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92화-선발 시험 (1)
선발 시험.
그 한마디에 학생들은 모두 근육을 조이며 팽후의 말을 기다렸다.
선발 시험 내용에 관한 사전 통지 없이 진행되는 시험.
어떤 시험일까.
“먼저 시험 방식을 설명해 주겠네.”
모두의 시선을 느끼며, 팽후는 시험 방식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원하는 이가 이 위로 올라서면 누구든 그에게 도전할 기회가 주어지네. 이기면 남고, 지면 내려가는 거지.”
기본적으로 뛰어난 무인은 오성 또한 밝다.
팽후의 짧은 설명에도 금세 규칙을 이해한 이들의 표정이 각기 변했다.
“그 누구도 도전하지 않게 되면 그자는 합격이네.”
팽후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먼저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물론, 얼마든지.”
그 적극성이 마음에 들었는지 팽후는 조급함을 지적하지 않고 흔쾌히 자리를 비켜 줬다.
그런 팽후의 빈자리로 당당하게 올라서는 남자.
“황보척이라고 한다.”
당당하게 벌어진 어깨.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
황보세가의 차남인 황보척이다.
옛날에 설천위에게 시비를 걸고 본전도 못 찾았던 황보택의 형.
차돌처럼 단단한 주먹을 들어 올리며 황보택이 모두를 내려다봤다.
“덤벼라.”
자신감.
이 자리에 있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 확신.
황보택처럼 가문을 믿고 설치는 게 아니다.
진짜, 스스로의 주먹에 확신을 품고 있는 거다.
“좋군.”
그 모습에 입꼬리를 올린 철백이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주먹 대 주먹 대결은 오랜만이군.”
“네가 요즘 유명한 철백인가?”
금강철권(金剛鐵拳).
최근 학관 내에서 돌고 있는 철백의 별호다.
이번에 정(丁)으로 오르기 위한 승급 시험을 진행하면서 얻은 별호.
황보척은 그 별호를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이유?
간단하다.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철권(鐵拳)이란 말이 어울리는 건 황보의 주먹이다.
하지만 그런 황보척의 생각 따위는 하나도 관심 없는 철백은 웃으며 주먹을 들었다.
“시작하지?”
“흥, 예의라곤 없는 놈.”
가벼운 코웃음과 함께 황보척은 땅을 박찼다.
짓밟아 주마.
그런 생각을 품고 달려드는 황보척의 주먹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벽력신권(霹靂神拳).
속도는 물론이고, 벼락의 파괴력까지 담았다고 자신하는 황보세가의 독문무공.
그 주먹이 벼락같은 속도로 철백의 가슴을 노리고 파고든다.
선공(先攻)의 이점은 이곳에 있다.
특히, 벽력신권처럼 뛰어난 속도를 가진 권법은 선공을 취하는 것만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제약한다.
이 주먹보다 빠르게 반격할 수 없으니 막거나 피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한번 흐름을 가져오면?
그대로 몰아붙이는 거다.
신권(神拳)이란 이름에 부족하지 않은 초식들로.
‘흥! 역시 고작해야 배워 먹지 못한…….’
하급 무인…….
속으로 철백을 비웃으며 달려들던 황보척은 순간 의아함을 품었다.
이 주먹이 조금 있으면 저 가슴에 닿는데, 왜 아무런 반응도 안 하지?
막거나 피하는 것을 예상해 다음 움직임을 준비하고 있는데, 어째서?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황보척은 자신이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철백의 별호에 금강(金剛)이라는 단어가 붙은 이유.
‘버틸 셈인가?’
내 주먹을?
맨몸으로?
다른 잡배들의 주먹과 황보세가의 주먹을 같은 선상에 둔다고?
솟구치는 화와 함께 황보척은 더욱 깊게 주먹을 내질렀다.
부숴 주마.
거기에 네 느린 공격도 유유히 피해 주지.
그런 마음을 품고 어느새 지척에 다다른 황보척.
그의 주먹이 철백의 가슴에 닿는다.
벼락의 형태를 품은 주먹이 그 가슴에 작렬해 엄청난 충격음을 만들어 낸다.
빠각!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
성공이다.
이런 오만한 놈의 가슴을 확실하게 뭉개…….
“커헉!”
순간, 시야가 까맣게 변해 버린 것을 느끼고 황보척은 몸 전체를 감싸는 부유감에 당황했다.
무슨 일이 있었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파악을 하기도 전에 등이 땅에 닿는 느낌과 함께 황보척의 의식이 끊어졌다.
“승자, 철백.”
그리고 이어지는 담담한 승리 선언.
무려 팽후의 판정이다.
