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93화-선발 시험 (2)
“한 수 배웠습니다!”
“……습니다.”
밝은 주현운의 인사에 상대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말을 흐리며 비무대에서 내려갔다.
그 무례함에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릴 법도 하건만, 모두가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저렇게 철저하게 짓밟히면 다시 일어나는 것도 힘들지.’
무인이 가장 큰 절망감을 느낄 때가 언제인가.
속도에서 밀렸을 때?
힘에서 밀렸을 때?
기술의 정밀함에서 밀렸을 때?
전부 아니다.
무인이 가장 큰 절망을 느낄 땐 상대에게 자신의 수를 완벽하게 읽혔을 때다.
무공이란 같은 초식을 익혀도 사람마다 쓰는 방식이 전부 다르다.
애초에 초식이라는 것이 한 번의 움직임을 담은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움직임의 집합이다.
실전에서 응용은 당연히 필연적인 것이고, 응용하지 못하면 오히려 죽은 초식이라 비판을 받는다.
그렇기에, 각자가 스스로에게 맞는 옷을 입듯 초식을 응용함으로써 각자의 호흡을 지니게 된다.
주로 쓰는 식이 생기고, 팔을 자주 돌리는 방향이 생긴다.
힘을 잘 주는 방향이 생기고, 힘을 잘 흘려 내는 방향이 생긴다.
이 모든 것들은 무인이라면 필연적으로 가지게 되는, 아니 사람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호흡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무(武)의 불확실성을 만들고,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이변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읽혔다면?
검을 내지르는 방향.
습관적인 움직임.
호흡의 흐름.
근육을 쥐어짜는 방식.
등등.
그 수많은 변수들을 전부 읽혔다면?
아무리 기술이 정밀해도.
아무리 힘이 좋아도.
아무리 속도가 빨라도.
결코 닿을 수 없다.
아무리 속도가 빨라도 세 수 앞을 보는 사람보다 먼저 도달할 수 없고.
아무리 힘이 강해도 시작 전에 막고 서 있는 것을 밀어낼 수 없으며.
아무리 기술이 정밀해도 약점을 모두 읽힌 상태를 극복할 순 없다.
거기서 찾아오는 압도적인 절망감.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벽이고, 절대 느끼고 싶지 않은 절망이다.
그것을 동년배에게서 느낀다면?
‘……끝이군.’
제정신을 회복하기까지 꽤나 긴 시간이 걸릴 거다.
비무대를 내려간 학생을 잠시 바라보던 팽후는 속으로 아쉬움을 삼켰다.
저 학생에겐 아쉽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실현하는 이가 우리 쪽 전력이 되는 건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니까.
그리고 팽후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만큼, 아니 그보다 더 학우의 절망을 체감한 이들은 그 누구도 주현운에게 도전하지 않았다.
“합격일세.”
도전 의향을 한 번 더 물어본 팽후는 도전자가 아무도 없는 주현운에게 합격을 선언했다.
그 뒤로 최근 들어 이름이 익숙해진 학생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서하영.
“큭!”
검을 든 상대를 그야말로 손발도 제대로 못 뻗게 몰아붙이며 압도.
세 사람이나 도전했지만, 결국 서하영의 창을 꺾지 못했다.
“아쉽군.”
그녀 다음으로 올라온 철백은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아 합격했다.
혜송과의 대련으로 이미 힘을 증명한 상태였으니까.
아직 자리에 여유가 있으니 무리하게 힘을 빼는 건 손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앞으로 넷.’
남은 이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이젠 3할 정도로 확률이 낮아졌다.
정말 도전해야 할 때.
모두가 눈치를 보며 살피던 그때.
자리에서 일어난 설천위가 천천히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 모습에 미간을 찡그리는 이들.
‘……애매하군.’
무려 설천강을 꺾은 설천위다.
도전하는 게 맞나?
승산은 낮지만 한번 찔러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제 자리가 너무 적게 남았으니까.
그리 생각한 누군가가 엉덩이를 들썩이는 순간.
설천위가 아직 합격하지 못한 이들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동시에.
“으음!”
공간을 짓누르는 무형의 압박감.
그 말도 안 되는 압박감에 모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공포?
압박?
아니,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감각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못 이기겠군.’
이 중압감 속에서 이길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싸울 후보들이 빠르게 전투 의욕을 접는 모습에 팽후는 가볍게 혀를 찼다.
