 것에 맞춰 깨어난 패융의 울음소리가 나지막이 울린다.
굳이 실체화를 하진 않았지만 영역이 펼쳐진 덕에 사람들의 눈엔 그 용의 모습이 똑똑히 들어왔다.
“시, 신령님!”
“신령님께서 우리를 구하러 오셨다!”
주민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설천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숨고 있군.’
이변을 감지한 듯 그 힘은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지금 잡힐 순 없다는 듯이.
덩달아 의식을 잃은 사내의 몸이 축 처졌지만, 설천위는 사내의 머리를 붙잡고 힘을 더했다.
비수 덕에 조금 힘을 줘 밀어 넣는 것만으로 몸은 고정됐다.
깨어나면 이곳저곳이 아프겠지만 그것까지 배려해 줄 순 없었다.
패기를 끌어올린 것으로도 모자라 설천위는 영력까지 끌어올렸다.
깊숙이 도망치려는 기운을 붙잡는다.
억지로 끌어내 뽑아낸다.
“커헉!”
사내가 기침을 토하는 소리와 함께 설천위는 한 걸음 물러났다.
제거에 성공했으니까.
[허허, 이걸 해내다니…….]
[진짜 이쪽은 재능이 확실하구나.]
혼들의 감탄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후, 내가 또 이런 건 잘하지.
영력으로 할 수 있는 건 대체로 다 가능하다 이 말이야.
어깨를 으쓱이던 설천위는 영역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곤 몸을 돌렸다.
“괜찮아진 건가요?”
“어.”
“그러면, 일단…….”
설천위의 대답에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유예린은 다시금 축 처진 사내를 바라봤다.
의식을 잃어 스스로 서지 못해 몸에 박힌 비수에 무게가 점점 실리고 있었다.
“저분부터 내려 드려야겠네요.”
저러다 근육 다 망가질라.
* *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상황이 대충 정리된 후, 촌장의 집에 모인 설천위 일행은 촌장과 마주하고 앉았다.
“그럼 일단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죠. 몇 사람이나 저리 변했죠?”
“……최소 서른이 넘었습니다.”
심적 고통을 숨기지 못하는 촌장의 대답에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럼 벌써 최소 육십 명은 죽었다는 소리군요.”
아까 전의 상황을 생각하면 한 사람이 변할 때마다 최소 한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확률이 높았다.
그 갑작스러운 발작은 보통의 사람이 반응해서 막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유예린의 분석에 일행들이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그것이…… 사망자는 변한 사람의 숫자와 거의 같습니다.”
“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의문이 담긴 시선에 촌장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변한 사람은 누구든 한 명을 죽이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죽이는 대상은 반드시 가족이다.
홀로 사는 독신은 아직 한 명도 변하지 않았다.
또한.
“변한 사람을 죽이면…… 죽인 사람이 변합니다.”
“예?”
“악귀에 씐 사람은 당연히 공공의 적이 됐습니다.”
불안.
그리고 공포.
민간에서 흔히 퍼지는 사고다.
아예 찾을 수 없는 원인보다 훨씬 가까운 원인이 근처에 있으면 그쪽으로 눈이 갈 수밖에 없다.
“하물며 자식을 죽인 부모였으니 주변에서 매질을 해 죽였습니다.”
“그러고요?”
“가장 심하게 때리고 마지막까지 때려죽인 사람이 다음 날 자신의 부인을 물어 죽였습니다.”
처음에는 우연이겠거니 했다.
한데 그것이 몇 번이고 반복되자, 사람들은 깨달았다.
악귀에 씐 사람을 죽이면 그 사람도 악귀에 씐다.
상황 파악이 끝난 설천위는 그제야 자신이 느꼈던 이질감을 깨달았다.
살아남은 자식이 있는데도 멍하니 하늘만을 바라보던 여인.
남편을 갑작스레 잃어서가 아니라 제 손으로 남편을 죽였기에 아이조차 잊은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이에게 다가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까득.
옆에서 들린 섬뜩한 소리에 설천위는 고개를 돌렸다.
이를 악물고 있는 철백의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린다.
“찾으러 가겠네.”
“어딜?”
“……어디든.”
“후, 의적 아저씨 부탁해요.”
[오냐.]