물론 팽후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선언했다고 하더라도 이견이 있을 리 없는 장면이었지만.
“멍청해.”
날아간 황보척을 보며 당화유가 고개를 저었다.
황보세가는 같은 오대세가이기에 나름 안면이 있는 사이다.
황보세가의 가장 큰 문제는 오만한 성격이란 걸 알았지만…….
“이런 자리에서까지 방심이라뇨. 말이 안 되는군요.”
무림학관에서 한 번 더 선발한 인원들이 모인 자리가 이곳이다.
그런데 방심?
어떤 무공을 익혔고,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졌는지도 모르는데?
하물며 철백은 외공의 고수라고 이미 알려진 상황인데, 저런 무모한 돌진을 감행하다니.
멍청하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차분하게 싸웠다면 확실한 승리는 몰라도 저렇게 허무하게 지지는 않았을 거다.
최소 백 합은 넘게 겨뤘을 거고, 오른손이 저렇게 병X처럼 어긋나지도 않았을 테지.
모두가 바닥에 기절해 널브러진 황보척을 비웃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팽후가 헛기침을 해서 다시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그럼 이 학우에게 도전할 이는 없는가?”
팽후의 목소리에 몇몇 사람들이 고심하듯 미간을 찡그렸다.
검조차 튕겨 내기로 유명한 철백.
별다른 정보 없이 싸우고 싶지는 않은데…….
몇몇 사람들이 그렇게 눈치를 보던 순간.
“소승이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반짝이는 머리가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마치 태양이 하나 더 뜬 것 같은 눈부신 반짝임.
“……반짝반짝하네.”
“씁! 혼나요!”
무심코 중얼거리는 설천위의 말에 서하영이 기겁했고, 유예린은 웃음을 억눌렀다.
그 대화가 다 들렸을 법도 하지만, 대머리의 주인은 아무런 반응 없이 철백의 앞에 섰다.
“소승은 소림사의 혜송이라고 합니다.”
정중한 태도로 반장을 하는 모습에서 무게감이 느껴진다.
그 모습에 철백도 포권으로 대답했다.
“철백이라고 하오.”
“이리도 외공을 깊이 익히신 분이 계신지 몰랐습니다.”
“할 줄 아는 것이 이것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소.”
“그렇다고 하여, 그 대단함이 빛이 바래는 것은 아니지요.”
철백을 칭찬한 혜송은 반장을 한 상태 그대로 작게 웃으며 철백을 바라봤다.
“저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알겠소.”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철백이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철백의 주먹이 혜송의 안면을 향해 날아든다.
부딪히는 순간, 코를 비롯한 뼈 몇 곳이 가루가 되어 버릴 위력의 주먹.
그렇기에 혜송은 그 주먹을 막는 선택지를 골랐다.
단단하게 단련된 팔이 내공을 머금고 주먹을 받아 낸다.
뿌드드득.
묵직하게 파고든 주먹을 받아 내는 몸이 비명을 지른다.
단련된 근육은 물론이요, 어깨와 허리, 무릎까지 그 충격을 해소하기 바빴다.
그냥 주먹인데.
“중권(重拳)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누군가의 한마디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남궁선.
조금 전까지 나른한 태도로 맥이 풀려 있던 그녀가 어느새 허리를 곧추세우고 똑바로 앉아 비무를 관람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우리 남궁세가의 중검과 강검을 닮은 형태의 권법이라 할 수 있다.”
갑작스러운 설명.
그 설명에 몇 사람은 살짝 당황해서 남궁선을 바라봤다.
아니, 그거 설명해 주면 철백이 너무 불리해지지 않나?
저기서 혜송이 지든 이기든 철백도 앞으로 계속 싸워야 할 텐데?
그런 설명에 몇 사람이 당황할 때, 설천위는 담담하게 그녀의 말을 받고 있었다.
“천암붕권(天闇崩拳)이라고 하더군요.”
설천위는 배우지 못한 권법.
천마가 알고 있는 수많은 무공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들어가는 진짜배기.
신공절학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는 무공이다.
설천위의 대답에 남궁선은 만족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대로 하늘조차 무너트릴 만한 주먹이네.”
하지만, 그렇기에 동시에 아쉽다.
“아직 미흡하군.”
“익힌 지 얼마 안 됐거든요.”
철백의 재능이 워낙 뛰어나서 이 정도로 익힌 거지,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비무에선 쓰지도 못할 수준으로밖에 못 익혔을 거다.
저 무공은 그런 무공이니까.
“그렇다면 친선전이 기대되는군.”
히죽 웃는 남궁선의 미소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쾅! 쾅!