‘이걸 반칙이라고 해야 하나…….’
저 기세에 익숙한 이들이 전부 합격하자마자 나서는 의도야 뻔하다.
괜히 힘 빼기 싫다는 거겠지.
자신감의 표현인 동시에 팽후로서는 아쉽기 그지없는 선택이다.
이로써 성장한 설천위의 실력을 가늠할 수 없게 됐으니까.
“쯧, 역시 조금 늦게 나올 걸 그랬나?”
“비무라면 심심할 때마다 하고 있잖아요?”
“그게 어떻게 비무인가? 대련이지. 가볍게 검을 맞대는 수준일 뿐인데. 서로의 검을 발전시키는 것은 좋지만…….”
“전에 검법 수련은 주 소협이랑 하는 게 더 좋다고 하셨잖아요.”
“……말이 그렇다는 거요. 말이.”
유예린의 놀림에 헛기침을 하는 남궁천.
그들의 대화를 전부 들으며 설천위는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저 배신자 새끼.
다음 대련 때 보자.
남궁천을 향해 작게 복수를 다짐한 설천위는 기운을 거두며 팽후를 바라봤다.
“합격인가요?”
“합격일세.”
“감사합니다.”
포권으로 감사를 표한 뒤 합격자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설천위. 그리고 그런 설천위가 사라지고 남은 세 자리를 위해 남겨진 이들이 경쟁을 시작했다.
* * *
“짜잔~! 그래서 선발된 열두 명이야.”
설천위가 합격한 이후 나름 치열한 시험을 거쳐 세 명이 추가로 더 뽑혔다.
그렇게 완성된 열두 명의 친선전 선수.
그들을 학관에서 마련해 준 훈련장으로 모은 남궁선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여태까진 후보였으니까 살살했지만, 이젠 진짜로 할 거니 긴장들 해~.”
“……야, 너희 누나 원래 저런 성격이었냐?”
전에 대회를 보러 왔을 때 잠깐 보니까 저 정돈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저게 본래 성격이야. 단주, 아니 단장이라는 지위 때문에 참고 있는 거지.”
은근슬쩍 옆에 있는 남궁천의 옆구리를 찔렀던 설천위는 남궁천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남궁천한테 달려들던 거 보니 저게 본래 성격 같긴 하네.
“거기! 좋은 지적이야.”
“예?”
“나는 원래 성격이 장난기가 많아. 내 검도 그런 편이고.”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내가 여태까지 본 검은 그럼…….
설천위를 비롯한 몇몇 사람의 눈이 불신으로 찡그려지자, 남궁선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못 믿겠어? 그럼 몸으로 겪어 봐야지.”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
백 번을 들어도 한 번 본 것만 못하다.
아무리 많이 귀로 들어 봤자 직접 본 것만 못하단 소리다.
참으로 좋은 이야기다.
아무리 책으로 읽고, 스승에게 들어도 본인이 직접 보고 느끼지 않으면 쉽사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는 속담.
지식만큼이나 경험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는 좋은 말이지만…….
스르르릉.
무공을 익힐 땐 상당히 무서운 조언이 된다.
왜?
몸으로 겪다 보면 다치니까!
“설천위 앞으로.”
“예?”
“앞으로.”
“……맨날 나만 가지고 그래.”
왜 항상 내가 첫빠따냐고.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누가 그랬어?
먼저 맞으면 금방 또 맞고 그럼 더 맞게 되잖아.
입술을 삐쭉이며 앞으로 나서는 설천위.
그가 검을 뽑자, 남궁선은 웃으며 상단세를 취했다.
“그럼 간다.”
* * *
“으아아아아아!!”
나무가 울창하게 깔린 숲.
누군가가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토해 내며 몸을 날렸다.
나무에서 뛰어내려 정수리를 노리는 날카로운 일격.
너무도 큰 비명에 기습의 효력은 팍 줄었지만 중력의 도움을 받은 그 일격엔 묵직한 힘이 담겨 있었다.
단숨에 정수리를 꿰뚫을 것처럼 떨어지는 단검.
그리고.
“조잡하군.”
그 단검을 가볍게 흘려 내는 검의 움직임.
머리 위로 검을 들어 올려 단검과 함께 사람까지 흘려 낸 청년은 어느새 땅을 박차고 거리를 벌리려는 상대를 바라봤다.