어떤 식으로든 행동하려는 철백에게 암영의적을 붙여 준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뭐가 됐든, 일단 상황 파악이 우선이다.
철백도 화가 나서 뛰쳐나가긴 해도 이성을 잃고 무리하진 않을 거다.
애초에 철백에게 본체를 들킬 정도의 녀석이라면 진즉에 토벌되었을 테고.
철백은 무인으로선 슬슬 궤도에 오르고 있지만 퇴마사로서는 초보 이하니까.
“청랑.”
[왕!]
“냄새는 기억해 뒀어?”
[왕!]
긍정.
청랑의 의지를 느낀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백이 행동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감정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틀린 건 아니다.
뭐라도 정보가 있어야 상황을 판단할 수 있으니.
“나눠서 움직이자.”
* * *
“어떤가요?”
“아직 별거 없는 것 같은데.”
주현운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마을을 둘러싼 담장을 훑었다.
딱히 영적인 흔적은 느껴지지 않는다.
기이하리만치 깔끔하게.
“다른 분들은 어찌하고 있을까요?”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
다 똑똑한 녀석들이니까.
혼을 볼 수 있어야 조금 떨어져도 연락이 되기에 설천위, 철백, 서하영을 기준으로 인원을 나눴다.
설천위는 주현운.
철백은 소윤혜.
서하영은 유예린.
이렇게 나눈 이유는 몇 가지 있긴 하지만…….
“철백은 필요해지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으니까 걱정 그만해라.”
“예?”
“소 소저가 걱정돼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거잖아?”
“아, 아닌데요?”
“뻔히 보이는 거짓말은.”
피식 웃은 설천위는 다시금 눈에 영력을 집중했다.
과하지 않게.
패령안을 깨우는 정도로만.
영력의 흐름을 읽는 건 이 정도로 충분했다.
그렇게 집중력을 유지한 채 돌아다니길 약 한 시간.
오자마자 사건이 일어나 제대로 휴식조차 취하지 못한 몸이 피로를 호소했다.
‘슬슬 쉬어야 하나.’
다른 이들도 모아서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겠어.
다수의 악귀.
처리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다행히 게임에서 봤던 환귀급의 악귀는 아직 없는 것 같으니 너무 조급해할 필요는 없…….
쿵.
“응?”
순간 기묘한 감각에 주현운이 고개를 갸웃하고, 설천위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심장을 흔드는 고동(鼓動).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다.
“……이게 무슨 개 같은.”
아직 영적인 힘을 개화하지 못한 주현운과 달리 설천위는 고개를 갸웃하는 것 정도로 넘길 수 없었다.
왜냐고?
보이니까.
느껴지니까.
끼릭 끼리리릭.
무언가가 어긋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공간 자체가 변해 간다.
영역(靈域).
영적인 존재가 주변 공간조차 장악해 현실과 갈라놓는 이상 현상.
동시에 자신을 주목하는 시선의 존재를 느낀 설천위는 헛웃음을 흘렸다.
“과연 맛있는 음식이 배 속으로 들어왔다 이거지?”
이쪽은 순순히 보양식이 돼 줄 생각은 없지만.
* * *
“벌써?”
“예. 괴(乖)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겁쟁이가 이리도 빨리?”
괴(乖)는 겁이 많은 녀석이다.
그래서 인간을 자극하고 그 감정을 모아 강해지는 느리디느린 방법을 채택한 녀석.
지금 이곳에 모은 녀석들 중에서 가장 소심한 놈이다.
그런데 그놈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그것도 본체를?
계획에는 없던 변수.
하지만.
“나쁘지 않군.”
그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기 힘들었기에 배제했던 변수일 뿐, 일어나선 안 되는 변수는 아니다.
고독(蠱毒)과 같다.
악귀들을 좁은 곳에 몰아넣어 남은 한 마리를 취하는 것.
물론 정말 한 마리가 남을 때까지 할 순 없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무엇보다 효율이 안 좋으니까.
그러니 적당히 쓸 만한 수준만 되면 데려갈 생각이다.
그런데 상당히 쓸 만한 능력 덕에 기대감만으로 데려온 녀석이 이렇게 움직이다니.
“준비하도록.”
성장하면 반드시 데려가야 할 녀석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