저기서 폭음을 터트리고 있는 주먹이 아직 미흡한 것이라면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아쉽지만 조금 더 싸워야겠어.”
그렇다고 해서, 혜송에게 이길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웅.
혜송이 끌어올린 웅장한 기운을 품은 내공이 철백의 주먹을 튕겨 내기 시작했다.
아직 미흡해 초식을 거의 그대로 재현하는 철백의 주먹을 읽어 낸 것이다.
그렇기에 철백은 급히 자신이 여태까지 익히던 권법으로 그 초식을 바꿨지만…….
“아미타불-.”
그 권법으론 위력이 부족했다.
혜송의 단련된 육체와 내공을 감당하기엔 그 힘이 부족했다.
결국.
“천수관음(千手觀音)!”
허공을 가득 메우는 권장(拳掌).
세는 것도 힘든 숫자의 주먹과 손바닥의 형체가 철백을 난타했다.
철백은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이미 완전히 기세가 넘어간 상황.
“승자! 혜송!”
그렇기에 팽후가 먼저 시합을 끝냈다.
정말 끝까지 버티고 버텨 후반으로 가면 어찌 될지 모르겠으나, 이 시험은 그렇게 바닥을 보고자 하는 시험이 아니었다.
팽후의 개입에 공격을 멈춘 혜송은 반장과 함께 허리를 숙였다.
“한 수 배웠습니다.”
“……한 수 배웠습니다.”
공격의 여파를 해소하느라 조금 늦게 대답한 철백은 작게 호흡을 고른 뒤 비무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철백이 내려가고.
“다음 도전자 없나?”
혜송에게 도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혜송의 합격을 선언한 팽후는 아직 가만히 앉아 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아쉽군.’
특히, 설천위와 서하영.
저 둘의 실력이 어디까지 늘었을지 궁금했는데.
그렇게 팽후가 아쉬워하는 사이, 남궁천이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런 남궁천에게 팽가 출신의 학생이 도전했고…….
허무하게 깨졌다.
격차.
병(丙)과 정(丁).
고작 한 등급 차이지만 고작 한 등급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압도적인 실력 차이.
남궁천의 합격이 선언된 뒤로 올라온 당화유와 유예린 또한 제대로 된 도전자 없이 합격했다.
그렇게 열두 자리 중 벌써 네 자리가 채워졌다.
남은 인원은 부상으로 기절해 있는 황보척을 제외하고도 열다섯.
이제 선발될 확률은 거의 오 할 정도밖에 안 되는 상황.
“흠.”
모두가 눈치를 보는 상황에서 조용히 일어난 한 사람이 비무대 위로 올랐다.
작은 키.
귀여운 얼굴.
그런 키와 달리 성인 남성의 크기에 알맞은 길이의 도(刀).
하지만 묘하게도 허리춤에 찬 도가 잘 어울리는 소녀, 소윤혜.
그녀의 등장에 몇몇 사람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누군가는 의아함 때문에.
누군가는 긴장감 때문에.
순간, 공기가 변한 것을 느낀 팽후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건 기대가 되는군.
자, 누가 도전할 것이냐?
팽후가 기대감에 눈을 반짝이는 사이, 누군가가 비무대 위로 올랐다.
“팽가의 팽소혁이오.”
“소가의 소윤혜라고 합니다.”
팽가의 기대주 중 하나.
조금 전 남궁천에게 도전했다가 패한 사람.
패배의 충격이 있을 법한데, 그 눈동자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소윤혜로서는 썩 익숙하지 않은 유형의 사람.
“같은 도(刀)를 갈고닦는 무인으로서 한 수 배우겠소.”
당당하게 포권을 취하는 팽소혁에게 마찬가지로 포권으로 답한 소윤혜는 부드럽게 웃었다.
“저도 팽가의 도를 볼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조부조차 칭찬했던 도(刀)이니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 눈빛으로 시작을 합의한 두 사람은 각자 도를 뽑았다.
선수의 양보는 없다.
그저 틈이 있다면 벨 뿐.
암묵적 합의 끝에 팽소혁이 먼저 걸음을 내딛는 순간.
팽소혁의 눈에 도를 휘두르는 소윤혜가 들어왔다.
몇 걸음이나 떨어져 있는 상황.
왜?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팽소혁의 몸은 본능적으로 목을 지키고 있었다.
쩡!
철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팽소혁의 몸이 날아간다.
“……이런.”
이러면 팽가의 도를 못 보는데.
평소 하던 대로 했던 소윤혜가 어색하게 웃는 순간.
“승자 소윤혜!”
소윤혜에게 도전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그리고 그녀를 시작으로 설천위를 중심으로 뭉친 이들이 비무대 위에 오르기 시작했다.