조잡한 발악이다.
“이미 늦었다는 건 알았을 텐데?”
“이익!”
이를 악물며 분함을 삼키는 상대.
그 모습에 청년은 피식 웃으며 검을 거뒀다.
검집으로 돌아가는 검.
싸울 의지가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그 동작에 겨우 자세를 다잡았던 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이 멀쩡히 보고 있는데, 검을 거둬서?
자신을 우습게 본다고 생각해서?
아니다.
그런 여유를 부릴 만한 상황도 아니거니와 애초에 그런 자존심 따윈 없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검을 거두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벴다고?”
“떨어지는 순간에 말이죠.”
담담한 대답과 함께 청년은 고개를 떨궜다.
평소처럼 들어 올린 손.
그런데, 그 손에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피에 허탈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한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가슴과 배는 물론, 팔다리 거의 전체에 걸쳐 스며 나오는 피.
이윽고 배어 나오는 피를 견뎌 내지 못한 상처가 완전히 벌어지며 옷은 순식간에 피로 무거워졌다.
이윽고, 의식이 끊긴 청년의 몸이 허물어진다.
“쉽군요. 이번 시험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발악한 친구가 있어서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내용 자체는 꽤나 쉬웠다.
삐이이이.
순간, 미리 정해 둔 악기에서 나는 소리에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쪽에서도 전부 승리한 것 같네.
하긴 이쪽이 머리를 잡았으니 다른 녀석들도 분발해 주지 않으면 기껏 조원으로 받은 의미가 없지.
이젠 숨이 끊어진 상대의 시체를 잠시 바라보던 청년은 이내 몸을 돌려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다가오는 친선전, 우리 적랑대(赤狼隊)가 가져간다.
* * *
“확실히 좋군.”
친선전 인원을 최종 선발한 뒤, 남궁선의 훈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창천단에서 실제로 하는 훈련은 물론이고, 뛰어난 이들의 실력에 맞춰 진행되는 추가 수련까지.
한 번 할 때 이틀에서 사흘 정도 진행되는 훈련이었지만, 그 가치는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였다.
문제는…….
“벌써 방학이군.”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이 찾아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동시에 사건이 터졌다.
“난리가 났다던데?”
백주문과 사위문에서 일어난 분쟁.
나름 대문파의 바로 아래에 있는 큰 규모의 문파들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창천단이 움직였다.
심지어 두 문파의 전면전이 벌어질 거란 예상까지 나와 무림학관에까지 지원 임무가 떨어졌다.
물론 자원하는 학생에 한해서.
‘……이걸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몇몇 학생들이 이것 때문에 친선전이 취소되는 게 아니냐고 걱정할 정도의 큰 싸움.
아마 참전하면 제법 쏠쏠하게 경험치를 챙길 수 있겠지만…….
‘그만큼 위험하단 말이지.’
게임에서도 사방에 깔린 적들 때문에 고생하는 임무인데, 현실에서 하면?
아마 고생 정도론 안 끝날 거다.
혼들의 도움이 있으니 죽지야 않겠지만 과연 철백이나 서하영을 데리고 가서 뚜렷한 성과를 이뤄 낼 수 있을까?
물론 이젠 이런 전투에 나가도 그리 큰 부담이 없을 정도로 강해지긴 했지만…….
고민이 된다.
그렇게 설천위가 고심하는 그 순간.
“공자.”
“응?”
고민하던 설천위는 갑작스레 방문한 유예린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자주 오기는 하지만 이렇게 이른 아침에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보통 저녁이나 점심에 같이 식사를 하러 오지.
설천위가 고개를 갸웃한 순간, 유예린이 종이를 내밀며 웃었다.
“백화단에서 지목 의뢰가 들어왔어요.”
“……의뢰?”
“구단 중 하나가?”
옆에서 듣던 서하영과 철백이 덩달아 놀랐지만, 설천위는 의뢰라는 부분에 집중하지 않았다.
백화단.
그쪽에서 주는 의뢰라면…….
씨익.
“유 매, 이거 같이 갈래?”
“예? 저요? 하지만…….”
내가 도움이 될까?
혼을 보지도 못하는데?
백화단의 의뢰라면 그 내용이 뻔했기에 유예린이 망설이자 설천위는 웃으며 자신의 어깨 위를 가리켰다.
“천마 할배랑 슬슬 인사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